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백록담 아래 남벽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듣게 될줄은 몰랐다.
지난 16일 낮 12시 30분쯤이었다. 바람이 무지 부는데 우리는 기해년 시산제를 올렸다. 바람 탓인지, 기미년이라고 잘못 얘기했다가 기해년으로 고친 희망과용기 형이 예의 길고긴 고유문을 즉석에서 지어 일컫는다.
크게 세 줄기였다. 보잘 것 없는 음식-나중에는 정성껏 차린 음식이라고 조금 결이 다르게 얘기했긴 했지만-을 드시고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보살펴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우리도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좀 마음껏 다녀보게 북미정상회담에서 좋은 성과 내게 굽어봐달라는 것이었고, 셋째는 김창호 대장 등 먼저 가신 산악인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면서 이미 육십 중반에 들어선 이도 있고 이제 오십대 중반인 날 포함한 회원들이 무릎과 다리 다치지 않게 돌봐달라는 것이었다.
여튼 보살피고, 굽어보고, 돌봐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런데 왕바람이 내내 몰아쳤다. 동영상을 봐도 바람 소리가 왕왕하다.
함께 하지 못한 회원들에게 어느 지점인지 설명해드릴까? 예전 산악인들이 백록담 오르는 코스였던 남벽 분기점 아래 통제소 있는 곳에서 위로 300m쯤 떨어진 지점이다. 최근 10년 동안 겨울 산행 가운데 가장 눈이 없었다. 이곳에 이렇게 눈이 없기가 생전 처음이다.바람이 대신했다. 일회용 컵을 날리더니, 벼슬 없는 회원들이 십시일반 낸 만원권 지폐 한장도 날렸다. 오죽했으면 희망과용기 형이 거금을 들여 구입해 겨울철 우리에게 따듯한 위로가 됐던 비닐 셸터도 찢어먹었다.
돈 욕심 많은 난, 데크 아래 풀섶에 들어가 온갖 비아냥 들어가며 눈에 불을 켰지만-그것도 두 차례나- 도무지 세종대왕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튼 희망과용기 형의 영원히 마침표를 찍지 않고 쉼표만 계속 찍을 것 같은 즉석 고유문이 마침내 끝나고 차례상 그대로 앉아 비닐셸터 아래 안온한 피로연을 가지려던 우리 야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모두들 인민군 내려온다는 소식에 봇짐 싸든 우리네 아버지어머니처럼 남벽분기점 통제소 쪽으로 내려갔다.
통제소 안에 들어갈 수 있나 싶어 호기심 많은 난, 손을 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열리네, 하는데 안에서 누구시요? 그런다. 아유 깜짝이야. 있으면서 영판 없는 척 굴다니.
여튼 우린 난상토론을 벌였다. 난 돈내코 길 안 내려갈란다 했다. 곡절 끝에 희망과용기 형만 나랑 오던 길을 되짚어 영실로 하산하기로 했다. 오전 9시 조금 넘어 피러 회장과 산바람, 뜬구름 총무 등 일행을 먼저 올려 보내고 희망과용기, 아톰 형 맞아 10시 넘어 영실 오르며 기암도 오백나한도 못 봤던 탓이었다. 밋밋한 돈내코로 내려서며 문섬, 범섬 조망하는 것도, 공동묘지 내려서며 사람 살았다고 할 것이 없어, 어쩌구 하는 것도 하릴없다는 생각에 미쳐서였다.
택시를 두 대 부르네 마네, 하는 것도 지겹기도 해 그냥 영실로 원점회귀하면 편하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한몫 했다. 뭔가 대단한 약속을 한 것 같긴한데 여전히 미쩍지근한 채로 패가 갈렸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둘이 보온병 물 부어 쌀국수 하나 먹고 영실로 내려서는데 처음에는 괜한 선택이었나 싶었다. 개스도 짙고 해서였다.
그런데 이 수묵화 같은 풍경이 묘하게 안온한 느낌을 줬다. 예전에 잘 몰랐던 망부석 비슷한 바위와 그 옆 지척에 있지만 협곡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두 아이 형상의 바위, 거의 독수리만한 까마귀, 어렴풋이 보이는 기암의 곡선미 등이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기암을 끼고 아래로 내려서자 어디선가 바람이 휙 불어오면 금세 십몇년 전 태백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암과 오백나한이 자태를 드러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런 기대를 품고 계단을 밟아 내려서니 조금씩 오백나한이 위용을 드러냈다. 잘했군.
나중에 돈내코 하산했다가 곧바로 택시 타고 숙소로 돌아온 이들도 “영실로 내려가겠다고 버틴 이유를 알겠더라. 그 한마디면 끝”이라고 했다.
여튼 한라산 신령께 잘 빌고 닦았으니 올 한해 걱정하지 말고 산에 오시라. 산에 오시면 복 받을 터이니.
이제부터는 시산제 산행 전후의 얘기들이다. 이게 더 재미있으면 안되는데. 15일 김포공항에 가장 먼저 도착해 뜬구름 만나 4층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산바람 형과 만났더니 피러 회장님은 비행기 출발이 지연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가 타는 제주항공은 문제 없는데 아시아나는 30분인가 지연된다는 것이다. 허참 요상타.
여튼 뜬구름과 산바람이 렌트카 찾으러 가고 난 공항에 남아 웨스트브룩 기사 하나 뚝딱 썼다.(두 사람은 내가 만선식당 고등어회에 쐬주 찌그릴 요량으로 보조 운전자 등록을 피하려고 원려한 것이라고 나중에 입을 모았다. 나 그렇게 생각 있이 사는 사람 아닌데) 원래 피러 회장님 비행기는 우리보다 15분인가 뒤에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둘이 렌트카 찾아왔는데도 회장님은 그 귀한 얼굴을 안 보여준다. 또 노꼬메오름 올라갈 예정이었는데 영 틀렸는갑다, 어쩌구 하니까 나타났다.
늘 서귀포에서 제주 들어올 때 저기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에 쟁여놓은 새별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회장님 역시 제주 살 때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못 가봐 늘 빚으로 남아 있었다고 했다. 3주 전엔가 가족과 다녀왔다는 산바람 형이 바람을 잡았다. 거기 카페 새빌이라고 있는데 괜찮아요.
뜬구름이 핸들을 잡았는데 제주에서 렌트카 운전하면 바보가 되는가 보다. 내가 알려준 곳에서 나가지 않다가 30분 정도 귀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나도 잘못한 것이, 그냥 내비의 유턴 지시를 따랐으면 5분 정도 허비했을 것을 이시돌 목장 옆길을 드라이브할 기회가 언제 있겠나 싶어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는데 이 길이 영 이상했다. 날은 저물고 갈길은 먼데 너희들 왜 이러니, 라고 선배들이 말은 안했지만 따가운 시선이 목줄기에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리조트인가 하다가 장사가 안 됐는지 카페로 전업했다는데 성수역 근처 예전에 자주 드나들던 카페 ‘어니언스’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 같았다. 다만 새별오름 안의 피라미드 묘실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높다랗고 활달한 창문이 세워진 것만 달랐다. 커피나 빵 맛에는 별반 매력 같은 걸 못 느끼겠는데 예전 리조트 객실의 발코니에 단 둘만 들어가게 만든 좌석이 연인들에게 꽤나 인기있겠다 싶었다. 날 안 좋을 때 들어앉아 오름 풍광 건너다볼 공간으로 그만이겠다.
40분쯤 카페에 머무르다 새별오름을 동에서 서 방향으로 올랐다. 19일이 정월 대보름이니 며칠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오름 전체를 홀라당 태워 먹을 만큼 장작 더미들을 여러 군데 쌓아두고 있었다. 뜬구름의 강요로 정상에서 희망과용기 형이 알프스에서 시전(試展)했던 뜀뛰기를 해봤는데 생각보다 잘 안 돼 각자 서너 차례 하며 헉헉, 깔깔거렸다. 오르는 데 5분쯤, 조금 숨이 차긴 했고 노꼬메오름보다 훨씬 놀이터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오름 값은 했다. 아쉬웠던 점은 중산간 지대 정도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여튼 5시 반 정도 차에 시동 걸어 모슬포 만선식당 안에 들어서니 6시 조금 넘어서였다. 고등어회와 조림 시켜 먹는데 회원들 얼굴이 가물거린다. 직장 일로 하루 늦게 오는 두 형이 훨씬 안타까웠다. 운전 때문에 술을 입에 안 댄 총무가 마음에 걸려 회를 남겨 숙소 들어가 먹을까도 했는데 다행히도 총무는 먹긴 먹는데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며 그냥 셋이 다 먹으란다. 이런 고마울 일이. 난 신나게 회를 밥에 싸 주워넘겼다. 산바람 형은 초행이 아니라면서 먹는 법을 다 잊어 먹었다고 했는데 대단히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식사 마치고 시산제 장 보고 해서 서귀포 라마다앙코르 이스트 호텔에 들어와 맥주로 입가심했다. 남자 셋, 회장님 이렇게 방 둘을 빌렸다. 조식 포함 13만 6800원. 이튿날 두 형이 더 와 여섯이 그대로 두 방에서 자되 조식 빼고 11만여원. 5성급을 표방하는 호텔이 이렇게 싸다니, 제주 사람들 어떡하나, 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해가며 잔을 들이켰다. 멀리 불빛이 보이는데 산인지 바다인지 헷갈렸다. 제주 살아본 회장님은 집어등이라고 일러준다. 피곤이 집어등 불빛을 삼킨다고 느낄 즈음, 커튼을 쳤다.
첫댓글 재밌는 산행기 잘 읽었네. 제주도 좋은 풍광이 더욱 새록하네. 함께 놀아주신 선후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악조건에서 시산제하느라 수고많았어.^^
덕분에 올 한해도 무탈산행하겠다.
재미있는 산행기 잘 읽고 갑니다.
함께 놀아주신 선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
글 쓰느라 수고했다. 하산길 돈내코는 좀 길고 돌이 많긴 하지만 허정허정 내려오는 것도 나름 괜찮단다. 고등어 회가 역시 맛있았고, 김해횟집 회도 굿. 제주도는 가끔 찾아가면 분위기를 바꿀 수 있어 좋은 듯. 올 한해 산에서 얼굴 많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