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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묵상글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이어가는? 또는 증거 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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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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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2023년 9월 20일 강론글입니다.
23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어가는? 또는 증거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이번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에는 궤변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처럼 꼭 순교해야 하나?
배교한다고 해도 하느님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박해상황이 되어 또는 북한에 살게 되어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믿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면 굳이 믿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겉으로는 안 믿겠다고 하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않는가?
입으로 안 믿는다고 해도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되지
굳이 믿는다고 하여 죽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인들 가운데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가문을 보면
아버지 형제 가운데 아버지 정약종과 가족은 모두 순교하였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를 선택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배 가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지금에 와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완전히 떠난 것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우리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옹호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그리고 입으로 배교했다고 하느님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사실 많은 신자가 순교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간 것은
입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증거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배교 후 교회를 파괴까지 한 완전한 배교자를 빼놓고,
나머지는 두 부류 곧 신앙을 ‘이어온 신자’와 ‘증거 한 신자’ 두 부류이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성인들은 그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증거 한 분들이고,
대표 성인인 정하상 바오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정하상 바오로는 6세 때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이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들까지
그의 가족이 천주교를 버리도록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라고 달레의 한국 천주교 교회사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것을 개인의 불행을 넘어 가족의 불행이라고 생각했으면 배교했을 텐데
정하상 바오로와 가족들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요 영광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그랬기에 그는 20대 젊은 나이에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어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그는 1825년 조선의 독립적인 교구 설립을 요청하는
편지를 교황청에 보내어 1831년 마침내 조선 교구가 설립되게 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모셔 오기 위해 2,000km의 북경 길을 여러 차례 왕복하였고,
그래서 조선 교구 2대 주교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땅 신부를 영입했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 ‘상재상서’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이 어쩌면 한국교회 최초의 교리서 또는 신학 저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천주교가 어떤 교인지 보유론과 호교론적인 입장에서 역설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앵베르 주교는 신학 교육을 속성으로 시키고 사제품을 주려고 했으나
1939년 기해박해로 그가 순교하게 되어 그는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이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그것은 김대건, 최양업, 유방제의 신학생 선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정하상 바오로와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신앙을 증거 한 순교 성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 돌아봅니다.
근근이 이어가는 신앙인지,
적극적으로 증거 하는 신앙인지,
하느님으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전하는 신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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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괜히 미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 ‘나’를 함부로 한다는 생각 등으로 미워집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그냥 밉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 그 사람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멀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지는 않지만, 멀리하지 않는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원망과 미움이 애정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미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아마 모든 사람이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억지로라도 가까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 봉사자들의 고충을 종종 듣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하소연하시고 그래서 더 이상 봉사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심리적 안녕감, 만족감, 행복감 하물며 엔도르핀이 세 배 이상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타인을 돕는 행위라고 합니다. 봉사 과정에서 미움 등의 부정적 감정도 생길 수 있지만, 봉사에 집중한다면 그런 부정적 감정을 넘어서는 큰 선물을 주님께 받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반대로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삶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위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91년의 신해 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박해자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미움의 감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었고, 구원의 선물까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사랑에 우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십자가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과거 순교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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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포기하지 않는 것도 실력이다(알렉스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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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순교한 이들 중에 11명의 성직자와 92명의 평신도, 모두 103 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고, 그 외에도 약 1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성인품에 오르지 않은 모든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개혁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오늘 <제1독서>는 의인들이 비록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며, <제2독서>는 세상의 어떠한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랑의 대헌장”을 들려줍니다.
이는 순교의 본질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교부 테리툴리아누스가 말한대로,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하느님 사랑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조들이 걸은 이 “순교”의 길은 비록 그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오늘 <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와 희생의 삶이 일회적이 아닌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교는 매일의 삶 속에 벌어지는 지속적인 사건이요, 또한 “참된 삶은 긴 순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와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의 녹색순교로 죽음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는 것은 죽음에로 부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
이토록 제 자신을 바치는 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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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천상의 희망으로 시련을 감당하였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1요한4,10-12)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사랑을 살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씨앗인 순교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또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천상에서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한국 천주 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천상 행복이라는 미래의 확고한 희망으로 현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의지했고 사랑 안에 살았으며 은총과 자비를 입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 이 마음이 순교자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는 240년(1784년) 전 초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못된 종교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믿음을 받아들였고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본다든지,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로 가서 교우촌을 형성하며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웠고 추호도 하느님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로써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들은 천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며 오늘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신앙 선조들은 천상의 기쁨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을 두고 지혜서는 예언하였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1-5).
우리도 고통 속에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며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서로 도웁시다.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하며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 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포졸이 감옥생활 안에서도 너무도 당당하고 평화로운 천주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수 없는 그 감옥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웃으며 살고, 나는 돈까지 받으며 바깥에서 편히 있는데도 불평이 가득하다. 그러니 옥 속에 있는 그들이 죄인인지 옥 바깥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모르겠다.”
신앙 선조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보면 1791년 신해 박해로부터 186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는 늘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처형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해가 심할수록 믿음도 커갔고, 형제애는 더 깊어졌습니다.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영생을 그리며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힘을 줍니다. 자유를 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240년 전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성당도 가까이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성경도 있고, 성직자도 많고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을 갖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세상과 타협도 합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크게 구별이 없습니다.‘남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뭐!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데?’‘바보 소리 듣는데’하면서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예’할 것은‘예’하고‘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 재물과 명예와 위신, 체면, 심지어 취미생활과도 타협한다면 그 안에 신앙인의 모습은 없습니다. 내 삶의 모습 안에 주님이 비추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믿는 이들이 늘어나겠습니까?
선조들은 피의 순교를 통해 신앙을 증거하고 지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지켜야 합니다. 정말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날이 안 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하느님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의지를 접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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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하와이엘 잠시 다녀왔습니다. 하루 전에 확인 했을 때는 터미널이 A였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터미널 A에서 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 신부님이 전화했습니다. 저는 게이트 34에 있다고 했습니다. 신부님도 34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없었습니다. 밤사이에 터미널이 A에서 D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터미널 D로 가야 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 공항은 게이트는 물론 터미널까지 종종 바뀐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래도 저는 다행입니다. 어떤 신부님은 게이트 바뀐 걸 몰라서 비행기를 놓치고,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고난의 잔을 받아 들였습니다. 신앙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내가 바뀌는 것이지, 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여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빠져서 국정을 운영하면 혼란이 발생합니다. 원칙과 공정에 따라서 법이 집행되어야 하는데,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국정에 개입하면 국가의 질서가 엉망이 됩니다. 국방부 장관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특검’의 논란이 되는 것은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경찰청장도 잘 했다고 했고, 절차대로 마무리했으면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외압이 있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권력과 권한은 권력과 권한을 준 국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권력과 권한을 사적인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살로메의 청을 받아들여 의로운 사람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관리는 청렴해야 하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특별한 체험을 했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같이 생활한 적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가 신약성서의 집필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도 인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헌신과 죽음도 헛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시중을 들고, 자신들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을 따르는 것 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험을 들은 사람들은 보험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우리들의 신앙, 우리들의 교회가 더욱 발전하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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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뜬금없는 질문입니다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가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잘 가늠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웃어줄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안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매 맞을 수 있고, 아파할 수 있고 울어 줄 수 있는 것 그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하고 늘 고민하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좋아함은 자신을 버리지 않지만, 사랑함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느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그리고 그 느낌으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와 똑같은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여인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빌어먹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또한 오늘의 여인들처럼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따르기도 힘듭니다. 사랑이 없다면 말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십계명 잘 지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미사 열심히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인가요? 죄 안 짓고 착한 일 하며 사는 것인가요? 물론 부분적으로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도에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에 앞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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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실로 수놓은 아름다운 옷
얼마 전 사제 연수를 위해 밤 비행기를 탔습니다.
티켓을 준비하고
화물을 부치고
검색을 통과하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딜레이 됬다고 해서 또 기다리고….
그렇게 지쳐갈 때쯤 비행기는 이륙했습니다.
밤 비행기는 오랜만이었습니다.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으로 밖을 봤습니다.
금실로 수놓은 아름다운 옷을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금실로 수놓은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잠드는 이곳에 금실을 입혀놓은 보금자리였습니다.
가끔은 멀리서 봐야 합니다.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금실로 수놓은 옷을 걸치고 잠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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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순교적 삶”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에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 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의 절정을 이루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의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287장 입당성가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퇴장 성가 역시 두분의 작품인 “순교자 찬가” 283장을 부르게 됩니다. 오늘 적당한 시간되면 두 성가를 부르면서, 또 다음 시편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순교영성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우리는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지만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은 의무기념으로 지냅니다. 한국천주교회의 18-19세기 100여년에 걸친 박해시기 10000여명 순교자들을 낸 것은 세계 천주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명례방 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 정사박해(1797년), 신유박해(1801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경신박해(1860년), 병인박해(1866년), 한티 천주교 박해(1868년), 제주도 교난(1901년)등, 무려 1세기 100여년 동안 상상하기도 끔찍한 순교자들의 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물든 때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 박해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말그대로 순교자들의 한국천주교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현 상황의 매우 위중하고 심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폭력의 악순환, 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도대체 앞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후위기만 해도 심각한데 국내외 상황은 여전히 어지럽고 혼란합니다. 길과 희망, 진리와 빛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 사람들같습니다.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무엇하나 낙관적 징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믿는 가톨릭 신자들만이라도 순교영성을 새로이 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주님의 전사, 진리의 전사, 평화의 전사, 빛과 생명의 전사”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구체화되며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제1독서 지혜서의 의인들처럼 한결같은 내적평화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신뢰와 사랑의 순교적 삶에 충실할 때 이런 은총의 선물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축복이 뒤따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기일전 용기를 내십시오. 참으로 이런 은총에 힘입어 제2독서 바오로의 고백을 내 고백으로 삼아 주님 사랑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다음 고백이 우리를 사기충천하게 합니다. 새삼 주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고,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하며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 모두 순교영성을, 백절불굴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답을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종파를 초월하여 예외없이,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보편적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참사람의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진리의 길 주님 하나뿐이라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길과 희망, 빛과 생명, 진리의 주님을 잃었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주님을 잃고 자기를 잃은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좀비’와 ‘헛것’의 유령같은 삶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끝으로 제 평생 좌우명 고백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구원은 요란한 구호가 아닌 한곁같은 파스카 삶의 실천으로 성취됩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게 와닿은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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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길을 떠나네>
“그분과 함께”(루카 8,1)
“그들과 함께”(루카 8,2)
기쁨을 만나
기뻐하는 사람들
기쁘게 하고파
기쁨과 함께
길을 떠나네
희망을 만나
희망하는 사람들
희망을 나누고파
희망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사랑을 만나
사랑받는 사람들
사랑하고파
사랑과 함께
길을 떠나네
베풂을 만나
거저 받은 사람들
베풀고파
베풂과 함께
길을 떠나네
살림을 만나
살아난 사람들
살리고파
살림과 함께
길을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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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사도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여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그 여자들이 자기들 재산으로 사도들의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복음서를 읽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그렇게 했음을 알라고 하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하느님의 은신처는 어디에서 탄로나는가? 하느님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하느님의 복이 깃들인 창조계를 보고 기뻐 뛰는 자리에서 하느님은 발견된다. 환호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은 뛰논다. 창조계,곧 존재와 생명이야말로 신적인 복 가운데 첫 열매다. 피조물 속에 있을 수 있는 선 - 꿀 - 은 모두 하느님 안에 모아진다. 이제까지 하느님보다 더 창조계를 보고 기뻐 뛴 사람은 없었다. 모든 천사는 물론이고 하늘과 땅의 모든 성인도 … 기뻐 뛴다. 하지만 이 모든 기쁨을 다 합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선행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에 비하면, 그 모든 기쁨은 눈동자만큼이나 작은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피조물의 기쁨, 곧 천사와 사람의 기쁨은 자신들의 행위로 복이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의식이 있는 피조물은 창조계에 복이 되도록 운명지어졌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하느님의 사람들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복을 받는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 가진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 하느님은 선행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 다른 모든 행위는 하느님이 보기에 재와 같을 뿐이다.(242)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교부들의 격언
유혹과 걱정들
사람들이 어느 옛 교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50년 동안 가능하면 빵이나 포도주 없이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나는 정욕을 죽여 버렸고 탐욕과 명예욕도 마찬가지로 극복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아브라함 교부가 그에게 와서 “물었다.” 자네가 참으로 이런 말을 했는가?" 그는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브라함 교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게, 자네는 아직 탐욕을 완전히 죽이지 못했네. 자네 안에 그것이 아직도 살아 있네. 그것은 단지 묶여 있을 뿐이네. 자네가 이리저리 다니다가 돌이나 옹기 조각들 사이에 황금이 있는 것을 보면 자네의 이성은 그것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볼 수 있겠는가?"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 황금을 집어 들려는 생각과 싸울 것입니다.”
아브라함 교부께서 말씀하셨다.
“보게,자네의 탐욕은 단지 묶여 있을뿐, 아직도 살아있네."
아브라함 교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보게,자네가 두 명의 형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올 들었다고 가정해 보세. 한 사람은 자네를 몹시 사랑한다하고, 다른 사람은 자네를 미워하면서 험담을 한다고 하세. 이 두사람이 자네에게 온다면 똑같이 대할 수 있겠는가?"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대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 교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래 알겠네. 격정들은 그만큼 강한 것이고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있다네. 오직 성인들만이 이들을 묶어 둘 수 있을 뿐이네."(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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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신학생 시절 읽었던 ‘엔또 슈사꾸의 침묵’은 제게 큰 감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는 어느 시골 신부의 마지막 표현처럼 “모든 것은 다 은총입니다.”라는 점을. 생명도 죽음도, 배교도 순교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소설이었습니다. 「침묵」은 이렇게 그 내용을 전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집니다. 제자였던 ‘로드리고’ 신부는 사실 확인을 위해 일본 선교를 지원합니다. 잠입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밟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가 거절하면 할수록, 그의 신자들은 더욱더 참혹한 고문을 받습니다. 자기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교우들을 보면서 신부는 고뇌에 빠집니다. 배교해서 죽어가는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을 위해 그들의 처절한 죽음을 묵인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참된 사랑인가? 고뇌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 밟는 네 발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다.’ 로드리고의 말이 이어집니다. ‘주님, 당신의 침묵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순교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은 길지만 읽어 보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영세하였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 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도들 자신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에서 교회 역사상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27년 정해, 1839년 기해, 1846년 병오, 1866년 병인 년에 순교하신 순교자들의 피로써 영구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들은 혈통으로나 언어로나 문화로나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아울러 그분들은 피로써 증거한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의 부모들이십니다. 열세 살 난 소년 유대철 베드로로부터 일흔 둘의 노인 정의배 마르코에 이르기까지 남자, 여자, 사제, 신도, 부자, 빈자, 상인, 양반 할 것 없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어 가셨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으로 태어난 세계 유일무이한 교회라는 점과 갓 태어난 신생 교회는 곧바로 수없이 끔찍한 박해를 굳건히 이겨냈고, 짧은 세월 안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장한 순교자들을 배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그분들이 피로써 지킨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끊임없는 고통 중에도 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 내셨고, 그 사랑으로 희망을 사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이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8,35.37) 그러기에 한국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고 순교하였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그 가치를 위해 온 삶을 투신한 분들이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그분들의 위대한 삶을 뒤따르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조들이 사셨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가치가 마치 절대 가치인 양 여겨지는 세상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싸워나가야 할 적은 선조들이 겪었던 박해라는 물리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밋빛으로 위장된 갖가지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유혹들입니다. 이런 유혹이 더 심해지고 있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신앙인에게 근본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선택을 위한 우리 모두의 내면적인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치열한 싸움의 순간이 우리에게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 가치를 살아가기 위해 내려야 할 선택의 순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미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복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9,23)하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던 잔인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십자가가 생명과 부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3, 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온전히 자신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를 예수님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욕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삶의 의욕도 없고 성취 욕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마침내 멸망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는 것은 곧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포기하고, 이기심과 명예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 문제입니다. 고통도 죽음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고통과 고생이 의미 있는 고통인가, 무의미한 고통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당신 몸소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당신의 제자라면 신앙으로, 사랑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십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누구도 십자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과 자기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4)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곧 순교자의 삶을 사는 길이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거룩한 산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의 적색 순교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가능하지만, 피 흘림 없는 백색 순교는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죽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이기에 이보다 더 거룩한 순교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칠 수도 있고 중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가신 예수님은 물론 오늘 우리가 현양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을 바라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기꺼이 사랑으로 바친 순교자들을 뒤따르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름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성가, 103위 순교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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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부활을 처음 목격한 은총의 여인 막달레나 /
박윤식 [big-llight] 240919 20:15 ㅣNo.176089
오늘날 곳곳에서 여럿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들을 본다. 특별히 본당에서의 여성들의 활동은 참으로 헌신적이며 아름답고 놀랍기가 그지없다.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봉사하는 그들이 있어서, 교회는 더욱 활기가 넘치는 생명력을 가진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복음을 선포하는 곳에는 좋은 여인네들이 모여 하늘나라를 일구어 가나보다. 그분께서 구원사업 펼치실 때 당신 혼자서가 아니라 공동체로 수행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야 당신 홀로 일하시는 것이 더욱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공동체 구성원은 대부분 복음 선포의 능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홀로’ 외로이 하시는 것보다 ‘함께’ 더불어 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더더구나 그 공동체에는 지금마냥 여인네도 다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여자는 증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참여가 금지되었다. 귀족 집안의 여인들은 나갈 때 머리장식으로 얼굴을 가렸고, 서민층 여인들은 일터를 제외하고는 혼자 있어서도 안 되었고, 낯선 남자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마저 물론 금지되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여기셨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서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하시고는, 그 고을과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였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주위에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려고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뽑아 세우신 열두 제자와 함께 자발적으로 모여든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당신 사명을 수행하셨다. 특히 당시에 엄격히 제한되었던 죄인 취급받던 힘없고 말 못하는 여성도 주님의 일행에 참여하여 시중을 들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재산을 몽땅 다 팔아서까지. 어쩌면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부족함을 느껴, 자비스런 예수님 말씀에 기쁨을 느꼈으리라. 이리하여 그들은 결국에는 주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여러 여인과 함께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 그녀는 어찌하여 처음부터 예수님을 추종했을까? 일곱 마귀로 한때 포기했던 삶이었는데 그분께서 다가오셔서 빛과 향기를 주시며, 죄 많은 삶을 떠나 기쁨을 되찾는 계기를 주었기 때문일 게다. 새로운 은총의 삶은 그걸 깊게 체험해 본이만 잘 안단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고, 그분 곁에서 ‘죽으나 사나’ 함께 머무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그녀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났다. 그 촉매제가 된 힘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잘 모른다. 다만 그분 만남으로 막달레나는 철없는 철부지 같은 어리석은 삶을, 예수님 곁에서 부활로 자신만의 기쁨을 누리는 엄청난 변화를 하였다. 평생 감사할 만큼 은혜로운 체험이다. 우리에게도 악의 기운이 없는지? 무언가가 우리네 삶을 어둡게 한다면 기도해야 할 게다. 예수님 부활을 처음 목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내린 주님의 그 은총을 우리도 기도로 청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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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복음 환호송에서 철부지라는 낱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십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이른바 철부지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특출한 인물들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안에 베풀어져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악령과 병에 시달리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부족함이 많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그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기준과 가치의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을 예수님께 적용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1코린 15,12) 하고 먼저 단정 짓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철부지의 위치에 서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예수님께 맡기고 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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