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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T-4 프로그램, 대한민국의 요덕 수용소 전두환 정권의 인간유린 프로그램 2호[1] 1987년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인권유린 사건. 삼청교육대와 더불어 전두환 시절 인권유린 범죄의 쌍두마차. 전근대 시대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인권유린이 1980년대라는 현대시대에 일어난 잔혹한 사건이다.
1987년 3월 22일 부산광역시 북구(현재 사상구) 주례동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에서 직원들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길거리나 역에서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켰다. [2]
미성년자 유인 약취, 혹은 납치, 또는 폭행 납치 등 갖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에 저항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폭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저항을 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살해, 유기하였고, 순종적으로 만들어 일을 시키는 도중에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내 매일 구타를 가했다. 잡혀온 것이 10세 이하의 아동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젊거나 나이 어린 여성의 경우에는 구타 이외에도 성폭행이 더해졌으며 거의 모든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복지원 내부에 식료품 공장도 있었으나 거의 모두 외부로 판매되었고, 국가보조금에 더해 작업수당까지 모두 갈취되어 원장이었던 박인근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외부에 선전하기 위해 몇몇 적금통장이 만들어졌으나, 복지원에서 나가려면 도망치거나, 시체가 되어서 나가는 길 밖에 없었으므로 피해자들이 그 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피해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몸을 뉘일 허술한 공동숙소와 빈곤한 식사 뿐이었는데, 당연히 숙소 건설과 식사 준비 역시 모두 피해자들이 스스로 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질병 치료는 엄두도 낼 수 없으며, 지속되는 구타와 고된 작업으로 수많은 피해자들이 사망하였다.
이런 일이 무려 12년 동안 지속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원생수만 531명에 이르렀다. 여기다 일부 원생들의 시신은 인근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3백~5백만에 팔려나갔다! 수천명의 원생수 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 가족이 있고 멀쩡한 직장이 있는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밤늦게 퇴근하는 길에 잡혀가서는 4일만에 '폐렴 및 합병증'으로 사망해서 나오는 식이다. 몸에는 수많은 타박상을 남긴 채.
게다가 중요한 점은 이것은 한 개인의 부도덕 문제에 한정 지을 것이 아니라 부산시 공직 사회가 공조한 것이다. 소위 소대장이라 불리는 감독관 중 대장격인 왕소대장이라고 불렸던 이의 증언에 의하면 부산시, 부산시 사회복지과, 경찰 모두의 합작품이라고 말하였다. 암묵적으로 돈을 주고 받으면서 폭력, 비리에 방조하였고 납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원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원래 사는 곳을 알려주어도 찾아줄테니 경찰차를 타라고 말하고는 복지원으로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후에 수사가 이루어지자 당시 부산직할시장은 담당 검사에게 청탁 전화를 하고, 보사부장관에게 원장이 바로 석방되도록 건의하는가하면, 훗날 김영삼 정부 때 법제처장을 지낸 송종의 부산지검 차장검사는 수사 철수를 지시하였으며[3] 부산시 공직사회가 전체적으로 공모한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당시 부산시 의료 관계자들 역시 부검서류를 날조하거나 사망원인을 고의로 날조하는 등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병리과 의사[4]가 아닌 산부인과 의사가 피해자 시신의 부검을 맡는 등 의료행정 역시 개판이었다. 현실에 나타난 인외마경, 피해자들이 같은 부산시민인데도 그 사회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감자들은 같은 사람으로 봤는 지도 모르겠지만...
박인근은 직업군인 출신으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4.19 혁명 당시 육군모부대 특무상사로 근무했다고 한다.[5] 1960년 형제복지원의 전신인 형제육아원(1971년부터는 형제원, 1979년에는 형제복지원으로 각각 변경)을 설립/운영하며 매년 20억 원에 달하는 국고를 지원받아[6] 횡령, 착복하여 고급 아파트나 콘도, 골프 회원권을 샀다. 또한 자신의 땅[7]에 목장과 운전 교습소를 세운다며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시키며 하루 10시간씩 강제 중노동을 시켰다. 이쯤 되면 북한이랑 다를 게 없다 --조직폭력배 보스나 다름없는 인간말종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주임검사로 있었던, 이 사건을 다룬 '브레이크 없는 벤츠'의 저자로 유명한 김용원 현 법무법인 한별 대표 변호사가 포수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복지원의 참상과 비리를 목격한다.
결국 원장 박인근을 비롯해 총무 김돈영, 사무장 주영운, 목장파견대장 성태은, 목장파견대 소대장 임채흠 등 5명이 각각 횡령, 특수감금죄와 외화관리법[8], 초지법[9], 건축법위반[10] 혐의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정작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빨리 덮어버리고 싶어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이 일어난 1987년 3월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시민단체의 활동이 싹트려고 했었던 만큼,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일어날수록 반정부성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것이 자명해지며, 이러한 성향은 현 정권에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외압을 넣어 검찰은 박인근에 대해 고작 징역 15년형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그외 나머지에게는 각각 3~7년형밖에 구형하지 못하였고, 이조차 줄어들어 1987년 6월 23일 법원은 1심에서 박인근에게 대해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원을 선고하는데 그쳤으며[11], 이후 항소심 재판을 거치며 1989년 3월 15일의 3차 항소심에서는 벌금 없이 징역 2년 6개월형이 확정[12]되었고,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형량은 더 줄어들어 박인근은 이후 겨우 2년이 지난 1989년 7월 20일 출소하였다. 6억여 원의 벌금 역시 재판을 거치면서 감경되어 결국 없어졌다. 심지어 폭행, 살인, 시신유기, 시신암거래 등은 기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박인근에 대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전두환이 형제복지원의 박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내린 말이다. 이 평가 한 마디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뒷배를 책임진 권력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형제복지원이 세워진 배경부터가 4공의 절정기인 1975년에 발효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태우를 제외한 군사정권 전반에 배경이 있다.
부랑인 수용소의 인권 침해 문제가 시민단체의 화두로 등장하였으며 정부에서는 부랑인 시설 운영 개선을 위해 입·퇴소절차 개선, 수용보호의 전문성 확보 및 직업보도 강화 등 복지서비스 제고 및 시설운영의 내실화에 관한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규정(1987.4.6)을 제정(보건사회부 훈령 제523호)하였다.
형제복지원 건물은 이 사건 이후 대부분 폐쇄되고 일부만 재육원으로 활용되다가 결국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기사 단지 공사중 약 40~50여구 유골이 쏟아졌지만 죄다 무연고 처리후 납골시설들에 안치시키고 말았다. 사건이 알려진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400여구의 시신은 찾지도 못한 상태이다.
또한 부산직할시공원묘지관리소(현 영락공원 사업단) 매장처리부에 기재된 무연고 시신 현황 자료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사회문제화되고 이사장이 구속된 1987년 이후에도 2년간이나 30여 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모두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
이 사건의 피해자 중 상당수는 아직도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사건 이후 일부 원생들은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해방 이후 재사회화 역시 엉망으로 진행되어서 가족 단위로 끌려온 피해자는 풀려난 뒤 이후 같이 풀려난 이후로 행방을 알 수 없었던 나머지 가족의 행적을 정신병원에서야 찾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이후, 한동안 잊혀졌던 이 사건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세상에 알린다.
인권단체를 비롯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을 2012년,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씨와 언론학자 전규찬 교수가 글과 그림으로 사건을 기록 증언하고, 인권운동가 박래군과 공동저술하여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책을 통해, 1987년 잊혀졌던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
▲ 2012년 37세로 성장한 한종선 씨가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국제신문) # ▲ 한종선,전규찬,박래군 공저 <살아남은 아이> (2012,문주출판사/2013,이리(도서출판 리젬)
▲ 강제수용 되었을 당시(1984년)의 9살의 나이의 한종선씨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2013년 3월 6일 뉴스타파M 1회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인 한종선씨 및 그 가족을 인터뷰하였는데, 한종선씨는 9살 때 누나랑 거리에서 강제 납치되어 입소했고 그 다음에는 아버지까지도 강제 입소되어서 재회했었다고 한다. 본인을 포함하여 아버지, 누나까지 일가족이 모두 형제복지원의 피해자인 이 가족의 증언을 통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당시의 처참한 경험을 언론 기사에서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
2013년 11월 3일, 시사매거진 2580 165회에서도 다루었으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2014년 3월 22일(#932)에 '홀로코스트, 그리고 27년 - 형제복지원의 진실',이란 부제로 방영하며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2014 신안 염전노예 사건 사건과 더불어 조명받게 되었다.[13] 이후에도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977)에 1년 이후 상황을 취재한 편이 방영되었다.(#)
박인근은 이 사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시설운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도 이를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뜻밖의 변을 당했다" 며 개소리를 했다. 여기에 자신도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국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였다는 행세를 하는 것도 모자라 김용원에 대해 자신을 형제복지원을 통해 불쌍한 원생들을 노예처럼 강제 노역시키는 것처럼 묘사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반성은 없고 당시의 부를 그리워하는
“형제복지원을 운영 하면서 가족 전체가 부랑인들과 시설에서 함께 고생하며 살아 왔는데 모략과 중상, 시기와 질투로 의욕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기도…”
“전적으로 경찰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입소, 퇴소 절차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운영 등 모략과 중상을 받아 왔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감금당했고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었으며 강제노역과 비인간적인 대우로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의 버거움에 비틀거리고 있다. 그 때의 사건은 자신을 부정하는 기제로 작동했고 일상은 가난과 불안을 오가며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인근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아니 오히려 거짓으로 왜곡하며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이용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폐쇄 사건을 일부 언론과 사건 담당 검사의 중상과 모략으로 치부하고 있고 사비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과 봉사, 사랑으로 수용자들을 보살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금고 안에서 외화, 엔화가 쏟아질 정도로 가득했고, 33개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콘도회원권, 골프회원권이 발견되었지만, 모든 사실을 부정하며 지금껏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박인근은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83년도 완공된 형제복지원 수용소 사진을 <실로암의 집> 1층 거실에, 수용자들을 착취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사진을 2층 거실에 버젓이 걸어 놓은 걸 보면 반성은커녕 폭력으로 획득한 권력과 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
출소한 박인근은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형제복지원을 되찾고 이름을 바꿔가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형제복지원을 재육원(1988년)→욥의 마을(1991년)→형제복지지원재단(2001년)→느헤미야(2014년) 등으로 법인명 세탁하여 그대로 유지한다. 박씨 일당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만 밝혀진 바에 따르면 1000억원 대 법인을 유지 중으로, 몇 개나 되는 사우나, 헬스클럽, 찜질방 등이 입주한 고층 건물[14]을 인수하고 여러 사업을 운영중이다. 게다가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셋째 아들 박천광은 "실로암의 집"[15]을 운영중이다. 부산광역시로부터 지속적인 지원마저 받으며 여전히 재산과 재단을 불리고 끊임없이 위세를 이어오는 이들을 가리켜 언론에선 일명 "복지 재벌" 이라 일컬었다. 박씨 일가는 또한 4・5공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공권력이나 개신교계와의 유착이 매우 끈끈하여 허가 없이 실로암의 집 복지원 내부에 무허가 교회를 세워서 운영해 왔고 관련 공무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공무원들은 부산시의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경징계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징계 취소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에만 재산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977(2015-03-21)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솜방망이 처벌이 끝난지 좀 지난뒤 돌연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가서 한 대형 골프장을 인수하더니 그의 처가와 사위에게 운영을 위임시키고 거기에서 스탭으로 고용했던 소수의 인원[16]조차 형제복지원 원생 부리듯 부린것이 당시 스탭이었던 지금은 한 쪽방촌에 사는 노인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처가 및 사위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자체가 어찌보면 한국에서의 일부 자산세탁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셈인듯 하다.
2014년 4월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14년 5월 박천광은 시 보조금 횡령죄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박인근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3년 구형만 받았을 뿐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 검찰은 또한 재단과 유착한 공무원들을 기소할 방침이라고 전했고, 경남ㆍ부산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이름을 떨치는 박인근 일당의 이같은 복지 사업의 운용자금은 2014년 5월 시사 저널이 조사한 결과 99%가 국고지원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시는 "실로암의 집"을 법인 청산하려 한다 했지만 수십억대 금액을 지속적으로 차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7.07 06:47
첫댓글 똥부산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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