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7
5월14일[성 마티아 사도 축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Q-KteQ2X8A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봉담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공석이 된 사도 한 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필기시험이나 심층 면접, 자기소개서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생뚱맞게도 제비뽑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제비뽑기’, 요즘 들어 잘 사용하지 않기에 약간 생소한 단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추첨’입니다. 미리 정해 놓은 글자나 기호를 종이에 적어 놓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잡게 하여 승부, 차례 또는 경품 탈 사람 등을 가리는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스릴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사도를 뽑는 중요한 일을 두고 제비뽑기란 방법을 택한 것이 꽤 의아해보입니다. 사도의 발탁이란 이 중대한 일을 위해 저 같았으면 먼저 후보자들에 대한 엄밀한 사전 조사를 할 것입니다. 철저한 후보 검증작업을 거칠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조용히 물밑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비뽑기를 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추천을 통한 인선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투표를 통한 과반수 이상의 득표자를 뽑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란 중요한 인물을 뽑는데 제비뽑기는 너무나 안 어울리는 방법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더군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후 사도들의 생각은 이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상물’이 한층 빠졌습니다. 사도란 직책이 세속의 직책과는 철저하게 다른 봉사직이요 희생하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요, 철저하게도 하느님의 사람, 참 신앙인이 수행해야할 역할이 사도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특히 수제자 베드로의 배반 사건, 총무였던 유다의 배신과 죽음 앞에 사도들은 기가 완전히 한 풀 꺾였습니다. 자신들의 나약함,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함을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주 겸손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예수님 중심적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능력, 판단력을 과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 자신들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사도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층 겸손해지고, 한층 주님께 대한 신뢰심이 커진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변화가 유다 자리를 채우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는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사도단 결원의 보충이라는 이 중대한 결정을 저희가 내리지 않겠습니다. 저희가 뽑지 않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뽑아주십시오.”
그런 기도 끝에 사도들은 제비뽑기를 실시한 것입니다. 사도단 결원 보충을 위한 사도들의 제비뽑기,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사에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의도대로가 아니라 주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2)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의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오는 인간적이고 세상적 기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진정으로 참 기쁨을 느꼈던가 돌아봅니다. 즐기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에 몰입할 때의 기쁨도 컸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성취한 것에 대한 기쁨도 컸습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점이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데서 오는 기쁨, 좀 더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기쁨, 손톱만한 봉사지만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 사목적 헌신과 그 결과에 따른 보람에서 오는 기쁨...
결국 참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기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 영혼과 정신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쁨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란 표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그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기쁨 충만한 우리의 삶이랍니다.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들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솔로몬의 찬미가)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rv5cjlmNFA
++++++++++++++++++
<하느님은 뽑으실 때도 목숨을 거신다>
역사상,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성직자의 부조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내는 게 옳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데리고 다니실 때 세상 사람들이 가리옷 유다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당신 사도로 존중해 주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에 대한 가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 얘기는 잘 안 하지만, 저는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뽑아 놓았으면 임기 동안에는 그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성직자를 뽑아주시든, 우리가 정치인을 뽑던, 하느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던 그 선택에 관한 무게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그렇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뽑는 분이 아니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한 그는 아내가 남겨 놓고 간 하나뿐인 열 살을 갓 넘은 그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만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그의 여생을 유명한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떻게 재산을 처분할 것인가를 유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는 그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드려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경매에 부치라는 지시가 그 유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지방의 한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볼품없는 그림이 부쳐졌습니다. 그 그림은 인기가 없어 아무도 응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때 피츠제럴드의 유언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경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내 모든 소장품을 갖도록 해 주시오. 이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뽑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뽑기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뽑으실 때는 전 재산을 거십니다. 목숨을 거십니다. 사제들은 당신의 목숨인 성체성사를 주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뽑은 이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가리옷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면 어때야 할까요? 미국의 생물학자 레인(Glen Rein)은 어떤 식의 기도가 암세포의 성장을 가장 억제하는지 실험해보았습니다.
우선 다섯 개의 세균배양 접시(petri dish)에 각기 똑같은 수의 암세포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심리치료사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기도해보도록 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주세요.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어떤 기도가 효과가 있었을까요?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주세요. → 암세포들의 성장 속도가 39% 떨어졌다.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주세요. → 암세포들의 성장 속도가 21% 떨어졌다.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 2번처럼 성장 속도가 21% 떨어졌다.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 아무 효과가 없었다.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 아무 효과가 없었다.
저도 봉사자들을 뽑아놓고는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뽑는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창조했으면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다고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것이 뽑아 준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세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창조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 불능이라도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마치 자녀를 낳는 것과 같게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뽑으실 때 목숨을 거십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성가대 회식이 있어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오면서 놓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제님의 차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성당 집무실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에 없으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탁자 위에 안경을 놓았는데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싱크대에도 가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분의 안경을 쓰고 산보를 다녀온 후에 다시 찾아보니 안경이 소파 위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소파 위에 있는 안경을 차에서 찾으면, 회식 장소에서 찾으면, 집무실에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깜빡깜빡하는 것은 신호등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전을 되찾으면 여인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되찾으면 목자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니 예수님 말씀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읽었던 ‘어느 환자의 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계속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부와 명예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자연을 파괴하고 우리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향주삼덕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전하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사도로 선출된 마티아를 이야기하면서, ‘사도’가 어떤 사람이고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이를 요약하면 일단 사도는,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인’이 되기 위하여 요청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함께함’입니다. 함께하면서 보고 듣고 공유한 것이 있어야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서는 사도가 되려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이어야 함을 천명합니다.
독서는, 사도로서의 직무에 실패한 본보기로 유다를 제시합니다. 유다는 분명히 사도들과 함께 “이 직무를 받았”지만,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이 직무를 ‘내버립니다.’ “내버린 이 직무”를 대신 받으려고 제비를 뽑는데,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됩니다. 독서는 사도를 선발한 방식이 제비뽑기였다고 전하지만, 복음은 이러한 선택이 단순한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의지의 구현임을 분명히 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곧 마티아의 선발은 제비뽑기라는 단순하고 가벼운 듯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사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단호한 의지와 계획이 들어 있던 것입니다.
아무리 찰나의 우연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모든 면에서 섬세합니다. 제비뽑기로 뽑혔어도, 그 안에는 뽑힌 사람이나 뽑은 사람이 모두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할 거대한 하느님의 질서와 섭리가 들어 있던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도 직무, 신앙인들의 임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6-17)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 1,23-26)
1)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베드로 사도는 ‘사도 직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우리와 동행한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의 자격’을 뜻하고,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사도의 직무’를 뜻합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사도가 되려면 ‘동행’, 즉 ‘함께 함’이 중요하다고 그것만 강조한 것으로 보기가 쉬운데,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중요합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하더라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후보자 가운데 하나였던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이라는 사람도 분명히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적어도 마티아보다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도로 뽑히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을 믿었고 사랑했지만, 중간에 그 믿음과 사랑을 버렸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2)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제비뽑기’ 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상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가 교황 선출 때에 사용하는 ‘투표’ 라는 방식을 본다면, 이상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투표’ 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투표’ 라는 방식을 사용해도, 투표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비뽑기에도 성령의 인도가 작용한다고 믿는 것이 옳습니다.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일이라고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티아 가운데 한 사람을 사도로 뽑기 전에 공동체가 함께 ‘기도’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 기도는,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일은 주님께서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교황 선출 투표 때에도 ‘기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3) 열두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은 그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활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체험들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모든 신앙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믿음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즉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혼자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살게 되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참된 제자가 되는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는 이가 바로 부활의 증인이요, 참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말해줍니다. 곧 타인은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일깨워줍니다. ‘서로 사랑하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먼저’ 하신 사랑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이는 당신께서 이미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밝혀줍니다. ‘이미’ 우리가 사랑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이미’ 사랑을 먹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받은 이 사랑을 아는 만큼만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 우리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요한 15,13). ‘우리에게’ 벗이 되어주신 사랑입니다. 곧 우리의 사랑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우리의 벗이 되어 주신 바로 그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사랑이 되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사랑이 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사랑이 상대에게 사랑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해가 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형제에게 사랑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 하고 물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형제에게 벗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의 벗이 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머물러 있는 사람의 축복>
오늘 우리는 제자들의 자리를 재정비하면서 새 역사를 펼쳐가는 교회의 시작을 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모임에서 전혀 새로워진 제자들을 만납니다.
‘백스무 명가량’이 모인 자리에서 전혀 다른 꿈과 각오를 펼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참 의젓해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니까요. 예전의 졸렬하고 옹색하고 비열한 모습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제자와 부활을 목격했던 이후의 삶은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하느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움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점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믿습니다. 새 생각과 새 힘으로 살아가게 되는 새 삶을 꾸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로 새깁니다. 다시 모인 그들이 가장 처음 했던 일이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함께 기도 한 후에 제일 처음 행한 일이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니다. 그날 그 자리에 비어 있는 두 자리, 제일 중앙에 계시던 주님의 자리와 다른 한 사람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리입니다.
같이 뒹굴고 함께 살았던 한 사람의 자리가 허전했던 탓일까요? 그들이 행한 첫 사업은 동료의 빈자리를 메꾸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날 그 모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초대교회의 핵심멤버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티아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열두 제자 안에 선택되지 못했을 때에 엄청 서운했을 사람입니다. 또 한편 제자들의 꿀꿀한 모습들이 실망스러워서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운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제자들과 함께 내내 머물렀습니다. 오늘 동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기도를 들어주시며 마티아를 선택하신 하느님께서는 질긴 믿음만 있으면 그것이 곧 승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짚어 봅니다.
주어진 일에 만족하여 주어진 만큼 충실한 것이 그분을 향한 믿음의 자세이며 끝없는 희망의 모습이라는 당부라 생각해 봅니다. 그분께로부터 “종이 아니라 친구”로 지명되는 축복은 끝까지 그분 곁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깁니다.
마티아 사도, 그는 처음부터 지목받는 자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떠나지 않고 내내 그분 곁에 머무른 사람이었습니다.
열두제자에 뽑히지 못했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분 곁에 머무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일에 끝까지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제자입니다.
오늘 그분 곁에 머무름으로 믿음의 새 제자로 이름이 올랐던 마티아 사도처럼 더욱 새로워지는 축복이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그분 곁에 머무름으로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탐해 봅니다. 마티아를 통해 머무른 자의 축복을 일깨워주신 주님께 큰 찬미 올립니다.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
어떤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 그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임자와 늘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자기 능력보다는 전임자의 공석으로 인해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는 부정적인 시선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유다를 대신해 사도의 자리를 메우게 된 마티아에게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5,16)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커다란 위안과 더불어 마음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사도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로 사도들과 더불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부터 함께 동행했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 파스카의 여정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 부활의 증인인 사도로 뽑힌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사도들과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마티아를 사도로 뽑아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습니다.”(1,26) 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고 말씀하신 주님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마티아를 사도로 직접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서, 공생활 처음부터 주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 한 마티아가 제비로 뽑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참으로 크나큰 위로와 위안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 부인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뽑아 내세우심을 통해서 제자들은 불림과 뽑힘이 제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이며 호의라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다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 부르심과 같으면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표현처럼, 부르심의 외적인 면에서 같지만, 내적인 깨달음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사도들은 하느님의 일 보다 사람의 일을 중요시했으며, 이로 인한 부인과 배반을 통해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력함의 체험을 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로 하느님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거듭남의 여정을 통해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1, 26~29)라는 말씀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부름을 받고 선택받은 사람은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1코31)라는 사도 바로로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은 목적이란 바로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파견된 존재이시듯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되는 조건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2)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보다 우선하고, 모든 일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와 마티아의 차이는 바로 마티아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지만’(15,10) 유다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았음에 있었습니다. 벗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은 단지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입니다. 부르신 분도 주님이시고 부르심의 궁극적인 근거도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고 아버지 안에서 마침 되는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려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길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초대이며 부르심입니까?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달라는 주님의 이 당부가 그렇게도 부담스럽고 무리한 요구입니까?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가르침(=계명)을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자연스럽게 사랑의 기쁨이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굳이 우리를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당부하신 까닭은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 삶의 부활과 같고, 이 부활의 삶은 우리를 기쁨으로 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쁨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에 솟아나는 존재적인 기쁨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살아갈 때 기쁨은 자연스럽게 넘치고 또 넘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듭 부활의 생명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마치 저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주춧돌처럼 항구하게 굳건하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갑시다. 주님의 선택 받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받음이 기쁘지 아니합니까? 오늘 하루 이 기쁨을 만끽하고 기쁨을 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이 통설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세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할 뿐)의 신경세포만 그렇다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신경세포 증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꾸준한 학습으로 뇌를 자극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우위를 가질수록 신경세포 증식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인 관계에서 우위를 가지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세포 증식력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 전혀 없는 삶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해마의 신경세포가 활발해집니다.
자기 뇌 건강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신경 쓰고 굽실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나’가 아닌, 고유한 ‘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존재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나를, 계속 성장하는 나를, 지금을 기쁘게 사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또 과대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또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나,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줄여나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두를 다 주어라>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3-25)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뽑은 사람을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구애 없이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셨고,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를 벗으로 삼으시고 친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그 전에 이미 바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를 하느님께 모두 내어 바치는 행위입니다. 진실하게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두를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하고 이웃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며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 벗>
요한 15,9-17 (나는 참포도나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여 벗>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니
벗이 되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니
벗이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니
벗이요
벗이니
벗이 되어가다
서로
사랑하여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旅程), 사랑의 사도(使徒)>
-기도와 섬김-
“다산, 어른의 하루;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인생 문장”에 따른 말씀이 참 유익합니다. 5월의 주제는 천륜지락(天倫之樂), “인연을 즐거워하라”라는 뜻인데 우리로 하면 하루하루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즐거이 순응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대로 성령에 따른 사랑의 삶이겠습니다. 분명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티아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의 삶이 사랑에 따른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즐거운 삶이었겠습니다. 이어 5월14일 오늘에 주는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은 당당함이 되어야지 방종함이 되어서는 안된다.”<다산>
“어른은 스스로를 바르게 함으로써 만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맹자>
역시 기막히게 좋은 말씀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는 오늘의 현실에 어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어른이야 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야 말로 어른중의 어른입니다. 날마다 만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금과옥조의 교훈이 됩니다. 어느 카톨릭 분파 지도자에게 주신 짧막한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치는 의무이다(Unity is a duty).”
“분파가 되지 마라(Don’t become a sect).”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교육기관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지식은 포용적이 되어야 함(Knowledge must be inclusive)”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이태리 남부 해발 4170피트 산정상에 자리잡은 900년 전통의 수도승들을 만난 자리에서 수도승의 두 중요한 요소, “기도와 섬김(prayer and service)”과 연관하여, 수도승들에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선물(a gift to God)’이 되고, ‘하느님의 선물이 될 것을(to be a gift of God)” 촉구했습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람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매일 강론도 기도와 섬김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은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요약되며 평생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배웠을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사도만 제외하고 모든 사도가 기도와 사랑의 절정인 사랑의 순교로 생을 마감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마티아가 배반자 유다 자리에 사도로 선출되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선출 과정중에서 베드로 수제자의 리더십이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결같이, 항구히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정주했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이며, 사필귀정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이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마티아가 제비뽑기로 뽑혔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부활의 증인, 얼마나 영예로운 칭호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가 주어집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 종합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평생 배워도 부족한 예수님의 우리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되 제 좋을 대로의 내 중심의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이타적 아가페 사랑을 살라는 것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나누고 섬기는 사랑,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이런 아가페 사랑입니다.
부단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도가 있어 이런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부족한 우리 사랑인지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절정이 바로 사랑의 순교이겠고, 이미 살아서 사랑의 순교자되어 사는 이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우리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영예롭고 자랑스런 우리의 품위인지요! 주님께 뽑힌자로 주님의 친구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맺는 삶이 바로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라 연장되는 나날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지막 남은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 하나 뿐이겠습니다. 시간되시면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대헌장 1코린토 13장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남을,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부단한 사랑의 실천과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도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사랑의 사도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다시 한 번 평생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족을 메꾸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유다 이스카리옷 자리를 꼭 메꿔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하는가? 빈자리로 남겨두면 안 되는가?
이런 생각을 저는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요즘 제 주변에서 곧 수도원이나 재속 프란치스코회나 이사회 등에서 자리가 비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입니다.
불가피한 이유로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그가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만두게 된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고 이 경우, 우리는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데 오늘 마티아 사도의 선출처럼 합의가 아니라 기도로 선출하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뽑으시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아서, 또는 서로 맘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인간들이니 그럴 수 있고, 맞지 않는 자체를 그리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맞추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맞추지 않으려는 것이 더 문제이겠지요.
왜 맞추지 못할까? 왜 맞추지 않을까?
너에게 맞추기 싫기 때문이겠지요. 나에게 맞추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맞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특히 하느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맞추는 것은 싫습니다. 내게 맞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고 강요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그것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하느님 사랑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고, 역시 초대교회 사도들 공동체처럼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혼자서는 누구나 부족합니다.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부족을 들추는 공동체이거나 부족을 메꾸는 공동체이거나이고, 잘못을 비판하는 공동체이거나 혼자서는 잘못하는 것을 같이함으로써 잘 해내는 공동체이거나입니다.
부족을 탓하지 않고 보완하고, 서로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는. 그런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이루는 초대교회 사도 공동체이고, 오늘 우리가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8)
<예수님의 친구가 되자>
오늘 복음(요한15,9-17)은 '사랑의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만 해도 엄청난 은총이요 사랑인데, 더 나아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친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인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대등한 관계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내려진 엄청난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친구로 다가오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친구가 되는 조건도 제시하십니다. 그 조건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2-14)
'예수님의 친구가 됩시다!'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던 '성 마티아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랐던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기고, 죄책감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 이스가리옷이 내버린 직무를 넘겨받은 사도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예수님께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로 뽑으셨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친구 사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시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 다가가려고 하는 사이입니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예수님의 친구가 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rUv2B5tVUc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 16)
사랑으로
시작하시고
사랑으로
완성하십니다.
뽑아
세우시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고유한
몫입니다.
우리의
오만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분수를
알게되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뽑아 세우시는
주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 극진한
사랑은
무리하게
목적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뽑아주신 분과
함께하는 여정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부족한 삶으로
여기까지
걸어온 것 또한
뽑아주신 주님의
넘치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뽑았다는
착각을
무너뜨려야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착각을 멈추고
주님을 따릅니다.
지나온
수많은
시간이
은총입니다.
생명을
떼어주시는
고귀한 사랑이며
고귀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한
날들은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풍요로운 열매도
풍요로운 기쁨도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마티오 사도를
통해 드러난
위대하신 사랑을
믿고 믿습니다.
참된 사랑은
뽑힌 사람과
뽑아주신
주님 모두를
충만하게 합니다.
충만한
오늘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