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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윤성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조금 전, 바람이 불때마다 덜컹덜컹 요란하게 소리 내던 낡은 창문 틀을 제 손으로 고쳐놓은 것이 뿌뜻하기만 하다.
처음 이 집에 왔었던 그 때, 그는 주인이 나간 뒤 혼자 남겨졌던 거실 소파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보며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고요함에 젖어들었다. 프릴이 달린 빛 바랜 꽃 무늬 커튼과 이가 맞지않아 조그만 바람에도 덜컹거리던 창문, 그리고 고요함, 윤성은 그 고요함 속에서 어린 시절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집을 지키던 가난하지만 행복했었던 그 때를 떠올렸었다. 지난밤, 비 바람에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던 그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연장통을 찾아 들었다. 영 못 미더워하며 그냥 사람을 부르는 게 어떻겠냐는 시연의 말을 깨끗이 무시하고 윤성은 솜씨 좋게 창틀을 고쳐놓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시연의 표정을 은근 기대하며 만져보지않아도 한 눈에 고장났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느슨하게 빠져있는 문고리들을 보며 윤성은 중얼거렸다.
"내친 김에 문고리도 갈아끼워야겠군."
"형! 왜 그래?"
"응? 내가 뭘?"
"왜 혼자 비실비실 웃으면서 중얼거려?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글쎄.......훗!!"
윤호의 물음에 피식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세월 저편에 꼬깃꼬깃 접혀져있었던 기분 좋은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집에 오면서부터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갈라진 틈 사이를 비집고 나와 순간순간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이 삐져나온다.
윤성은 소파에 누운 채로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거실 한 가운데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소파가 자리잡고 있다. 본디 흰색이었을 카페트는 색이 바래 소파와 같은 아이보리색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흰색 창틀과는 꽤 잘 어울린다. 그나마 최근에 손을 본 거실 샤시창이 이 낡은 집에서 유일하게 새것인듯 하다.
차곡차곡 개어진 옷들로 가득한 소박한 서랍장과 문갑, 그리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진 경대, 그는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쓰시던 가구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이 주인 아가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여기 있으면 왠지 이상한 나라에 엘리스가 된 기분이 들어."
"뭔 소리야?"
처음부터 대답 할 생각이 없었던 윤성은 지금 자신과 시연이 쓰고 있는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한 핑크색 리본이 달린 이불이 깨끗하게 깔린 침대, 이불과 세트를 맞춘듯한 커텐, 누가봐도 한 눈에 여학생의 방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 곳에서 눈을 뜰 때면 소꼽 놀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잠들어있는 시연을 보며 처음 주인없는 방을 몰래 훔쳐봤을때 느꼈던 그 느낌처럼 설레였다. 시연을 꼭 닮은 딸이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던 윤성의 눈에 민법, 상법, 행정법, 생각만 해도 머리가 무거워지는 두툼한 책들과 책장 곳곳에 붙여놓은 메모들이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시연이 아직 법대생이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형도 다시 법 공부해보지 그래?"
윤호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 했다. 빽빽히 적힌 메모와 함께 공부한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책을 보고 있던 윤성은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들에 파묻혀 뒤돌아 볼 사이도 없이 보낸 대학 시절, 오로지 한가지 목표 밖에 없었기에 그에게 캠퍼스의 낭만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공부를 다시 하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근데 너무하는 거 아냐? 내 나이가 몇인데 지금 이런걸 봐야하냐구!"
입이 댓발은 나온 윤호가 펼쳐진 책을 '탁'하고 소리나게 덮어버린다. 간만에 추억에 젖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윤성은 무모한 반항을 시도하고 있는 윤호를 보며 쯧쯧쯧 혀를 찼다. 별 소득도 없으면서 간간히 저렇게 소심하게 반항하는 걸 보면 정말 공부가 하기 싫은 모양이다. 하긴 요즘 고등학교 수학문제가 왜 그렇게 어려운건지, 자신이 학교 다닐땐 안 그랬던거 같은데, 역사는 또 뭐가 이렇게 복잡해진건지, 자신때는 요점 정리만 잘해도 그냥 점수를 땄는데 말이다.
"안녕........자기 혼자 심심했지?"
"시연아, 언제 왔어? 나 창틀 고쳐 놓은 거 봤어?"
"정말? 자기가 고쳤어?"
"그럼! 좀 있다 문고리도 새로 달거야."
"와~ 멋있다."
언제 온 것인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감싸는 시연을 보며 윤성이 어린애처럼 자랑을 늘어놓았다. 윤성의 자랑질에 시연은 연신 장단을 맞추고 있다. 형이 어쩌다 저렇게 된거지? 또 시연은 언제 저렇게 된 걸까? 두 사람의 닭살 행각을 보며 몸서리치던 윤호는 문득 뒷통수가 서늘해져오는게 느껴졌다.
"책...... 덮었네?"
"히익!!!"
아니나 다를까 윤호의 귀가에서 냉기를 폴폴 풍기는 희진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호는 빛보다 빠르게 책을 펼치고 책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와........왔어?"
"요즘 욕이 고팠지?"
"아니........ 근데 나 이거 꼭 해야 돼? 요즘은 학벌 같은거 필요없어. 돈만 잘 벌면......"
진땀을 흘려가며 희진을 설득하려는 윤호의 모습에 시연과 윤성은 웃음을 눌러야 했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매번 걸고 있는 윤호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씨도 안 먹히는 희진이다.
"남자가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할거 아냐!!"
"여지껏 그런거 없이도 잘만 살았어! 졸업장만 없다뿐이지 배울만큼 배웠고, 또 돈도 잘 벌잖아. 내가 지금 이 나이에 검정고시가 왠 말이냐구. 안그래 형?"
동의를 구하는 윤호의 눈를 윤성은 슬그머니 피해버린다. 윤호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희진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럼 학교를 다녀서 졸업장을 따든가! 그리고 그런거 일일이 형한테 묻지마. 자기가 세살먹은 얘야!"
"그래도......형도 무졸이야! 근데 시연인 아무소리 안하잖아."
"나는 양반이라서 그래."
윤호의 반박에 시연이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윤성을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성을 보며 희진은 질린듯한 표정을 지으며 투털댔다.
"그래, 나는 쌍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장이 꼭 필요해. 그러니깐 아무소리말고 졸업장 따! 그리고 자꾸 큰 아저씨랑 비교하는데, 큰 아저씨는 그래도 검사였잖아."
"그건 이 윤성일때고, 지금은 백 성현이잖아!! 백 성현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다구!!"
윤호의 항변을 듣고 있던 윤성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이 윤호, 백 성현 얼마 전에 고등학교 졸업장 땄다."
"형!!! 언제.........어우~ 배신자! 하긴 형사들이랑 짜고 1년간 숨어있을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잊었어? 이 윤성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거. 덕분에 목숨을 건졌잖아. 비록 검사 이 윤성이 아닌 백수건달 백 성현이 됐지만, 그래도 은혜는 못 갚을 망정 그런 사소한 일로 형사님들을 원망하면 안되지."
"하긴 형사님들이 그 때 형을 빼돌린 덕분에 살았지. 근데 생각해보니깐 싸부님도 너무하네. 적어도 나한테는 형이 거기 있다고 귀뜸 해줬어야 하는거 아냐?"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은 오래 지킬 수 있는 법이지. 괜히 긁어 부스름 만들지 말고 하던거나 마저 하시지. 이 윤호!"
윤성의 말에 희진은 그것보라며 턱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의 반항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윤호가 투덜거리며 책을 폈다.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희진이 슬며시 곁에 앉았다. 잠시후, 희진은 슬쩍 윤호의 어깨에 기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다인이라는 애가 찾아왔었어."
"응? 다인이가?"
윤호는 희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놀랐다. 윤성은 고집스럽게 책에서 눈을 떼지않고 있는 시연을 보며 희진을 쳐다보았다.
"처음 볼때부터 싸가지더라니, 끝까지 재수 없더라."
"걔가 왜 널 찾아와?"
"입 다물어달라고!"
"응?"
윤성과 윤호는 이내 그 말 뜻을 알아들었다. 조 규현은 죽어가며 간절히 다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비밀이 국회의원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봐 입 단속을 하기위해 시연과 희진을 찾아온 것이다.
"참 서글프더라. 죽은 그 아저씨 너무 안됐어."
"자업자득이야."
"알아, 그 나물에 그 밥이겠지."
"뭐랬어?"
"관심없어. 죽은 아저씨만 불쌍하지. 걔 엄마도 같은 족속이니깐 멀쩡한 친 아버지를 옆에 두고 국회의원 딸로 만든거겠지. 안 그래?"
희진의 푸념을 듣고 있던 윤성과 윤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생모를 죽이면서까지 제 핏줄에 집착하던 아버지와 자식을 두고 저울질하던 어머니를 가진 그들로써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희진의 말이 그저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윤성이 죽은 줄 아는 이 태성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고, 남 지현은 희진의 집으로 들어간 윤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시연은 살포시 윤성을 껴안아주었다. 희진 역시 윤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아~ 배 고파! 오늘 저녁은 뭐야?"
무거워진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듯 식탁으로 온 윤성이 밥상보를 벗기자 두서너가지의 반찬들이 모습을 들어냈다. 멸치볶음에 두부조림, 김치와 달걀 말이, 정갈하게 찬기에 담겨 얌전히 놓여있는 모양새가 오래 전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 같다. 가스렌지를 보니 김치찌개가 들어있는 냄비가 올려져있다. 잘 끓여진 김치찌개를 보자 윤성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메뉴는 김치찌게 되겠습니다!"
"또? 맨날 김치야! 형, 우리 고기 좀 먹자. 그만큼 돈을 벌어다 줬으면 적어도 고기 정도는 먹여줘야하는거 아냐? 어떻게 된게 맨날 김치야."
"그 돈 벌어 희진이 다 줬으니깐 고기는 희진이가 사는 걸로."
"야! 박 시연. 뭔 그런 벼락 맞을 소릴.......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이 윤성......아니, 백 성현씨가 사는 건 어떨까하는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만?"
고기 값을 서로 미루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희진과 시연을 보며 윤성도 윤호도 조금 전 잠시 무거워졌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윤호야, 어떻게 된 게 저 여인들은 남의 살을 저렇게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나도 남의 살들이 좋더라~"
윤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윤성은 어쩔수 없다는 듯 웃고 만다.
"실은 나도 남의 살이 좋아."
- 끝 -
첫댓글 이렇게 해피엔딩을 맞게 돼어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형사분들 좋은 분들이었네!!!ㅋㅋㅋ 작가님 충분한 휴식 취하고 또 좋은 작품 많이 올려주세요!!!
2초동안님! 비루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번엔 좀더 알찬 작품으로 찾아뵐께요. 잊지말아주세요.^^
작가님 완결!! 추카드립니다~^*^넘~~ 수고하셧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내셔서 저도 행복합니다~ㅎ
형사님들이 정말 좋은 분들이셧어요~그래야지요~^^
다음 작품도 잔뜩기대하고 잇을께요~ 작가님~^*^
미루님!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잊지말고 기다려주신다는 말도 너무 감사하구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