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루﹡ 낮달 사용설명서 외 1편
조순희
튤립 한 그루
초록抄錄초록抄錄 첫 시를 받아 적는, 마을 어귀
화양면 활동리 21번지에 당도한 바람이
금강을 치마처럼 펼치고 하늘을 필사해요
벽오동 사이로 내걸린 희고 둥근 거울 하나
이별 하나 삼켰는지, 고요가 동공처럼 글썽여요
홍매루 지붕에서 구름으로 연을 띄우는 쑥부쟁이의 가느다란 종아리
소쩍새가 떨어트리고 간 풀빛마을을 향해 석초 선생이 걸어가요
산그늘 깊은 어성산 또 한 시절을 완성하러 왔을까요
진강에 시름 담그고 농어 몇 마리 낚으러 왔을까요
어쩌면 해송에 걸린 구름 한 마리 놓아주러 왔을까요
풀씨 여무는 들판에서 휘발을 완성했을 저, 그림자
오늘밤 거대한 붕새와 그분을 보았다고
펄럭이는 날개 위 그분 모습 정말 보았다고
상상하고 노래하는 당신과 나는, 우주의 연대기를 아는 사람들
낮달만 모아 만든 미소를 하고
방금 내게 손 흔들던 저 사내,
바로 그가 석초인 건 변할 수 없잖아요
﹡ 紅梅樓-신석초 시인의 당호
물버들길*에 닿다
조순희
소야리 자작나무 숲길 지나 다롱고개 넘어가면
벽오리 어디쯤,
일기예보에 적어넣은 구름 몇 송이 물버들길에 닿겠다
오후 들어 제 운명이 궁금해진 물총새 한 마리
가파른 수심을 갸웃거리며 물점(水占)을 치고
버드나무를 열고 나온 바람
환쟁이처럼 산수화 한 폭, 고개 비탈에 그려놓겠다
물오리나무 녹음 깊은 수조에 발 담그고
초록을 수혈 중인데, 유선형의 발목들
얼마 남지 않은 태양의 다급함을 알아챈 것일까
초록이 길러낸 수초 사이를 바셀린처럼 헤엄쳐간다
천 겹 허공, 가득
수채화물감 뿌려놓은 물버들길
방금 태양이 산란한 노을을 천 개의 손으로 받고 있다
*시초면 봉선리와 마산면 벽오리 소재
애지사화집 {북극 항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