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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이 시집
흔들리는 공간
김요아킴 시집 『공중부양사』
한보경
문학작품에서 공간이 배경이 되어주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하여 작품에 다양하고 풍성한 효과를 주는 경우가 있다. 특히 소설의 경우 작품에 결정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주어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시에서는 공간적 배경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을까. 1편의 시에서 배경을 받치고 있는 어떠어떠한 공간이 또 다른 어떠어떠한 공간으로 대체불가하다면 그 공간은 단순히 시적배경을 넘어 시 전체에 특별한 효과를 더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요아킴 시인의 6번째 시집 『공중부양사』는 시의 공간이 주는 특별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공중부양사』의 시적 공간은 배경의 기능을 넘어 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복선처럼 다가온다. 시집의 3부, 4부 전체가 ‘금곡동’이라는 공간을 부제로 한 것을 보더라도 이번 시집에서 공간이 갖는 비중이 적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가 몸담고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경험을 소재로 한 ‘금곡동’ 연작들은 ‘금곡’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전반적인 인간과 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되돌아보고 세상에 만연한 여러 문제들을 에둘러 드러내고 있다. ‘금곡’이 개인적 삶의 공간을 넘어 주변사회와 세상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연작시 외 1, 2부도 시의 공간적 배경은 대체로 구체적이다. 구체적인 시의 공간이 주는 효과에 대해서 단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화자(시인일 수도 있는)가 처한 상황과 문제들을 좀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모두의 문제와 상황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엉뚱한 접근일 수 있지만 『공중부양사』를 관통하는 시적공간에 집중하여 수록시들을 살펴보기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중, 그리고 부양하는, 사
시집을 열기 전 의미심장한 제목 앞에 시선이 멈춘다. 통과의례 같은 불문의 시간이다. 엇나가는 생각의 가지에서 굵게 뻗은 가지를 골라내 보기로 한다.
먼저 ‘사람’ 혹은 ‘존재’를 의미할 것 같은 ‘사’라는 접사를 잘라낸다. 그리고 ‘공중’이 지니고 있는 다의적 의미를 추려낸다. 아마도 하늘과 땅 사이 어디쯤의 공간인 ‘공중’을 생각한다. 그 ‘공중’에서 ‘사’는 ‘부양’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다.
‘부양’은 浮揚인가. 扶養인가. ‘사’는 ‘공중’에 떠 있는 것인가. ‘공중’을 무겁게 짊어진 것인가. 왜 그는 떠 있는가.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부양‘은 그에게 즐거움인가. 어쩔 도리 없이 짊어진 짊인가. 현실 도피인가. 고통인가.
‘공중, 부양, 사’는 오리무중을 떠돌고 있다. 일단 생각을 멈추고 3부의 시 『공중부양사』를 읽어보자.
토요일, 제법 푹신한 침대는
지난 주 노동의 보상으로
달콤하다 못해 살짝 볼륨을 높인
브라운관의 환청 속으로
무언가 검은 물체가
아파트 베란다의 창문으로
한 가정의 웃음이 모두 추락한
아침햇살에 찡그린 망막으로
바람에 실려 흔들리는 생의 밧줄
절대 끊겨서는 안 될 마음으로
소스라치듯. 자는 아이들을 챙겨보며
공중에서 부양하는 그 몸짓으로
오늘 하루를 기어이 살아내야 할
- 『공중부양사-금곡동 아파트』 전문
어릴 때 가끔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러니 ‘공중’은 늘 꿈속의 공간이었다. 꿈인 걸 어렴풋이 알아채는 순간 ‘공중’은 와르르 와해되고 짜릿했던 나의 ‘부양’은 허망하게 끝나곤 했다. 아찔한 ‘공중’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이부자리를 적신 기억. ‘공중부양’은 축축한 낭패감으로 남을 때도 있었지만 무거운 몸이 더는 무겁지 않고 깃털처럼 가벼워져 공중에 떠 있던 느낌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즐거웠다. 꿈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 공중에 떠 있는 꿈을 꾼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 있었을 것이다
『공중부양사』의 시적화자에게 ‘공중’은 깨어나야 하는 공간이 아닌 현실의 공간이다. 그에게 ‘공중’은 치열한 삶을 부양扶養하는 공간이다. 그의 부양浮揚은 ‘하루를 기어이 살아내’는 그만의 ‘몸짓’이다. 하루치의 삶을 부양扶養하기 위해 ‘공중’의 삶을 부양浮揚하는 그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절대 끊겨서는 안 될’ 마음으로 ‘생의 밧줄’을 잡고 ‘공중’에 떠 있다. 보상 없이 추락하더라도 깨어나면 안 되는 현실을 기어이 부양한다.
내게는 ‘기어이’에 걸려 있는 그의 공중부양이 즐거움보다 고통에 가까운 것 같다. ‘공중부양사’의 삶은 높고 강한 곳에 있지만 가장 약하고 낮은 것인지 모른다. 가장 강하고 높은 곳에 있는 가장 약하고 낮은 존재들에게 ‘바람에 실려 흔들리는 생의 밧줄’은 기어이 잡고 버티어야 하는 오늘이고 더 높고 강한 삶으로 부양하기 위한 꿈같은 것이 아닐까. 가끔 ‘제법 푹신한 침대’에서 ‘살짝 볼륨을 높인’ 브라운관 속의 달콤함을 꿈꾸기도 하지만 ‘푹신한 침대와 브라운관의 달콤함’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야 하는 환청 같은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비현실적일 것 같은 ‘공중’이 현실이고, 현실적일 것 같은 ‘침대와 브라운관의 볼륨’이 깨어나야 할 비현실적 공간이라는 것에 마음이 복잡해진다.
무수한 ‘공중부양사’들이 ‘절대 끊겨서는 안 될’ 마음으로 떠 있는 ‘공중’이라는 공간. 오늘도 흔들리는 그들의 ‘등’ 뒤로 보일 듯 말듯 ‘푸른 멍 자국’이 번져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한 ‘공중부양사’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시인의 마음결이 만져진다.
흔들리는 공간, 그리고 경계
십여 년 전 신도시로 이사와 접하는 대단지 아파트문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층적 일상이 지금의 나를 호명한다.
(중략)
생각해보건대 결국 시의 출발점이란,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바로 여기가 아닐까?
- 『시인의 말』 부분
시인은 시의 출발점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은 가장 집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가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지나온 ‘그때 거기’로 돌아가 보는 것이 먼저일 듯하다. 발 딛고 있는 그의 ‘지금 여기’가 좀 더 분명해질 것 같아서다.
돌아서는 등 뒤의 모습은
모두 푸르다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견고한 이유들이
도처에 나열되지만
그 속엔 누구도 감당치 못할
멍 하나씩 발아되고 있다
결코 몇 방울의 눈물론 풀어낼 수 없는
시퍼런 물결에 수없이 맞고 맞아
기어이 바닷빛이 되어버린,
그날 저녁밥상에 아버지는
길게 드러누우셨다
불면의 눈으로 충혈된 실패는
파도의 허연 칼날을 붙잡고
다음 생을 기약하려던 몸부림처럼
뒤집혀진 등을 내보이며, 어린
식욕을 젓가락질로 자극했다
짠내 나는 먼 물살을 헤치는
슬픈 가장의 통점이
스스로 그어놓은 선명한 줄무늬로
갓 길어 올린 그물처럼 걸려든다
등 뒤의 푸른 모습은 모두 돌아선다
- 『고등어』 부분
보일 듯 말듯 경계 하나가 있다. ‘금곡’이전의 경계이다. 시인일 수도 있는 화자의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길게 누워 있다. 경계처럼 돌아누운 긴 등이 아버지와 화자 사이의 공간을 아프게 나눈다.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견고한’ 경계는 ‘돌아설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경계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슬픈 가장의 통점痛點’이 되어 흘러 고스란히 화자에게로 전해진다. 순간 ‘선명한 줄무늬’ 같은 경계는 ‘그물처럼 걸려들’어 사라진다. 경계를 허문 ‘몇 방울의 눈물론 풀어낼 수 없는’ 슬픔과 ‘누구도 감당치 못할 멍들’은 한결같이 푸른 것들이다. 푸른 것들이 ‘몸부림처럼’ 경계를 흔든다.
이렇듯 시집을 관통하는 시공간들은 구체적으로 흘러간다. 건널목과 바다상회와 자갈치역과 칠암항에도 ‘등을 돌리고 누운’ 존재들이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견고한 이유’들을 ‘밧줄’처럼 붙잡고 ‘공중’에 떠 있다. ‘더 큰 아픔으로 슬픔을 파’내려는 그들은 바다에서 육지로, 언덕에서 평지로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그러함에도 기꺼이 주어진 삶을 부양한다. ‘공중부양사’로 호명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은 우리를 흔든다.
『고등어』와 『바다상회』와 『칠암항』, 『날개, 나비를 탐하다』, 『소문의 벽』, 『거리』 등을 지나 오정환시인을 기리는 『물을 노래하다』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구체적인 일상의 공간을 흐르는 서사를 통해 지난 삶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는 애도와 반성을 드러내고 있다. 때론 날 것이 주는 이미지들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들도 생생하게 현장감을 전달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구체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서사는 사실적인 현장감을 주고 시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는 힘이 있다.
2부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아버지보다 더 먼 시공의 역사를 불러오고 기억하려 애쓴다. 잊기 쉬운 역사의 상흔을 결코 잊지 않기 위해 따뜻하고 진솔한 말로 오랜 단절과 반목을 불러내 다독인다. 그리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한다. 시인이 소환한 한국 근현대사의 공간에는 여전히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위안부 강제동원의 폭력성과 제주에서 벌어진 국가적 폭력의 민낯들이 떠다닌다. 가장 아픈 통점인 분단의 현실이 널문리의 ‘둥근 만남’으로 떠 있다. 시인이 역사의 아픈 현장을 끝까지 잊지 않고 소환하는 것은 그것을 사실로 전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난 시간의 상처와 통증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무심한 오늘을 반성하고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심연을 흔드는 아픈 역사의 이면에 아직 남아있는 푸른 ‘멍’들을 찾아내어 어루만지는 시인은 “시란 약자를 위해 울 줄 알고, 잘못되고 부조리한 그 모든 것에 분노할 줄 알며, 이를 절실한 울림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문학적 신념이자 나아가야 할 시적 방향” 이라 밝힌 바 있다. 시인의 말이 그의 시다.
나는 역사와 사실에 깊이 연루된 시 쓰기를 매력적인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흔한 서사를 넘어 한 편의 새로운 서정이 된 그것, 고되고 요란하고 비릿하지만 뭉클하다.
고담봉 금샘이 넘쳐흘러
해지는 곳으로 이르는 대천천을 끼고
남과 북은 나뉜다
쉽사리 건널 수 있는 다리의
저 끝과 끝의 이름은 서로 다르다
콘크리트 평수와 교환가치는
애초부터 달랐다
아이들 머릿속에도 전생처럼
경계가 지어졌고, 또 경계를 했다
내가 자는 머리맡은 당연히 남쪽을 원했고
집 이름도 그쪽을 본 땄다
누구나 밤마다 산책을 하고
하얀 달이 뜨면 삼삼오오 몰려드는 대천천, 그 경계에
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잿빛 가사를 입은 꼭대기 층의 사내와
그 아래층 로만칼라의 사내가 동거를 한다
음력 사월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양력 12월의 연등이
1층의 다이소 불빛처럼 환하다
- 『경계-금곡동 아파트』 전문
화자의 ‘그때 거기’를 지나 ‘지금 여기’에서 ‘금곡’이라는 또 하나의 경계를 마주한다.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쪽과 저쪽이 있었기에 경계가 있다. 『경계』의 경계도 ‘금곡’의 전과 후를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금곡’의 전과 후가 있었기에 ‘금곡’이라는 경계가 생겨난 것이다? 라고 생각해본다.
공중에 떠서 내려다보듯이 흔들리는 『경계』를 읽어보자. 금곡동은 행정구역상 부산의 북쪽인 북구에 있는 동네다. 26편의 금곡동 연작시에는 화자(시인)의 ‘지금 여기’라는 소소한 일상들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인은 시 『경계』에서 부산의 금곡동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시적 공간으로 들여와 ‘금곡’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낳았다.
‘해지는 곳으로 이르는 대천천’이 남과 북의 경계이지만 ‘쉽사리 건널 수 있는 다리’로 하나가 되는 것처럼, 저 끝과 끝은 이름이 다르지만 ‘쉽사리 건널 수 있는 다리’로 이어지는 것처럼, ‘금곡’의 경계는 공간을 나누고 잇는다. 북쪽의 금곡에서 ‘남쪽의 머리맡’을 원하는 화자가 다른 방향을 함께 베고 누운 것처럼, ‘금곡’의 경계는 다르고 같다. 그리하여 ‘콘크리트 평수와 교환가치’처럼 애초부터 다른 것들도 ‘대천천’에서는 하나이다.
그러한 ‘금곡’의 경계를 한 꺼풀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경계의 속살 같은 공간이 또 있다. ‘금곡’이라는 공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잿빛 가사’와 ‘로만칼라’와 ‘크리스마스 트리’와 ‘연등’이 ‘다이소’ 불빛 아래 경계를 맞물기도 하며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극과 극이 동거하는 그곳의 경계는 흔들리는 공간이다.
『경계』의 경계들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본래 있고 없고를 논할 것이 없는 것이다. 나누기도 하고 뭉치기도 하고 끝과 끝이 되어 사라지기도 하고 시작과 시작이 되어 서로 맞물기도 하며 ‘있다’와 ‘없다’ 사이에서 흔들린다.
흔들리는 유토피아
흔들리는 공간과 경계를 따라 ‘금곡’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화자는 마치 ‘금곡’에게 행복의 조건을 내걸듯이 속삭인다. 우회적인 요구처럼 들리지만 단호하다.
언제 들려올지 모를 집주인의 목소리에
유목을 해야 할 긴장감이 있어야 해
매일매일 출근길에 화들짝 끼어드는 차 뒤꽁무니의
놀람도 있어야 해
분필가루 묻어나는 고함에도 달콤한 잠을 챙기는
반 아이들 넉살로 있어야 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마누라의 역정과
수능을 앞둔 딸아이의 짜증은 덤으로 있어야 해
월급이 찍힌 다음날 지치지도 않고 증발하는
통장 숫자들의 나열도 있어야 해
늦은 귀갓길 요행히 찾은 주차공간에 선을 넘겨버린
이웃 얌체들도 있어야 하고
또 하루를 송출하는 브라운관 속 찌질한 위정자들의
코미디도 있어야 해
남의 시를 엄청난 잣대로 침 튀기는 한 젊은 평론가의
오독도 있어야 하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내 글을 알아주는
청탁의 반가움도 있어야 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통화한 고향 엄마의
짠한 소리도 있어야 해
변함없이 위층의 쿵쿵거림으로 찾아오는 주말의
설렘도 있어야 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일요일 아침 멋진 안타를 꿈꾸며
마시는 자판기 커피의 단맛도 있어야 해
그리고 하늘의 명을 안다는 그림자의 온갖 세레머니
마땅히 받아줄 그런 홈이 있어야 해
- 『여기. 지금의 행복-금곡동 아파트』 전문
그는 ‘유목遊牧’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긴장감과, 출퇴근길을 끼어드는 ‘놀람’과, ‘마누라의 역정’과, ‘딸아이의 짜증’과, ‘지치지도 않고 증발하는 통장 숫자들’과, 선을 넘는 ‘이웃 얌체’들과, ‘찌질한 위정자들’과, ‘젊은 평론가의 오독誤讀’ 등이 있는 ’금곡‘의 행복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지 모른다. ‘내 글을 알아주는 청탁’과 ‘고향 엄마’와의 통화, ‘주말의 설렘’, ‘자판기 커피의 단맛’에 아주 가끔씩 행복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금곡’의 이 모든 요구들이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주는가. 나는 갸우뚱한다. 행복을 말하는 그의 표정과 어투와 진짜 속내는 모호하다. ‘그림자의 온갖 세레머니를 마땅히 받아줄’ 그의 ‘홈’ 앞에 나열한 행복의 줄서기 앞에 나는 약간의 비애를 느낀다. 결론적으로 그의 ‘홈’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유토피아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와 ‘장소’를 뜻하는 의미가 합해진 합성어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며 없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꿈꿀 수 있는 곳’이다. 결국 유토피아에는 아무 것도 없고 행복이라 부를 경계도 없다. 그러니 유토피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한 설계도일 뿐, 행복이라는 환상을 흔드는 공간이 아닌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유토피아를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유다.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금곡’을 흔들리는 공간의 경계이면서, 흔들리는 경계들이 이어진 공간이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금곡’은 ’행복‘이 흔들리는 공간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흔들리는 공간이 된 ‘금곡’을 진정한 유토피아라 부른다.
광장
이쯤에서 다시 시인이 시를 쓸 때 그 시를 쓴 주체는 그 시인일까 생각해본다. 프로이트는 문학창조의 근원에는 현실에서 벗어나 몽상적인 쾌락을 즐기는 무의식적 소망이 있다고 했다. 이를 시에 적용하면 시라는 텍스트는 작가의 감정과 무의식적 소망을 드러낸 것이며 시 읽기는 시인의 무의식에 깔린 소망을 찾아 시인과 공감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산이 많은 부산에서 평지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십여 년 전, 신도시로 이사와 가파른 산중턱에 자리한 집에서는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생의 편리와 아늑함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자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안락함에 취해, 돌아다보아야 할 이웃과 세상의 짙은 그림자를 잊고 있었다. 이제 그 진정한 평지라 할 수 있는 광장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집-금곡동-시작노트에서』
산 언저리에 자리한 옛집처럼
오르막의 숨가쁨이나
위태로운 내리막은 전혀 없다
(중략)
짙은 풀내음과 뻐꾹새 울음은 없지만
네온 풀빛 숲으로, 갈 곳은
쉽사리 많아졌다
여긴 누가 보아도 평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광장으로 가보진 못했다
- 『집-금곡동 아파트』 부분
이제 시의 출발점이라 말한 ‘지금 여기’를 정리해본다. 평지다. 생의 편리와 아늑함이 있다. ‘짙은 풀내음과 뻐꾹새 울음’은 없다. ‘갈 곳은 쉽사리’ 많다. 여전히 ‘광장’은 없다.
나는 먼저 ‘쉽사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쉽사리’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쉽사리’에는 ‘평지’가 숨긴 반전이 있다. ‘쉽사리’는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간절함의 반어적 표현이다.
다음으로 ‘누가 보아도 평지다’라는 명제에 의심을 가져본다. 그가 진정한 평지라고 생각하는 곳은 ‘누가 보아도’ 평지인 여기는 아닌 듯하다. ‘누구’ 속에 적어도 ‘그’는 들어 있지 않을 것도 같다. ‘갈 곳은 쉽사리 많아’지고 ‘누가 보아도 평지’인 여기는 그에게 흔들리는 유토피아다. 그래서 그는 ‘하늘의 명을 안다는 그림자의 온갖 세레머니를 마땅히 받아줄’ 수 있는 진정한 평지를 찾기까지 또 다른 ‘공중부양’을 꿈꾼다. ‘누가 보아도 평지’인 여기에서 ‘쉽사리’ 갈 수 있는 그 많은 곳을 두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광장을 꿈꾼다. 그의 ‘광장’이 세상의 짙은 그림자를 기억할 수 있는 그의 ‘진정한 평지’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그의 ‘광장’에 물음표를 찍는다. 나의 물음표는 ‘광장’의 다음을 기다리게 한다.
『공중부양사』에서 시인은 절대 뿌리 뽑히지 않는 언어의 뿌리로 흔들리는 시의 공간들을 구체화하고 있다. 오독의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지라도 『공중부양사』를 읽는 시간은 흔들리는 시의 공간에 떠 있는 절대 뿌리 뽑히지 않는 시인만의 ‘몸짓’을 읽는 시간이었고 ‘절대 끊겨서는’ 안 될 ‘시’의 밧줄을 잡고 흔들리는 시인의 ‘공간’을 더듬어 본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인은 그가 꿈꾸는 공간인 ‘광장’이 모두의 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광장’에 대하여 더 이상 불필요한 주註를 달지 않는다. 다만 옆구리를 슬쩍 찌르고 ‘광장’으로 가는 티켓 한 장을 건넸을 뿐이다. 똑똑한 선택을 위한 ‘넛지’ 같은 것이다. 무딘 나의 옆구리에도 ‘광장’의 감感은 올 것인가.
여전히 ‘광장’은 미정이고 너무 먼 미지이다. 다만 나의 ‘광장’을 상상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