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
막 14:32-42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막 14:32-42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마26:36-46,눅22:39-46] 겟세마네라고 하는 동산에 오르시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 하고 말씀하신 뒤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공포와 깊은 번민에 싸여 34)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하여 찢어질 것 같구나!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35) 하시고는 홀로 일어나 저만큼 걸어가서 땅에 엎드려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시간이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36)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치워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7) 그러고 나서 세 제자에게로 돌아와 보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단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너희는 깨어 있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육신이 약하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39) 예수께서는 다시 저만큼 걸어가서 같은 말씀으로 반복하여 기도하셨다. 40) 그리고 다시 돌아와 보나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매우 피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41) 예수께서 세번째 돌아오셔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그만하면 넉넉하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보라 인자가 악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42) 어서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전개될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십니다.
여기 앉아 있으라(3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한 최후의 결단을 위한 기도를하러 가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종종 제자들과 더불어 기도하시고 대화하신 장소로서(눅 22:39; 요 18:1-2), 평상시처럼 제자들에게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짊어질 그 무거운 짐과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 컸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보다 인류의 죄를 담당하며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3-38)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실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동행하셨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제자들에게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하나님과 교제하시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어떤 육신적인 문제나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적 교제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깨달아 믿음으로 행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세 명의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깊은 고뇌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39-4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잠시 후 벌어질 유다의 배신과, 예수님께서 군병들에 의해 붙잡히는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올바르게 대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육신이 약하여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시며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시며,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시간이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적용: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에게 함께 깨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당신은 그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함께 데리고 간 제자들에게도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언제든지 시험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당면한 어려움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위해 기도로 간구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아버지의 원대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기도를 합니다. 이웃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교회에서 특별 릴레이 금식기도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는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제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새벽기도 나오지 않는 교우가 새벽에 뒷자리에 와서 앉아 있으면 목사는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저 교우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오지 않든 새벽기도를 나왔는가? 설교를 하면서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깁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곤해서/바빠서. 이일저일 쫓아다니고 잠이 부족하다 보니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피곤할 수 있지만 피곤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벌려 놓은 일이 많아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한두 번 분주할 수 있지만 분주함이 계속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피곤하거나 혹은 계속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 일을 그만두든지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본문에도 보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옵니다.“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38절)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0절)
1. 바빠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고 할 때, 기도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세운 목표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을 낼 때 자연히 기도 시간이 줄게 됩니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르틴 루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기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건강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실상은 시간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집중력이 생깁니다. 따라서 기도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 시간을 버는 비결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2. 피곤해서
새벽기도에 가려고 하다가도 막상 일어나려고 하면 좀더 자자, 좀더 눕자, 오늘만 날이냐 하는 생각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 새벽기도 만들어가지고 하는 불평을 저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새벽기도를 오래 했지만 아직도 얼람이 없으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드리려면 전날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는데 어떻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습니까? 또 어떤 분은 안하던 새벽기도를 하면 골이 띵해진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 체질로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기도하면서 두 손을 모르고 눈을 꼭 감고 기도합니다. 때로 주여 소리를 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자, 기도하면 힘을 쓰게 마련입니다. 기도하면서 그나마 있던 힘까지 쏟는다. 그런데 기도하고 나면 힘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벽기도 올 때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기도하느라 에너지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벼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힘이 들고 피곤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일하는 것마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다. 이래도 기도 안하시겠습니까?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한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아무리 특별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나는 새벽기도 체질이 아니라면서 여전히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제직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물론 직장 때문에, 아이들 학교 보내는 준비 때문에 새벽기도에 못 나올 수 있습니다.그렇지만 작정하고 한번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되거든 토요일 한번은 나오시기 바랍니다.새벽기도에 들인 시간이나 에너지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할 것과 당신이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텐데 그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말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나는 결단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펄쩍 뛰며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베드로의 말을 으면서 다른 제자들도 그러겠노라고 장담합니다. 말로 떠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입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장담에 자기들도 그러겠노라고 다른 제자들이 동조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열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조차 없이 그냥 끌려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집니다. 피곤한 몸을 핑계 삼아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의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할 때 모든 시험은 비켜 갈 것입니다.깨어 있을 때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으며, 기도할 때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험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합니다. 사실 연약함 때문에 성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기도로 극복하고 영적으로 강건했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더욱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고 그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눅 3:21,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새” 공생애로서 첫 출발을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막 1:35,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하루의 바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지셨습니다. 눅 6:12-13에 의하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산으로 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하면서 기도하는 구체적인 자세까지 알려주시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하시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니 때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밤입니다. 그 밤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오십니다. 제자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애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십자가를 지고 갈 담대함을 얻기 원하셨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본문을 피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가 겪어야 할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나약한 발언을 하게 합니다. 종종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하여 꾸짖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으로서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같이 기도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같이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을 열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시던 하나님,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과 함께 계실 때에 오직 예수의 말만 들으라고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은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고 풍랑의 제압하는 등 놀라운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를 놓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말로 기도했으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응답받지 못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겟세마네 기도는 실패한 기도입니까? 예수께서는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고난의 심리적 고뇌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이어졌습니다. 성공적인 기도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고통 가운데 드리는 기도
기도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부족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하는 수단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심경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오실 때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는 빌 2:6의 말씀과 같이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심경이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두려워하며, 괴로워하셨다.” (33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34절)
이 시간이 내게서 비껴가게 해 주시옵소서.(35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36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내 영혼이 압도되어 죽을 지경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재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계셨으며 (막 10:45),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계셨지만 육신의 수난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셨습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이제 몇 시간 후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합니다. 육신의 고통보다도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당할 수난을 생각하시니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저자는 고통 가운데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난의 때에 예수님은 방황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고난을 당할지라도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2. 온힘을 다하여 드리는 기도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32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더불어 겟세마네라는 곳에 기도하러 오셨는데 그곳은 감람산 동쪽 기슭의 작은 동산으로 주변에는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겟세마네의 뜻은 Oil-Press, 즉 기름 짜는 틀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신 고뇌의 기도 현장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시고 기도하십니다. 아까 화면에서 보셨듯이 눅 22:44에 의하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기름 짜는 틀에 올리브 열매를 넣고 꽉 짤 때 올리브기름이 나오듯 예수님께서 온몸의 진액이 다 빠질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의 내용이 다 짜져서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 절).예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는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눅 11:9,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면서 예수님은 끈질기게 매달려서 기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다가 그만두는 자세로는 응답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간절히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항상 그리고 즉시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 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을 제한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자다가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우선을 둔 기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우리는 기도할 때 온 정성을 다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내 아버지여”라 부르며 시작됩니다.예수님이 항상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것이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데도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나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에게 통고만 하는 것은 참다운 기도자의 자세가 아닙니다.“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가 하며 시련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잔은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시11:6,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사 51:17,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당하는 고통이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된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피하려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번째 기도를 마무리 짓습니다. 처음 기도에서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뜻을 비치지만 이번에는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재확인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궁극적인 간구는 결국 하나님의 뜻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동안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고 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완성하려고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해달라는 기도의 내용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내 생각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우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마 6:33)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고 그 뜻대로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생각 이상으로 풍성한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4. 결단을 위한 기도
“일어나서 가자” (42절)
무엇인가에 미련은 있으나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미련을 버리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개인적인 소욕을 희생하는 것이 결단의 행동입니다. 서른 세살이란 한창 나이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삼년 동안을 동고동락하던 제자들과도 이제 헤어져야 합니다. 때로 인정에 이끌려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마귀가 잘 사용하는 무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춤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세상의 구원이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하시며 뒤로 물러선다면 적어도 예수님을 통한 인류의 구원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간절히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 동안에 개인적인 바람보다 점차로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결단을 가집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 기도를 통하여 담대함을 얻으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결연히 나아가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결단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 기도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주님께서 열두 제자 중에서 특별히 세 제자들과만 계신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막 5:37 ; 9:2) 오늘도 그들을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29절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내친 김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본장 29, 31절에서 주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과거가 있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10:38-39에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어보셨을 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은 십자가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누릴 특권만을 생각했지 주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이들에게 데리고 동산에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임박한 위기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있기 원하셨습니다. 그들 보고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그저 깨어 있으라 (Keep watch) 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기도는 예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평소에 친밀했던 세 제자들이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님에게 커다란 격려가 됩니다.겟세마네의 기도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정작 기도해야할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께서 다시 떠나가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낮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유월절 만찬이 모두 끝난 시각이라 자정도 지나 밤이 무척 깊었을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어 있어야만 했다.그 밤은 다른 날과 같은 평범한 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며 동시에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주님은 베드로를 주를 만나기 이전의 본래 이름인 '시몬'으로 부르셨는데, 이는 현 상태의 그가 교회의 기초가 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인물이 아니고 연약한 인간성을 지닌 순간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시몬아'라고 부르시기는 했지만 이 단어는 원래 복수형으로서 나머지 요한과 야고보까지 지적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이름이 호명된 것은 바로 그가 주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깨어 있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였으니 시험이 닥쳐왔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깨어 있을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육신의 피곤함과 분주함을 핑계로 하나님의 사역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뜻을 고집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는지요.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세워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예수님은 찔리시고 상하시는 고난의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으나 공생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완성된 기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생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며 구속을 완성할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일어나 함께 가자”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무리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더불어 결연히 앞으로 가십니다.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문제에 눌리거나 생활의 염려에 지쳐 있지는 않으십니까? 제자들에게 여러 번 찾아오시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깨우시던 주님이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연약한 심령을 깨워주십니다. 시련이 닥쳐 올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끈질기게 온힘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간절히 하되 자기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며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의 모습을 가집시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주안에서 온전히 신앙생활 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 합시다. 기도생활에 충실하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들이 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헤쳐 나갈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하여 삶 속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연구한 책 중에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1. 주도적이 되어라. 수동적이 되지 말고 능동적으로 주도하라. 2.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3.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4. 상호의존의 패러다임을 가져라. 함께 승리하는 윈윈(win-win) 방법을 생각하라. 5. 먼저 자신이 이해하고 난 다음에 남에게 이해시켜라. 6. 시너지 효과를 내라. 7.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라.
반대로 미국 ‘뉴욕타임스’지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 로라 슐레징어 박사는 상담을 하면서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변명을 찾아내어 ‘인생을 망치는 7가지 변명’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가정과 직장, 연애뿐 아니라 잘되던 일도 망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7가지 말이 무엇일까요? 로라 슐레징어 박사는 서두에서 인생은 힘들 때가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을 것인가 반문합니다. 7가지 변명이란 1.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인간이라고요. 2. 그게 잘못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3. 그게 옳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4. 알고 보면 나야말로 정말 불쌍한 사람이라고요. 5. 나도 한때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고요. 6. 그런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요. 7.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끌어 올라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비탄 가운데 젖어 세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내가 너무 힘들다. 너희들이 위하여 여기 깨어서 기도하라.”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다 와서 보니 제자들이 다 쿨쿨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셔서 “깨어라, 깨어라, 깨어라. 정말 나와 함께 잠시도 깨어서 나와 기도할 수 없더냐. 잠깐만이라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할 수 없더냐.” 말씀하시며,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라.”
결국 그들은 주님의 충고도 무시하고 잠으로 그 시간을 다 채워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정점이 되는 십자가 사건 앞에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진 반면, 잠을 잤던 세 제자들은 가장 비참하고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오늘도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제자들은 어려움을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너 왜 신앙생활을 그렇게 했니? 왜 그렇게 살았니?”라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주님, 저는 가난했잖아요.” “저는 어려웠잖아요.” “저는 연약했잖아요” 등등 여러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주님께서 수없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고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셨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해요. 내 속에 희망이 없어요. 하나님 기쁨이 없어요. 기쁨을 주세요.’ ‘하나님 곤고하고 어려워요. 가진 것도 없고요 많이 지쳤어요.’ 그러면 가장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마 여러분의 손을 붙잡으실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을 데려가는 곳이 있을 겁니다. 바로 이 땅에서 당신의 문제를 풀어가셨던 겟세마네 동산, 기도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주님께서 본문 말씀과 더불어 우리도 데려가기 원하시는 데는 몇 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많은 부분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고난과 어려움 앞에 당당히 서기를 원하시고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완벽한 삶,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기도로 사셨고 기도로 완성하셨기에 기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지치고 힘들 때도 기도함으로써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두고 5000명을 먹여야 하는 절대한계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우러러 축사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녀를 데려와 당황하며 부르짖는 그 안타까움에도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 나타남이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의 중압감이 밀려올 때도, 자신의 앞길이 막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죽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심으로 환희와 축제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어려웠던 십자가를 앞둔 순간에도 변함없이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 기도의 자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자는 모습을 보시고 깨우시며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떠나기 전, 죽기 전에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절망 가운데 한숨 쉬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것을 바라셨습니다. 기도만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그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이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늘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할 것 즉 구함의 우선순위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영광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를 풍요로운 삶으로 안내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주의사항과 얻는 축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말씀하실 때마다 기도 응답에 관해서도 반드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환경도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를 바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속에 하나님 임재를 체험합니다. 능력의 주님과 교제하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문제를 해결합니까.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권세 있는 사람은 권세로 풉니다. 당회를 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어떤 안건이 나왔을 때 교수님은 “연구합시다!” 하시고, 사업하는 분들은 “융통성 있게 합시다!” 그럽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틀로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 합니다.
이런 우리의 실존은 베드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힐 때 베드로는 칼을 휘둘러 아무 힘없는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실존을 지적하시면서 “베드로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보여주는 많은 무기 앞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주님의 그 말씀대로 일본은 패망하지 않았습니까. 화약으로, 총으로 시작한 그들은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마쳤습니다. 힘으로 얻은 자는 반드시 힘으로 곤욕을 치르게 돼 있습니다. 지금 중앙아시아에 일어나고 있는 권력의 변화를 보십시오. 힘으로 일어난 자가 힘으로 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도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물질이나 힘을 사용하셨더라면 지금 우리도 같은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기도로 하셨습니다. 가장 완벽한 인생을 살았던 주님, 가장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남겼던 주님, 그 주님이 살아가신 삶의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힘으로 나가기 전에 기도하는 자리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분개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자리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인생 여정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있지요? 살아보세요. 만만치 않습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어려운 문제 앞에 주저앉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존심 상할 일도 많습니다. 한계상황이 벌어질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겟세마네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2. 영적으로 승리하는 길을 알려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부담스럽고 또한 고통스러웠습니다. 제자들을 깨우러 세 번이나 확인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주님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피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끊임없이 자기 육체의 소리와 환경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5장 11~12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 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봅니다. 당신이 죄를 지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야 많은 생명이 살아나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그때부터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시오. 감당할 능력을 주십시오. 이것이 진정 내 인생을 만드시고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이 일을 이룰 수 있도록 저를 승리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육이 이길 수도, 영이 이길 수도 있습니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흰 개와 검은 개가 있습니다. 이들이 싸운다면 어떤 개가 이길까요? 정답은 ‘그 동안 잘 먹인 개가 이긴다’ 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내 영과 육체의 소욕을 듣는 내 판단이 대결할 때 어느 것이 이길까요? 마찬가지로 평소에 많이 먹인 것이 승리합니다. 우리 영을 위해 쓰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주님께서는 육체가 우리 속에서 승리하면 결과는 파멸과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란과 도적질과 다툼과 분노와 무정함과 배신과 그리고 나누어짐 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그 마음이 승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고 순종할 뿐 아니라 그 순종할 수 있는 힘도 바로 기도를 통해 공급 받습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조금 전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고, 그만 돌아가자고. 이젠 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고뇌하시던 주님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여 이제는 그 걸음걸음이 당당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겟세마네 이후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당당한 주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캐리는 세계가 선교에 대해 아직 눈 뜨지 않았을 때, 인도 선교사로 자원해서 갑니다. 42년 동안 활동하면서 수많은 고초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죽음의 유혹도 받았습니다. 부인은 거의 정신병자가 될 정도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일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사람과 함께 숙원사업이던 인도 45개 방언으로 말씀을 번역해 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잠자던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 가슴을 선교사역의 불로 뜨겁게 한 사람입니다.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한 사람이 찾아가 “당신은 지치고 힘든 고난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저는요, 하나님 뜻 그 이하도 이상도 없었습니다. 나는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뜻만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이곳에 보낸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 육체와 환경이 주는 소리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 뜻만 바라보았습니다.” 순간마다 삶 속에서 육체가 주는 소리를 끊어버리고 그 음성 앞에 순종한 윌리엄 캐리, 그는 고난과 고초가 많은 생애였지만 마침내 하나님 무대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고통이 찾아오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세신바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고통은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체 또는 영혼의 고통이 다가올 때에 고통을 주신 하나님 뜻을 안다면 훨씬 더 이기기 쉬울 것입니다. 고난 앞에 육체의 소리를 듣고 좌절하고 절망하여 죽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나를 살리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주님 뜻 앞에 오늘도 순종하고 나아가는 삶, 그 삶 속에 승리가 있지 않을까요.
윌리엄 캐리의 전기를 쓴 작가는 어떻게 윌리엄 캐리가 열정을 가지고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캐리에겐 몸 약한 누나가 있었습니다. 누나는 인도를 떠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윌리엄, 나는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나는 병상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몸이라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구나.” 전기작가는 윌리엄 캐리의 위대한 사역 배후에 있는 ‘기도밖에 할 수 없는 한 여인,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여인, 기도 외에는 자기존재를 발견할 수 없는 여인’에게로 초점을 맞췄습니다. 누나의 기도 속에 윌리엄 캐리가 사역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음을 전기작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캐리의 누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 앞에서 자기가 왜 나약한 모습으로 일평생 누워 지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풍성한 삶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라면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뜻을 찾는 사람은 인생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그 뜻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고난이 그를 덮쳐버릴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죽음으로 끝나버립니다.
남들보다 생활이 풍요롭고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모든 것 허락하신 의미를 찾지 못하면 축복은 저주가 됩니다. 축복이 축복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 고통 속에서도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 지혜, 영적으로 승리하는 길, 그 길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은 네가 무엇인가에 크게 눌려 있구나, 누가복음을 보면 ‘근심하고 슬퍼했다’고 돼 있습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눌려 자기 신념의 틀 속에 꼭 박혀 있었습니다. “난 새벽 체질이 아닙니다. 난 야행성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라는 말은 내게 순교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전 새벽에 나오면 하루종일 정신을 못 차려 직장생활을 잘할 수 없어 주의 영광 가립니다. 잠 푹 자고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에 묶여 있습니까. 일년에 두 차례, 그것도 한 두 주간 새벽시간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고 해서 여러분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까. 그것이 여러분 믿음의 삶을 중단시킬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줍니까?
주님께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셨다면 구원 받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달려와 들으시고 해결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풍성한 삶을 원하시기에. 오늘 여러분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 육체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를 겟세마네로 초청하십니다.
3. 기도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아무 때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기도할 시기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시키시는데 두 번이나 깨워도 계속 잡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와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됐다. 이젠 됐다. 이젠 기도할 필요도 없다. 기도할 이유도 시간도 없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자 이제는 들어가자!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 문제를 잘 풀 수도 있지만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로마군대를 상대로 싸우다가 로마군은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비무장 상태인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짤라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으로 서 있었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것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그는 잊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의 이름을 다 부르지 않고 ‘베드로야’ 하셨습니다. 성경책에 그렇게 쓰여 오늘날까지 전해질 줄 알았다면 베드로는 억울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만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앞장에 보면 “주님, 다 배신한다 해도 저 그럴 사람 아닙니다. 주님 저를 잘못 보셨습니다. 이 뜨겁게 찬양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주님께 헌신하는 이 모습 보십시오. 입으로 선포하는 이 담대함을 보십시오. 주님.” 이렇게 베드로가 호언장담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러고 싶지. 베드로야. 그 마음은 내가 이해한다. 그러나 기도 없이는 하지 못한단다.”
행복하고 싶지요? 여러분, 인생 승리하고 싶지요, 사랑하고 싶지요, 이 젊음을 하나님께 아름답게 드리고 싶지요, 허튼 데 시간 쓰지 않고 촌음을 아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를 보내신 목적을 이뤄드리고 싶지요? 그러나 기도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잠으로 기도할 시간을 채운 베드로는 그 상황과 현장 속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작은 계집아이의 말 앞에 굳게 맹세한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위기를 극복할 지혜도 능력도 사랑도 다 놓쳐버리고 시험과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 발로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감 안 나시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일,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십니까. 기도로 준비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시험으로 남게 됩니다. 상처로 남게 됩니다. 좌절로 남게 됩니다. 기도로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아름답고 존귀한 모습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10명의 처녀, 그 중 5명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나머지 5 처녀는 기름을 구하러 갔습니다. 갔다 오니 잔칫문은 이미 닫혔습니다. 노아 홍수를 보십시오. 120년 동안이나 배를 지으며 사람들을 초청했지만 그들은 콧방귀만 뀌었습니다. 비가 오고 홍수가 나서 방주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방주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에서 8절을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 할 때가 있느니라”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16장 19절을 보면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얼마나 하십니까? 지혜로운 선택, 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이 이 땅에 나 보내신 목적을 이뤄드리는 선택을 얼마나 하고 계신지 묻고 계십니다. 선한 일에 지혜로우라 말씀하십니다. 악한 일에 미련하라 이야기합니다. 정작 우리는 악한 일에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에베소서 5장 15절과 16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지혜 있는 사람의 특징을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지혜를 가지고 자기의 시간, 때를 적절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깨닫고 이에 자신을 맞춰서 살아갑니다.
언제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었습니까.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올 한해만 해도 나와 비슷한 연령에 있는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먼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를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살려주신 하나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선 자매가 53%의 화상을 입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자기보다 훨씬 덜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왜 절 살려주십니까?”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이 땅에 왜 하나님 나를 남겨두셨습니까. 또 한 해를 선물로 주시려고 하시는 주님, 내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왜 주님은 2004년에도 나를 살려두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가 주님 앞에 올려드릴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장년층 실업자도 문제지만 청년실업이 더 큰 문제입니다. 꿈을 안고 출발해야 할 청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곳이 없습니다. 얼마 전 대학을 졸업한 한 자매가 미화원에 지원해서 16.5대 1의 경쟁률로 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첫 사회 진출부터 꺾이면 인생을 바라보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것은 측정되지 않는 엄청난 손실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보십시오. 제조기업들이 중국으로 계속 이전하고 있습니다. 경제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잡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이용하면 우리나라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싸움에서도 이미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사랑하되 지혜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저들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끌어안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한반도가 공산주의로 통일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 말씀으로 주님이 다스리는 의와 희락과 평강의 나라가 될 때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나라든 간에 그 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고 믿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정말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싸움이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있는 계층과 없는 계층의 간격이 더 벌어질 것입니다. 북한은 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랑하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두고 양보하지 않으며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양쪽이 다 망해야 정신을 차릴 것만 같습니다. 물리적인 벽에 부딪히기 전에 돌이킬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노동자도 고용주도 양극단으로 대치합니다. 요즘 자기 주장 굽히는 사람 있습니까. 자기 보기에 좋고 옳으면 기본적인 틀도 뒤바꿔 몰아붙이려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바른 질서와 순종의 길로 가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청소년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양로원 갈 때쯤 양로원에 쌀을 지원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세대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서 이 민족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들 속에 무엇이 보입니까. 음란물 앞에 무너지는 동심, 돈 앞에 정조를 파는 여중생,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양심을 잃고 쾌락을 쫓아 오늘도 생각하기 싫어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편하게 살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은 수많은 욕구, 바로 병든 어른의 모습을 찾기가 훨씬 더 쉽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민족의 절망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해야만 될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희망을 다시 노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주님께 이 문제를 안고 기도할 때 제 손을 붙들고 겟세마네로 이끄시는 주님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지난 한 주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당파도 많습니다. 이웃 나라에게 수없이 침략당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찢어지고 잉크 묻어 읽을 수 없는 역사, 아픔의 역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어떻게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지 멸망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까요.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 민족을 부여잡고 겟세마네로 가는 젊은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내 인생의 미래를 안고, 깨진 내 가정의 아픔을 안고, 부숴진 이 사회의 갈등과 다툼과 상처를 안고 나아가시지 않겠습니까. 겟세마네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이끄심 앞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고 그 자리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주님, 오늘 또다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고민하십니다. ‘나와 함께 겟세마네로 가자.’ 예수님이 가장 힘들고 절망하며 앞날을 알 수 없던 그 순간에 계시던 자리,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 함께 가자 초청하십니다. 주님의 초청 앞에 함께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김영목 목사 / 코너스톤 교회
본문 속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감람산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감람산’이라는 단어를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올리브산’ 입니다. 올리브 열매가 많이 자라나는 곳이었죠. 올리브 열매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내던 곳이 바로 ‘겟세마네’ 입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기름을 짜내는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이곳 겟세마네 동산에 오셔서 여러 차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기도는 평상시와 달랐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드리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틀을 사용하여 올리브 열매를 짓눌러 기름을 짜내듯이, 예수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땅에 뚝뚝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전 먼저 열 두 제자를 겟세마네에 머물게 하시고, 그 중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을 데리고 따로 함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열두 제자 중에 바로 이 세 사람이 예수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Inner Circle Member 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심혈을 귀울이셔서 제자양육을 한 사람들인 셈이죠.
33절에 이 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두 가지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이 중 ‘심히 놀랐다”라는 이 단어는 마태복음 26장 37절에서는 ‘고민하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두시고 매우 큰 심적 고통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슬퍼하셨다는 것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될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근심에 빠지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께서 이처럼 연약해 보이는 장면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느끼셨던 예수님의 고민과 슬픔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 집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막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온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에게 커다란 고통과 번민을 가지고 올만큼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의 목요일 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제 곧 날이 밝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34절에 “심히 고민하여”라는 말은 어떤 중대한 결정 사항을 목전에 두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심각하게 갈등하는 마음의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 입니다. 거기에 슬픔과 고통의 감정까지 더해져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예수님꼐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 정도의 큰 고통과 근심의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센 파도를 잠재우고, 폭풍우를 멈추게 하신 분이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아주 본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인간처럼 연약하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계셨을까?”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계신 것이고, 이 문제를 이겨낼 힘과 능력이 없으셔서 심히 근심하고 계신 것이라면, 우리는 이런 연약한 메시아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십자가를 앞에 두고 크게 근심하고 계신 모습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근심하고 계시고 고통과 불안 속에 처해야 하셨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갖게 되는 물음의 해답은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 함께 히브리서 2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형제들과’ 즉 우리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시며 인간이 느끼는 불안, 근심, 고민, 염려,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인간이 겪는 고민이 란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너무 잘 아세요. 염려, 슬픔, 갈등, 아픔 예수님도 몸소 다 체험하셨어요.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의 아픔과 눈물을 보실 때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보시고 “제네들 힘들겠네… 내가 도와줘야겠다”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세요? 자비하세요… “아이고… 너가 느끼는 그 고통 내가 잘 알지… 너가 겪고 있는 그 갈등 내가 잘 안단다!” 주님은 연약한 인간이 겪는 죄의 저주를 알고 계세요. 히브리서 2장 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시험받고 고난 당하는 우리들을 가장 잘 도우실 수 있는 구원자가 되신다는 거에요.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앞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대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체휼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아픔이 마치 자기 아픔인 것처럼 느낀다는 거에요.
다운 증후군 자녀를 둔 어머니의 고충을 누가 가장 잘 이해할까요? 똑같이 다운 증후군을 가진 자녀를 둔 어머니가 알아요.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잃어본 부모의 마음을 누가 가장 잘 알아요? 똑같이 자녀를 사고로 잃어본 부모가 가장 잘 아는 거에요. 병원 암 환자센터에서 키모 치료 받고 있는 환자의 아픔과 고충을 누가 가장 알까요? 똑같이 암에 걸려 본 사람이 아는 거에요. 왜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33-34절에서 예수님은 근심하고 슬퍼하고 계시니까? 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고 번뇌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 지는 것이 두려워서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이겨낼 힘과 능력이 없으셔서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 일상의 현장에서 매 순간마다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과 눈물을 누구보다 가장 잘 이해하시는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우리가 겪는 그 모든 시험을 친히 통과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은 모르시잖아요! 예수님이 뭘 아세요!”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되요. “주님, 주님은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잖아요!”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는 거에요. 우리가 현재 아무리 괴로운 상황과 환경 때문에 고민한다고 한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의 고민보다 클까요? 예수님께서 느끼신 슬픔과 아픔보다 큰 슬픔일까요? 예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실 아픔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잘 아세요. 그래서 주님께 구하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자, 그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시험 당하시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 와서요. 마가복음 14장 36절을 한 번 보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놓여 계신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절망’입니다. ‘죽음’이에요. 이 보다 더 힘든 고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예수님에게는 선택권이 있으셨어요. “십자가가 얼마나 아프고 괴롭겠는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도록 도망갈까? 편하게 살다가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는 자유와 능력도 있으셨어요. 그러나 오늘 36절에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유익을 다 내려놓으신 기도 였어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잔’, 즉 ‘고통의 잔, 죽음의 잔,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어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 아니라면, 자신의 기도 대로 응답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과 시험의 때를 예수님은 이처럼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제자들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겠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한데 육신이 약하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유혹을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승리하셨고,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기도로 인도함을 받으셨습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과 시험의 때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훗날 상황이 다 지나고 났을 때, “그래 내가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이 사안을 놓고 간절히 기도 했었지!” 하고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상은 늘 분주하고 피곤합니다. 우리 중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치여 잠들어 있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무엇 때문에 염려하고 계십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근심하며 슬퍼하고 계십니까?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예수님께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겟세마네
박병은 목사 / 덴버둘로스장로교회
마가복음을 강해하는 가운데,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의 길을 따라가기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습니다. 그때 친히 제자들에게 사랑과 봉사 그리고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그들과 함께 새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후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신 후(요 17장)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주님은 감람산에서 특별히 겟세마네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Gethsemane, Gethsemani)"란 말은 아람어로 갓쉐마네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뜻은 ” 기름짜는 틀"이라고 합니다. 감람산 끝자락에 위치한 낮은 언덕입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기도로 준비하시기 위하여 이곳에 가셨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삼촌 외삼촌 라반을 떠나 온 가족과 재산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던 중 형에서가 군사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압복강가의 밤새 기도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피할 수없어 형에게 잡혀 죽게 된 상황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혼자서 고민하여 기도했다면(창세기 32장), 우리 주님은 피할 수없는 인류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죄인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기 위하여 기도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 창 32:22-24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겟세마네 동산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주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던 곳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누구나 잘 알고 있었던 곳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알고 있는 곳입니다.
*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 요 18:1-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주께서 이 동산에 가신 이유는 두 가지라고 Matthew Henry는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님은 자신의 사명 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교제(fellowship)을 가지시기를 원하였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요, 다음은 제자들과의 교제다. 그것은 기도로 연결된 교제였다.“
얼마든지 예수는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는 것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신 거룩한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할 수있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명하신 명령임을 깊이 마음 속에 품고 사역에 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제자들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따로 불러 특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 막 14:32-33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이렇게 세 제자를 따로 불러 당신의 기도에 동참시키시기를 원하신 것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 Matthew Henry,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준다. 제자들이 자신의 기도를 들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자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기도하는 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고 또한 그들에게 특별하게 지시할 것이 있을 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받을 피의 세례(bloody baptism)와 쓴 잔(bitter cup)을 마신 사실에 대한 증인들로 데리고 가신 것일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름짜는 틀”에서 기도하신 것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고통의 겟세마네
* 막 14:33-35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주께서는 세 제자만을 데리고 한 곳으로 가신 후 그 세 제자들과 마저 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때의 주님은 “심히 놀라고 슬픔에 잠겨있는” 상황이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심히 놀랐다”는 의미는 어떤 뜻일까요?
“ek tham beis thai”라는 이 단어는 "horror of great darkness, 엄청난 흑암의 공포"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사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마가복음에서만 사용된 특별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닥칠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는 이례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놀라움의 일종으로 고민과 흥분의 예측 불허의 심각한 정신 상태” 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마치 아브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처음 경험할 때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 창 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이때 아브람은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의 임재 가운데 임한 공포감을 느끼시고 몹시 두려워하며 고통과 슬픔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언어 주석학자인 Dr. Lightfoot은 이 단어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심히 놀라시며 두려움에 빠지신 것은 “아마도 이때 사탄은 예수가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온전히 소망을 두지 못하도록 위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 내 마음(영, Spirit)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는 영이 죽게 될 정도가 되었을까요? M. Henry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첫째,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를 지은 죄인이 되셨고, 둘째,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내 마음이 심히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법정에 서서 추상같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몸소 경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죽음을 언도하시는 하나님의 엄하신 형벌의 엄청남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에게는 죽음 자체가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퍼 부으시는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자신에게 그러한 심판이 주어짐에 대한 분노를 느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 자신이 거의 죽게 된 지경이라”고 하시며 자기의 제자들이 약간이라도 스승이 겪고 있는 이 심적 상황에 대한 느낌과 동정을 조금이라고 갖고 느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의 체험과 같은 것입니다.
* 욘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 고독의 겟세마네
* 막 14:37-41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물론 주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바 자기 목숨을 내어 죽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셔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셔야했지만,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얼마나 기도가 중요한 지를 깨닫습니다. 기도는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능력있는 영적 도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주님은 기도할 것을 강력하게 명하십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특권이요, 무기요, 권세입니다.
* 고후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하시고 주님은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에 몰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예수님의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 눅 22:40-44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를 다 마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십니다. 그때 세 제자들은 깊이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주님이 겪는 심적, 영적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의 위급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타깝게 그들을 깨우시며 격려하십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하시며 심각하게 고독을 경험하셨습니다.
John Calvin은 주석하기를 "제자들은 이 때, 자신들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는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도해야만 했다. 주님은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너희 자신스스로가 가다오는 심각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기도해야만 했었다.“라 설명했습니다.
성도여러분, 기도는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 전 저녁에 다락방에서 기도에 대하여 이 점을 강조하며 기도할 것을 그들에게 주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안타까운 실정을 잘 아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말씀하십니다.
*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에서,
여기서 마음이란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영은 원하는 데, 육신이 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감당하여야 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으로부터 이기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통곡의 겟세마네
* 눅 22:40-44 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주님께서는 세 제자들과 조금 떨어져서 무릎은 꿇고 땅에 엎드려 기도에 몰두하셨습니다. 이는 기도에 전적으로 몰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기도에서 피땀을 흘려가며 기도에 몰두하셨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히 5:7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4. 순종의 겟세마네
마지막으로 주님의 겟세마네는 순종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아바 아버지” 라고 하는 말은 ABBA 아람어로 My Father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결코 Father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Adonai"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하나님을 "father"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시는 중요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1. 간청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누가)”
그런데, 마가의 기록은 조금 더 자세합니다.
*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말은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처럼 보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 영역까지 침범하여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는 내가 꼭 이 길(방법)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해야만 합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하는 간청입니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Calvin이 말한 대로, 미리 작정으로 하고 준비된 기도(a premediated prayer)가 아니라, 즉흥적이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심각한 심적 부담 가운데 내 뱉은 기도로 보입니다. 그것은 이 간청을 한 다음에 주님께서는 예속하여 고집피우며 간청하지 않으시고 즉각 취소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순종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도 가끔씩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만이 행사하실 주권에 도전하는 듯한 발언으로 강력하게 기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출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잔(poterion)”이란 말은 무엇을 담는 그릇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 필할 수없는 이미 결정된 고통이나 심판(destined suffering and judgment)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이 표현에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죽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M. Henry가 추론한 바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 의심의 너머에 있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따라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다. 주님은 그 길이 반드시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고 순종하셨다.”
2. 순종의 기도
두 번째의 기도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즉각 자신을 하나님 뜻에 완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정에 기꺼이 서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드리시겠다는 헌신과 충성과 순종의 기도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겟세마네는 어떤 장소입니까?
형을 만나러 가는 야곱과 같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씨름과 같이,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매어 달리며 순종을 고백하는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로 깨어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려는 자들에게 기도로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 모습을 묵상하시며 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었는 지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되지 말고 우리의 약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일어나 깨어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가 다음과 같이 때문입니다.
*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