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상 앞이다. 모종판들이 인도를 반이나 점령했다. 원고지 칸칸에 쓰인 글자들처럼 포트 안에 서 있다. 저잣거리에 불려 나오느라 물을 흠씬 맞았는지 앳잎 끝에 방울 물이 대롱대롱하다. 나는 눈으로 고추 모종을 고른다.
'안 매운 것은 저쪽이요' 순한 맛을 찾는 내게 주인아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다가섰다. 이쪽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 매운 건 없을까. 색이 짙은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 뒷줄에 연두색들이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 있다. 나는 목을 쑥 빼서 눈을 맞춰 준다.
어느 게 순할까? 한참을 망설인다. 모종은 실해야 된다고 옆에 선 아저씨가 말해 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산골 냄새 풍기는 가늘한 것에게 끌렸다. 그 가녀린 허리를 외면하지 못해 두 판을 데리고 온다.
마음은 벌써 고추를 딴다. 고춧대에 고추가 주렁주렁하다. '초보 농사꾼이 어찌 이리 잘 키웠노.' 이웃 덕담에 한 봉지씩 선심 쓴다. 붉어지는 차례대로 고추들은 옥상에 자리를 잡는다. 투우사가 까실한 가을볕을 타고 쏜살같이 돌진해오다, 흠칫 놀라 한판 뒤적여만 놓고 간다. 투명해져 가는 고추는 붉은 돈주머니 같다. 잘 마른 것을 귀에 대고 흔들면 다글 다글 금화 소리가 난다. 깨끗이 손질한 때깔 좋은 마른 고추는 방앗간 기계에 곱게 갈려 미끄럼을 타고 내려온다. 빠알간 고춧가루에 갖은양념을 섞은 소를 준비해 두면 김장을 도우러 온 이웃들의 수다도 함께 버무린다. 서너 번 말갛게 헹군 절여진 배추에 붉은 옷을 입힌다. 노란 속살 고갱이에 붉은 양념을 바르고 생굴 두어 개 얹어 통깨 솔솔, 서로 간 본다며 입을 크게 벌린다. 구수한 햅쌀 뜸 들이는 소리에 수육 내음 보태지고, 배춧속 아삭거리는 소리에 군침이 돈다. 쭉쭉 찢어 밥숟가락에 척척 걸친다. 손가락을 쪽 핥는 소리에 멍한 정을 깬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미리 물을 주고 심어야 잘 산다고 했다. 주전자로 이랑에 물을 주었다. 비닐도 씌우고, 구멍을 낸 자리에 한 포기씩 심는다. 발에 싼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넣었다. 뿌리 짬에 부드러운 흙을 채우고 꾹꾹 눌러준다. 다 심어놓고 돌아본다. 처진 잎들이 새들하다. 모종들이 엉거주춤 차렷 한 시골 아이들처럼 유순하다. 그중 하나가 꼿꼿하게 고개를 든 모양새가 의심스러웠지만 그 속내는 알 수 없다.
며칠 안 가서 고추 모는 뿌리를 내렸다. 한결 생기가 돈다. 한낮의 햇살과, 이따금 목을 축여주는 소나기, 살랑 바람이 왔다가고, 밤이면 풀벌레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정강이, 옆구리, 가슴팍에다 저 마냥 대로 활개를 벌인다. 엇난 옆순을 따 준다. 여기저기 하얀 통꽃을 욕심껏 피워 올렸다.
더러 기도하는 마음이 따르지 못하는 때도 있다. 마른장마가 왔다. 꼬이는 벌레들에게 뜯겨 누런 눈물이 방울져 내리는 탄저에 몸살을 한다. 그러던 중 태풍이 왔다. 동이물을 쏟아부으며 바람갈퀴로 긁는다. 고추는 휘둘리며 땅을 붙들었으리라. 태풍이 지나간 뒤, 엎어진 지주와 상심한 고추들을 곧추세웠다. 비바람이 할퀸 생채기에 햇살이 어룽진다.
물고추가 내렸다. 여름 한낮 된장에 찍어 먹는 풋고추는 별미다. 고추 밭으로 갔다. 고추들이 이파리 뒤로 숨어 있다. 볼이 붉은 녀석은 슬그머니 밀어놓고 풋내 나는 고추 몇 개를 따왔다. 나는 물밥 한 입 후루룩 떠 넣고 풋고추를 아삭 베어 물었다. 땡벌 한 마리가 내 통각 세포를 톡 쏘았다. 순간 물이 번져 나왔다.
요즘 매운맛 열풍이 대세다. 마약 김밥, 매운 숯불 닭발, 얼큰이 불찜, 땡초 불꽃 치킨, 눈물 떡꼬지…. 매운 고추 먹기 대회도 있다. 최고 100만 스코빌을 가진 인도의 부트 불로키아는 잘못 먹으면 사망한다는 귀신 고추지만 그 레시피가 인기다. 이렇듯 입안에 불이 나 얼얼하고 코끝이 저릿하고, 등줄기에 땀이 나고 통증이 와도 멈출 수 없다. 위험함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라지만 아찔한 천연 마약 중독에 쾌감을 다들 즐기는 듯하다.
삶의 고비 고비에 매복한 땡초 맛을 피하기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약이 오르고 독해져 버리는 게 고추뿐이겠는가. 나도 그럴진대. 어쩌면 내 속이 타고 매울 때가 더러 있으니 입맛 만이라도 순한 것을 찾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활활 활개 치는 한낮, 개다리소반 위에는 텃밭 붉은 고추 여럿이 불려와 누웠다. 그사이 여름은 저만치 물러가고 있다.
(강미나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