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당시 광주에 대하여 시위현장에 없었으므로 나는 밸로 할말이 없다.
아니 숨도 크게안쉬고 카만이 있는게 중간이나 갈것같아서 말만나오면 아예 꼬랑지를 내리고 살아왔다.
경기도 연천군 어느 산꼴짝에서 나의 군생활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10.26 박통 시해사건,
신군부의 12.12사태,우리 26사단 76연대 산하 회천면 덕계리에 있었던 삼청교육대에서 못볼것을
넘마니 보고살았으니 무섭고 징한놈의 세월을 몸소부대끼면서 지내온터이라 내간뗑이가 검나탱탱 부서있었다.
내가 휴가 나올적엔 우리 아부지는 빽이 없어서 너를 물짜같은곳에 떨어지게해서
고상시킨다며 시상이 하도 어수선항께 으짜든지 몸성히 잘하고 오거라이 하셨다.
우리 아부지는 일본군 군속으로 2년동안 히로시마와 남양군도라는 곳으로 잽혀갔었고 울엄니한테
장개간후 누님을 낳고서야 6.25 동란에 참전해 제주도 훈련소를 거쳐 만6년을 거의 서무병으로 근무했단다.
우리 동네에서는 12명의 장정이 6.25전쟁에 끼께가서 9명은 전사하고 3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니
조상의 은덕인지 뭔지는 몰것지만 웬수같은 시대를 잘못타고난 정말 짠하고 불쌍한 잉간들이다.
12.12사태 이후 곧 북괴군이 남침할수도 있다는 관제언론들의 보도에 바짝쫄았고 상부의 지시데로
우리 부대는 비상식량과 전시에 준하는 실탄과 무기류등을 지급받아 이고지고 메달아서 완전무장한체
임꺽정이 놀았다던 감악산넘어 임진강가의 숨박꼴이라는 진지(참호)에 투입되었으며, 행정반 똥싸계(인사계님)는
각자의 유언장과 손톱,멀크락을 짱커서 봉다리에 넣어 제출하라면서 전사하믄 느그 부모님들에게 보낸닥하니
솔직히 내청춘이 이렇게 죽는게 아깝고 억울해서 마음이 서글퍼졌다.
보고싶은 내칭구들...석.순.심은 어찌하라고...싸나로 태어나 장가도 못가보고 몽달귀신으로 죽어불믄...
세상은 넓고 할일도 므쟈게 많은디~ㅋㅋㅋ
이름모를 어느 산골짜기 어둡고 칙칙한 이땅굴속에서 매락없이 죽어야 한다니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분했다.
심들고 귀찮고 반복되는 훈련과 진지투입작전에 날밤까기 행군등으로 올빼미 타겍능가
잠도 안재우며 야간에만 이동하는것도 싫고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왕에 전쟁이 날것이라믄
이판사판 공사판으로 차라리 빨리 함붙어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보기도 하였다.
이래죽나 저래죽나~ 인생이 한번죽제~ 두번죽는냐고 마음 독하게 묵으니 싱간은 여간 편해졌다.
그란디,어느날부터 우리부대에서 굉기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뜬금없이 사제옷들을 준비하고 사회에서나 봄직했던 진압용 봉에다 총검으로 무장하고
밥만묵으면 두팬으로 갈라서 한쪽은 시위대 또한편은 진압군으로 임무를 나누어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에 돌입했었고 그와중에도 나는 언넘이 던진 짱돌에 뒷통수를 얻어맞아 피를 많이 흘리기도 하였다.
군용장갑차를 쫒아댕기며 도팍과 화염병을 땡기고 꺼부는 진압훈련은 반복되고 지리한 봄날은 계속 이어져만간다.
그사이 대학생들이 서울역앞까지 진출하고 시위가 절정에 이를무렵
우리부대는 서울에 소재하는 E여대로 투입될거라는 소문도 들리곤 했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주둔하는 우리 사단을 왜 하필이믄 시위현장에 내보낼까 하는 의문점도 들었지만
거시기로 밤송이 까라면 까야하는 군지휘특성상 바깥세상을 전혀 알지못하는 병사들은 멀건히 눈뜬 봉사들이였다.
그래도 중정없는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어디로 가든 꺼꾸로 메달아도 어차피 국방부시계는 돌아간다며~ ㅎㅎㅎ
벽돌과 화염병으로 중무장(?)한 억씬 머시메 대학생들이 많이 댕기는 핵교보다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비슷한
또래의 E여대로 진압을 나간다는게 한편으로는 내마음을 설레이게도 했었다.
나는 가끔 야외훈련중에 북쪽에서 날아온 삐라를 주어서 슬쩍 읽어보곤 했는데 대부분 아메다마 사탕과
삘간 능금등이 가득놓여있는 탁자앞에서 폼잡고 찍은 월북자들의 미소짓는 사진들이 올라있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지 독일의 ZDF,일본 아사히신문,영국의 BBC방송등의 기사을 인용하여
광주 금남로 시가지와 전남도청앞의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있는 사진까징 게재하여 삐라가 날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옳고 그름이란 판단이 잘서질 않았다...불순세력과 빨갱이들이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선동하여
국가전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소요사태로 거그는 이미 무정부상태라고만 높은 상관들은 말하곤했다.
먼일이 나긴 크게 났나보네~ 생각하면서도 이미 외출이나 휴가가 끊겨불었고 제대특명까지
질어진다는 소문에 병사들은 시위하는 대학생들에게 엄청미운 억한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놈시키들 군대에 들오기만 해봐라"~"칵 쥑에 분다고 난리들이다"
오메~말년에 피볼라고... 먼~ 임빙일까잉?~ㅋㅋㅋㅋ
여그서 누구라고(전.모.두.환 ㅎㅎㅎ)밝힐수는 없지만... 그 오살써글넘들 땜시...
날마다 짬밥그륵수만 달력에다 똥글뱅이 쳐감서 고향앞으로 돌아 갈날만 손꼽아 지달리고 있는디...
"이문딩이~ 나쁜노무 짜슥들 같으니라고..."
첫댓글 고상 많으셨습니다,,,암울했던 시절이었던것 만큼은 틀림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나는 그때 성산광산 에서 차 옴막 오현장에 꼼처놓고 잠도 못자고 밤새 차 지키고 살았습니다 ㅋㅋ
성산광산은 옥매산 옆 아닌지요???
두서없고 진글 읽으시느라 고상하셨제이?~ㅎㅎㅎ
밥도 믹에주고 옷도입해줌서 던도주든디~거그 있을때나 땅크나 잠자리뱅기도 많이 타보고했제~
집이 가락항께 밸볼일 있씁뗘?~ㅋㅋㅋㅋㅋ
아..대부님 고생했겠네요, 79년에서 80년...희비가 엇갈렸는데.
건강하게 잘계시지요?
고생은 누구나 했겠죠~
눈만 벌어지믄 식전조기구보4km,왼종일 태권도 발차기만,거의날마다 주.야간사격, 나람(이엉)엮기,
도리께질,질통메고 벙커작업...제대하루전날 아침점호도 애국가4절까지 부르고 집에가락합디다~ㅎㅎㅎ
에고~~~고상많으셨쎄요...
저는 여자라 어려운말들이 가슴에 와닿지가 않네요.그래도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시니
다행이죠? 늘 화이팅~~!!!행복하시구요~~
오메~여그까징 오셋쏘?
페니 잘있지라이~
누가 옆에서 먼애기를 하길래 또시시한 남정네들 그러고 그란 말이요야~ㅎㅎㅎ
선배님 고생하셨지만...한편으로는 군복무중이..다행?이었다고~혼자 생각해봅니다.
애향심과 정의감이 누구보다도 강하신..선배님께서..만약에 광주의 참혹한 현장에 계셨다고....상상해보니..선배님 모습이...분명하게 그려집니다.
그롸제~나도 골로갔다고 봐야제~ㅋㅋㅋ
내가 만약에 시위현장에 있었다면 그들에게 장갑차 끅고 댕기는법,총기류 다루는것도 갈체주고~
훈련도 잔시케서 특전사넘들한테 달라들어 불라고 했을거고 ~ㅎㅎㅎ
내주변에도 많이 죽었고 시방도 뚜들어 맞아서 부상휴유증으로 고상한 사람도 여러맹잉마~
첨에는 애국인지 먼지도 모르고 시작했던 검불들이 솔차니 가담했지만 그들은 거의가 다 싹쓰리 가불었고...
그때 상무관앞에 서있던 은행나무들이 지금은 많이 컷습디다...
이제 다 추억의 한자락입니다.
그 싸락 싸락했던 기억도.........
나는 시방도 잠자믄 그때의 악몽을 꾸고 있으니 덜떨어진 잉간인가~ㅎㅎㅎ
입에서 단내가 나던 그시절...포로시 재대 20여일을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왔는디 역에서 내려 시내를
차다보는 순간에 KBS광주방송(역전앞 종근당 빌딩에 있었씀)은 화염과 기관총탄 세례가 선명했으며
전여고 앞에 있던 문화방송은 시커멓게 불타버렸고...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시내모습들이 시방도 아주 또렸해용~
2년후까지도 전두환이 말이 옳다고 살아온 내가 광명시에 있는 모성당 신부님이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그때의 진실을 알았으니 내가 진짜로 짠하고 불쌍한 중생이 아니것쏘이?.....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