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라루스 하틴 마을 학살
벨라루스 하틴 마을은 카틴 숲 학살지와는 다른 곳이다. 이곳 마을은 카틴이 아니라 하틴KHATYN이다. 민스크에서 약 54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잔악성을 고발하는 학살현장이다. 하틴 마을은 나무들로 울창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는데 아름다운 풍경인데 슬픈 영역이어서 모두들 엄숙한 분위기다. 하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긴 돌길로 잘 다듬어 놓았다. 멀리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선 남자 동상이 보인다.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소슬한 정경이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기록의 벽이 있다. 기록의 벽에는 나치 수용소와 희생자들, 학살에 대한 내용 등을 기록해 놓았다. 1943년 3월 22일 독일군이 하틴 마을에 진입하였다. 그때 벨라루스 279개 도시 중 80%인 209개 도시가 파괴되었다. 촌락은 9200개가 파괴되었다. 독일 나치군이 2,230,000 명을 학살시켰다는 등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벽이다. 벨라루스 인구 1/3이 학살당했다.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기록의 벽을 보고 다시 하틴 마을로 향해 걸었다.
기록의 벽 앞에서부터는 길 중앙에 붉은 꽃들을 심어 놓았다. 죄 없이 희생당한 하틴 마을의 붉은 절규로 다가온다. 눈앞에는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처참한 남자 동상이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가까이 다가온다. 계속 걸어가서 동상 가까이 가보니 그 비통함이 할아버지와 손자를 휘감고 있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마을 할아버지 유지프카민스키가 희생된 손자를 들고 서서 절규하는 동상이다. 곁에는 이 마을 교회였던 건물이 있다. 독일 나치군이 쳐들어와 하틴 마을 주민들 모두 이곳 교회에 가두었는데 소리를 지르자 불을 질러 모두 학살했다. 주민 149명 중에서 75명이 어린아이였다. 그때 이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있어서 무사했었다. 마을에 돌아왔을 때 죽은 손자를 안고 망연자실한 할아버지가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진한 전율로 지구상의 가혹한 참상을 거부하고 있다. 어찌 이것이 벨라루스만의 슬픈 역사일까. 내 조국의 슬픈 역사가 떠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동상 곁에 오래도록 머물며 다시는 이런 없기를 기원했다.
동상 뒤편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텅 빈 하틴 마을이 시작된다. 온통 짙푸른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마을 문이 열린 채로 교회로 모이라 하여 갔다가 모두 학살당한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집집마다 금방 올 줄 알고 문 열고 갔다는 그날의 열린 문이 보인다. 집터 주변의 우뚝 솟은 기둥은 그 당시의 굴뚝이다. 뼈만 남은 굴뚝이 주인을 잃고 슬픈 표석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붕이 있는 마을 우물도 있다. 높은 종탑도 있다. 하틴 마을에는 아직도 종소리가 매 30분마다 24시간 동안 울린다.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종소리로 후손들에게 전쟁의 참혹성과 조국애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희생된 민간인들을 추모하는 비석들이 파란 잔디밭에 줄지어 있다. 독일군에 의해 전몰된 다른 벨라루스 186개 마을을 기리는 마을묘지도 있다. 그 지역의 흙을 담아서 전시하고 있다. 투명하게 흙을 담아 놓았다. 사라진 땅의 흙은 고요한 시위다. 하틴 마을 어린이 75명의 학살 추모관도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던 장난감 인형 등이 놓여 있다. 가슴 아픈 장면이다.
주위의 자작나무숲이 아름답다. 그날에도 저리 아름다웠을 텐데, 마을과 사람은 고운 풍경만 남기고 간 곳이 없다. 그날의 슬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불을 켜 두고 있다. 단의 가장자리에는 자작나무 세 그루가 서서 지키고 있다. 하틴 마을은 과거의 모습은 없지만 지난 역사를 상기시키며 전쟁의 잔인성 상징하는 학살현장이다. 하틴 마을에서 40분 동안 머물며 벨라루스의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보았다. 다시 들어가던 길을 따라 하틴 마을을 나왔다. 곳곳에 민들레가 많다. 노랗게 민들레꽃이 피었다. 우리나라의 민들레와 같다. 고사리도 많은 나라다. 이곳은 동유럽 동슬라브 지역이다. 1966년에서야 오픈된 나라다. 화장실을 한국과 비교하지 말란다. 지저분하단다. 그런 것들은 세계여행에서 이미 겪어온 일이다. 우리나라만큼 잘 된 화장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 조국의 높은 위상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다. 다음 여정을 위해 서둘러 하틴 마을을 떠나왔다.
참고로 카틴 숲 학살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카틴은 나치수용소 희생자들의 추모 도시다. 카틴 숲 학살은 소련군이 폴란드 유명인사들 작가, 정치가, 의사 등을 학살한 곳이다. 1939년 독일과 비밀협정을 맺고, 스탈린의 지시로 1940년 폴란드로 진입한 구소련의 비밀경찰이 폴란드 동부 러시아 스몰렌스크 근교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 교수, 의사,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사회 지도층 인사 2만 2천여 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구소련의 폴란드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집단을 제거한 것이다. 이 사건의 조사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는 외교 마찰을 겪어 왔다. 결국 독일군이 바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면서 소련으로 침공해 들어간 이후인 1943년에 독일군이 집단 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처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시신 발견 당시 소련은 독일군의 소행이라고 발뺌하였으나 독일 측의 조사로 구소련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소련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독일군의 소행으로 주장해 왔지만,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1990년 4월에 구소련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여 독일은 오랜 누명에서 벗어났다. 러시아는 구소련군이 개입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국가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4년 러시아는 카틴 숲 사건과 관련해 구소련이 자행한 만행임을 인정하면서 보유하고 있는 기록을 폴란드에 제공하겠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이라 관련자 처벌은 물론 국가적 책임은 질 수 없다는 입장만 밝혔다. 하지만 폴란드는 대량학살이 인류에 반한 범죄인만큼 관련자를 기소하는 데 시효가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러시아 군법원은 2005년 1월 11일에 이 사건이 유엔이 규정한 집단 인종 학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카틴 숲은 이곳을 방문하던 폴란드 대통령 비행기 추락으로 폴란드의 대통령, 차기 대통령, 은행총재 등 유명인사 132명이 사망한 비참한 현장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10일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내외가 정부 요인들을 동석하여 러시아를 방문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폴란드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려던 것은 푸틴 러시아 총리가 양국의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카틴 숲 학살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식에 폴란드 총리를 처음 초청한 것에서 발단이 시작 되었다. 그동안 러시아를 강력히 비판해 오던 폴란드 대통령은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폴란드 카친스키 대통령은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개별적으로 추모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현재 카틴 숲은 벨라루스에 속해 있다. 카틴 숲 학살 사건도, 하틴 마을 학살 사건도 가슴 아픈 비극이다. 두 사건 모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지구상에서 이런 참혹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