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방에서 밥을 시켜 속옷차림으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태무가 또 치근덕거린다.
밤새 잠도 재우지도 않고 탐색하듯 별짓을 다해 놓고, 아직 기력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애순이 몸을 비틀어 빼며 눈을 흘긴다.
“왜 이래, 아침 인사를 하자는데?”
“쓰라려 죽겠는데, 아직도 힘이 남았어요?”
앉은걸음으로 한걸음 물러앉으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태무가 멈칫한다.
“오빠,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 혼자 남겨놓고 내려가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요.”
“형이나 누나가 들어 와 살겠지, 걱정하지 마.”
“그렇잖아도 큰 오빠더러 들어 와 살라고 하는 것 같던데, 안 들어오신다나 봐요.”
“춥고 배고프면 들어오게 돼있어, 기다려 봐.”
“하시는 일이 기술이 좋아져서 이젠 쉬는 날이 없다던데요, 돈 벌이가 좋아 졌다던데.”
“죽어라고 일해 봐야, 까짓 고물덩어리나 만지는 기술자지, 좋아지면 얼마나 좋아지겠어?”
“그래도 기술 있는 사람은 밥을 굶지는 않잖아요, 나는 큰오빠 사는 것이 좋아 보여요.”
“좋기는, 날마다 기름때나 뭍이고 사는 게 뭐가 좋다고, 어디 곁에나 가겠어?”
“그래도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빈손으로 나가서 그만 하면 됐지요.”
“쫓아내기는 누가 쫓아내, 방 한 칸 얻어 줬으면 됐지, 뭘 더 해줘야 해?”
“그래도 큰아들인데, 전세방이라도 얻어 내 보냈어야지, 사글세방을 얻어 줬다면서요?”
“누가 그런 말까지 해, 형수가 그런 말을 했지? 야, 골 아픈 소리는 그만하고 이리 좀 와.”
다시 태무가 애순이를 끌어안으려 하자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벽에 기대앉으며,
“오빠, 이야기 좀 하자.”
“무슨 이야기?”
멈칫거리며 애순을 쳐다본다.
“내가 오빠 말처럼 부산에 내려가면 아직 동생들 뒷바라지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지? 그게 걱정이야.”
“내가 월급 주면 될 거 아니야?”
“내가 오빠 일을 하면서 어떻게 돈을 받아?”
“이 바보야, 나는 믿고 맡길 사람이 있어 좋고, 너는 여기보다 월급을 더 받으니까 좋고, 서로 좋은 건데, 또 내가 직원을 쓰면 월급 안 주고 그냥 Tm니? 기왕 나가는 돈 네가 받는데 웬 걱정이니?”
“그래도 오빠한테서 월급을 받는다니까, 이상하잖아.”
“대신 착실하게 일 해 주면되잖니?”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오빠한테서 돈 받고 일한다는 것이 말도 안돼서 그러는 거지요.”
“다른 사람 보다 배를 줘도 너를 데려 갈 생각이다.”
“그럼 오빠가 손해잖아요?”
“큰 회사에서는 실력이나 이용가치를 보고 직원을 뽑지만, 작은 회사들은 친척을 데려다 쓰는 경우가 많아, 일자리가 귀하기도 하지만 제일 먼저 믿을 수 있어서 그런다더라.”
“그럴 것도 같네요.”
“어느 선구상회에서는 꾀 오래 있던 직원을 믿고 은행에 돈 찾으려 보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더란다, 찾아보니 돈을 갖고 도망가 버렸는데, 집에도 소식이 없고, 보증 선 사람도 가난해서 돈을 찾을 길이 없다더라. 그런 일도 있단다, 그러니 어디 믿고 데리고 있을 사람이 흔하냐?”
“그렇게 간이 큰 사람도 있어요?”
“사람 쉽게 믿으면 안 된다, 무서운 세상이야, 돈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없는 세상이다.”
“오빤 나를 믿어?”
“그럼, 앞으로 같이 살 사람인데.”
“오빠가 어머니께 먼저 말해줘, 나는 겁나서 말 못하겠으니까.”
“알았다, 그러지 뭐.”
애순은 자신이 집에 돈을 보내줘야 하는 일이 걱정돼서 입안에 빙빙 도는 말을 뱉어 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시작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인데 어떻게 시작하지요?”
“다 생각 해 둔 것이 있으니까, 넌 기다리기만 해,”
“걱정 돼서요.”
태무를 전송하고 혼자남자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엇인가 채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밑이 빠진 듯 차오르지 않고 술술 새 나가는 것 같다.
법원길목에서 가끔 보는 재판을 받으려 가는 호송 버스 유리철창 안에 갇힌 죄수가 용수를 쓴 짚 사이로 내다보는 눈과 마주 칠 때 섬쩍지근하던 그런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하늘이 보기 부끄러워 쓴 것인지,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워 쓴 것인지 모를 용수를 휙 벗겨보고 싶던 충동이 들던 기억이 손가락을 간지럽게 한다.
역 광장엔 들거나 나는 사람들이 무심하게 걸으며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건너 길에는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차들이 도시가 살아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문뜩 얼굴이 달아오르고 무릎에 맥이 빠진 듯 주저앉고 싶어지고, 손가락 끝이 간질거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일부러 어께를 툭툭 치며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 같다.
‘너, 뭘 했는지 다 알아.’
‘나쁜 년, 그런 일을 하면서도 살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획 고개를 돌려보니 시침을 뚝 뗀 얼굴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할 짓이 없어 그렇게 사니?’
‘양심도 없니?’
또 등 뒤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구두뒤축 소리를 더 요란하게 내면서 그 소리를 피해 도망가듯 걸었다.
얼마나 큰 꿈을 안고 올라 왔었던 도시였던가?
같은 나이또래의 아이들은 공장에 취직이 되었다며 길길이 뛰며 올라가던 곳에 대학을 다니려 올라간다는 것은 화려한 꿈이 이뤄진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헛꿈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슴은 두려움이란 포승에 묶여 있었던 것이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아득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절망은 두려움을 더 해 갔었다.
두려움은 태무어머니가 악다구니를 쓰며 손님을 부르는 시장으로 발길을 끌어 당겼고, 어디론가 숨어들어버리고 싶었던 마음은 태무의 예고 없는 방문도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드릴 수 있었는지도, 아니 그런 변화된 보호마저 아쉬웠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다면, 그 방법도 인정받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떤 행태로든 변화를 갈구했던 목마른 시절의 갈증은 시원하게 풀리는 듯 했었다.
불이 쉬 옮겨 붙었고, 미친 듯 타올라 몰입할 수 있어 좋았던 것이다.
잡초는 척박한 땅에 뿌리내림을 하고 잎을 썩혀 토양을 건강하게 해놓아 살만하면, 어디서 어떻게 날아들었는지 모를 더 큰 나무에게 밀려 자리를 빼앗기듯이 선희에게 자리를 내주는 일이 숙명이라 생각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잡초는 또 다른 황무지를 찾아 떠나가겠지만, 자리를 옮겨 뿌리를 내릴 땐 잡초는 탈바꿈을 해 나무인 척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일 것이란 생각도 해 보았었다.
나무 밑에서 자라는 잡초가 그늘에 가려 끝내 죽더라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포박당한 자신을 비웃기도 해 보았다.
몇 달 집에 돈을 보내지 않고 다른 방을 얻어 나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다달이 보내 줬던 것을 중단한다는 것도 현실이 받아드릴 수 없는 난제이기도 했다.
태무와의 관계를 냉정하게 정리하고 지내려 해 보아도 이미 불장난이 얼마나 흥미롭고 짜릿한 것인 줄 알아버렸기에 몸이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애타는 날이 더 많은 걸 어찌 감당할지 몰라 비틀거리고 있다.
그는 이미 내 몸의 주인인 것이었다.
손길이 닿으면 타오르고, 달콤한 한마디에 열려버리는 자동문인 것이다.
꿈꾸는 계획은 화려한 불꽃을 터트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와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건 천국일 것이란 기대만 펼쳐져 있다.
상상은 언제나 그의 팔에 안긴 뜨거운 자신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려워한다.
그가 밀어내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녹는 듯 행복한데 그가 떠나 보이지 않는 날이 계속되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흐르지 조차 못하는 눈물을 삼킨 날들이 애처롭다.
더러 치근덕거리는 남자직원도 있지만 질겁하며 달아나 버리는 애순을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자를 저리 무서워하니 평생 시집도 못 갈 순진한 여자란 것이다.
행여 태무가 알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으로 화들짝 놀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생각해볼 필요는 없다.
방금 떠난 그가 그리워, 그리운 만큼 빨리 걷고 있을 따름이다.
이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온 것 같다.
멈춰 서서 뒤 돌아 보니, 그를 집어 삼킨 서울 역의 둥근 지붕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오니, 그래 집엔 별 일 없던?”
“예, 다들 잘 있던데요.”
애순이 들어오는 길에 오징어 한 죽을 사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냥 오지 않고, 왜 돈을 팔아 오니?”
“요즘 좋은 것이 없어서 별로 좋지 않다고 하시데요.”
배오징어를 사 보내는 시골물건이 아니라서 금방 알아 볼 것이라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서울에도 많을 걸 때마다 사 보내니, 앞으로는 그냥 빈손으로 와라, 한 푼이라도 아껴야 애들 치다꺼리를 하지.”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고맙다고 인사드리라 하시데요.”
“네가 어디 우리 집에서 공밥 먹니, 이제 너하고 나 둘 뿐이니 집이 썰렁해서 너 시집 가버리면 어떻게 사니?”
“아이, 어머니도 제가 시집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벌써 시집은 무슨 시집이에요.”
“야야, 지금가도 빠른 건 아니다, 그러다 처녀 귀신 되려고 그러니?”
뒤따라오면서 말을 시키는 태무 어머니를 피해 급히 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식사 하셨어요? 옷 갈아입고 나가서 얼른 준비 해 드릴 게요.”
문 밖에까지 들리라고 목소리를 높여 말하면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는 애순은 집안이 썰렁하단 말을 되새겨보면서 움찔 몸을 떤다.
“어머니 방 하나 세 놓으면 어떻겠어요, 집도 봐 주고요?”
“그런 말마라, 근본도 모르는 사람들 들여 놨다가 욕 본집이 많더라,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처녀들만 사는 사람들은 괜찮지 않을까요?”
“요새 젊은 것들은 사내들 끌어들인다 하더라, 어디 너만큼 착실한 애들이 있다더냐?”
가슴이 찔끔한다.
“어머니도 참, 착실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면 신혼 살림하는 사람들은 어떻고요?”
“그러다 금방 애라도 낳으면 애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어떻게 살게, 살다 낳으면 나갈랄 수도 없고, 나는 밤에 우는 애 울음소리 시끄러운 건 못 참겠더라.”
“그러면, 큰 오빠네 들어오는 것은 어데요?”
“아, 글쎄 그것들이 안 들어온다고 버티는구나, 괘씸한 것들 어디 두고 보라지.”
“왜요, 들어오시면 좋을 텐데요.”
“큰 애가 장가를 잘못가서 그 모양 아니냐, 마누라 말이라면 끔뻑 죽는구나, 글쎄.”
“그럼 별수 없이 제가 처녀 귀신 돼야겠네요.”
“야, 그런 말마라, 나 때문에 시집 못 갔다고 얼마나 원망하려고 그러니, 너만 한 며느리 깜이 어디 쉽게 있니?”
“저 같은 것이 뭐 볼 것 있다고요?”
“인물 반반하겠다, 손끝 맵고, 공부도 남 보다 더 했겠다, 어른 공경 잘 하겠다, 부족한 게 뭐 있냐? 친정이 좀 어려운 게 험이라면 험이지, 그만하면 됐지.”
애순이 옷을 꿰 입다말고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을 못하고 멍청하게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