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혁명의 시작은, 스코틀랜드와 벌인 주교전쟁(1639, 1640)에 의해 내란이 촉발되었는데 찰스 1세는 주교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640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찰스 1세 진영과 하원 사이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찰스 1세는 1642년 1월 4일 5명의 하원의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1월 10일 런던을 떠났고 양측 모두는 전쟁을 준비했다.
애초에 양 진영의 병력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각기 약 1만 3,000명 정도). 1645년 의회파가 신형군을 창설할 때까지는 왕당파가 기병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의회파가 재력면에서 왕당파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싸움의 최종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게 했다. 왕당파 지지세력은 주로 웨일스와 북부 및 서부 잉글랜드에 분포되어 있었던 반면, 의회파는 좀더 부유한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또한 런던과 대다수의 항구 및 해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청교도를 젠틀이라 하였고, 영국 브루조아지의 다른 이름이었다.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으로 도끼로 참수 당했다.
명예 혁명은 1688년에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역사적 사건. 의회가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을 메리 2세로 옹립한 사건이다. 하지만 메리 2세 본인의 역할은 크지 않았고, 그녀의 남편 네덜란드 공화국의 통치자 오라녜 공 빌럼이 의회와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윌리엄 3세로 즉위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명예혁명은 사건이 발생한 당대에 Revolution이라 불린 최초의 사례이다.
청교도 혁명 등 명예혁명 이전의 revolution들은 전부 사건이 발생했던 당대에는 반란, 전쟁, 내전 등으로 불리다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revolution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이뤄냈다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투도 있었고 사상자도 나왔다. 다른 전쟁에 비해 그 유혈이 적었을 뿐이다.
종종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연찮게 이전 정복자와 이름도 같다.
명예혁명의 발단은 이렇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후 국민들의 강력한 열망에 의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그 자리에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왕자가 찰스 2세로 즉위했는데, 그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로서 에스파냐 같은 가톨릭 국가와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주류였던 의회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명예혁명의 결과로 영국은 입헌군주국이 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프랑스 왕국에서 발발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전까지 지속되었던 혁명의 상징이 된 일련의 민란이다.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특별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 중 가장 뜻깊다고 간주된다.
내부적으로는 잇따라 즉위하는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제거했고 외부적으로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크게 미치게 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미국의 제1의 시민혁명이라고 불리는 독립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 또는 미국 독립 혁명, 미국 혁명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벌어진 대영제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전쟁이다.
전쟁의 결과 13개 식민지가 미국이라는 신생국으로 독립했다.
미국의 독립은 명예혁명,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근현대 민주주의 체제 성립의 뿌리가 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세계 최초의 근대적 민주 국가를 설립하게 된 사건이다.
미국 제2의 시민혁명 남북전쟁은 1860~61년 남부 주들의 연방탈퇴와 잇따른 무장 소요 및 노예제·무역·관세 및 주권에 관련된 문제들로 지역 간의 불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1840~50년대 북부 주들은 새로운 주가 될 서부 지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기를 바랐다.
남부 주들은 노예제 확장을 저지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발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 주들은 연방에서 탈퇴했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섬터 요새에 대해 남부연합 정부의 포가 발사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투 끝에 1865년 4월 26일 북부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면서 남북전쟁은 끝이 났다.
북부가 승리한 결과, 연방은 보존되었고 노예제가 폐지되었으며 해방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영국 청교도 혁명을 시작으로 미국 남북 전쟁으로 이어지는 서양의 시민 혁명은 브르주아지를 탄생 시켰으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확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흑인들에 대한 불평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짐 크로우 법은 1877년부터 1964년까지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두세와 문맹으로 철저히 제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