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외교 정책](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naver.net%2F20120528_123%2Fdbals7840687_13381810467513UTNo_JPEG%2F%25B1%25A4%25C7%25D8%25B1%25BA%25C0%25C7_%25C0%25AF%25B9%25E8%25C1%25F6.jpg)
한국사 이야기 563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7 : 제주도
비운의 임금 광해군의 자취가 서린 제주도
비운의 임금으로 제주에서 그 생을 마감한 광해군(光海君)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아버지 선조(宣祖)와 어머니 공빈김씨(恭嬪金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1575에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
1608년에 임금에 올라서 1623년까지 15년간 조선을 다스렸다. 이름은 이혼(李琿), 본관은 전주이다.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세자 책봉 문제로 그의 형인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했고, 국가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했다.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의 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것을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밝혀졌다.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임해군을 교동도에 유배 보내고 유영경에게 죽음을 내렸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성공하지 못했다.
광해군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1613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던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이듬해 죽게 하는 데 일조했고, 1618년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서인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김류(金鎏)ㆍ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 등 서인들이 주도했던 인조반정에 의해 1623년 3월 폐위당한 뒤 광해군으로 강등되었다. 서인(西人)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종(倧)을 옹립해 인조(仁祖)의 시대를 열었고 광해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3월 19일 부원군(府院君)들이 합계하기를, “폐주ㆍ폐비ㆍ폐동궁ㆍ폐빈들(세자의 처)을 마땅히 대비의 하교(下敎)대로 각 곳에 위리안치해야 할 것이지만, 신들이 거듭 생각하온 즉 먼 지방 외딴 섬에는 뜻밖의 환이 없지 않겠으므로 가까운 강화ㆍ교동 등지에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니 엄하게 수직하여 허수로운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 『정사록』 중
그해 5월 22일 강화부윤 이중로(李重老)의 장계가 올라왔다. “이달 21일 삼경에, 폐동궁이 담 안으로부터 흙을 파고 70척 정도의 구멍을 뚫어 도망쳐 나가는 것을 잡았습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강화도의 관계자들이 붙잡혀와 국문을 받았고, 별장 권채(權綵)는 매를 맞고 죽었다.세자가 붙잡히는 것을 지켜본 폐빈 박씨는 24일에 목매어 자살했고, 금부도사 이유향(李惟響)을 보내어 폐세자에게 죽음을 내리니 25일에 스스로 목을 매었다.“티끌 속의 뒤범벅이 미친 물결 같구나. 걱정한들 무엇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은 참으로 한바탕 꿈이라. 백운(白雲) 사이로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리.” 강화로 유배되어 오는 배 속에서 폐세자가 지었다는 시 한 편이다.아들을 그토록 허망하게 먼저 보낸 폐비 유씨도 그해 10월 8일에 충격으로 죽었다. 그이 나이 48세였다.
광해군 유배지강화도에서 다지 제주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제주읍성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광해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배지를 태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1636년 교동도로 옮겼다가 1637년 6월 6일,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광해군이 강화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어 배를 타고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 더위에 소나기 성 위로 지나가니후덥지근한 장기가 백 척이나 높구나푸른 바다 성난 파도에 어둠이 깃드는데푸른 산 근심 어린 모습으로 가을을 전송하네돌아가고픈 마음 늘 왕손초(王孫草)에 맺혀 있고나그네 꿈 자주 제자주(帝子州)에 놀라네연기 낀 파도 위 외로운 배에 누웠구나
6월 16일 제주도의 어등포(지금의 구좌읍 행원리)로 상륙했는데, 제주도로 유배되어 생활했던 그 당시의 상황이 여러 문헌에 남아 전한다.
“정축년 2월에 교동에서 또 제주로 옮기는데, 한 무사가 호송하는 별장(別將)이 되기를 요청하여 ‘광해를 죽여’ 공을 세울 계책이었으나 얻지 못했다. 대개 이것은 경진 등의 뜻이었다.
- 『병자록(丙子錄)』 중
덕을 닦지 않으면 배 가운데 사람이 모두 적국이다.
그때 제주로 폐주를 옮기는데, 호송하는 사람에게 엄중히 하여 가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배 위의 사면은 무두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닿는 것을 기다려 비로소 알렸다. 이때 무신(武臣) 이원로(李元老)가 호행별장(護行別將)이 되었는데, 뱃길이 험난하여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배가 이미 도착해 휘장을 떼고 내리기를 청한 뒤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가 깜짝 놀라며 크게 슬퍼하며,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하였다. 제주목사가 맞아 문안하며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공자(公子)께서 만약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宦官)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을 것입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가운데 사람이 모두 적국(敵國)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하니 광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재임하고 있을 당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는 대북파 신료들의 끈질긴 요청에 진저리를 치며 다음과 같이 독백을 했던 사람이 광해군이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던지고, 인간 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두르고 멀리 떠나서 바닷가에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 그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는 강화와 태안, 교동도를 거쳐 결국 나라의 마지막 끄트머리에 있는 제주도에서 1641년 7월 가시가 쳐진 위리안치 안에서 한 서린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예순일곱이었다.
구좌읍 어등개광해군이 유배를 온 어등개 포구 전경. 광해군이 제주도로 유배를 올 당시 밖을 보지 못하도록 배의 사방을 막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재임 당시 업적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궁궐 조성공사에 힘을 다하여 창덕궁을 중건했다.
또 경덕궁(경희궁)ㆍ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다.이때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지(城池)와 병기(兵器)를 수리하고 군사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國境防備)에 힘썼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에서 원군 요청이 있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했다.
또 동시에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능란한 양면 외교 솜씨를 보였다.1609년에는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1617년 회답사(回答使)로 오윤겸(吳允謙)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되찾아오게 했다.
또 병화로 소실되었던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였던 임금이 광해군이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비롯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허준의 『동의보감』 등이 간행되기도 했다. 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오늘날 광해군의 공과(功過)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대체로 붕당(朋黨)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광해군이 죽은 지 500년이 가까워지며 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역사는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거대한 재산도 갖지 못했으며 어떠한 전투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고 또 소유하고 싸우는 자는 오히려 인간, 진짜로 살아 있는 인간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진정으로 맞는 말인가?”제주에 광해군에 대한 흔적은 남문로터리에서 원정로로 내려가는 길가, 국민은행 제주지점 정문 앞에 초라한 표지석 하나로 남아 있다.
‘광해군(光海君)의 적소 터’ 지역 신문사인 「한라일보」가 몇 해 전에 세운 표지석이다.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