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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약삭빠른 집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영리하게 자기 앞가림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살림을 도맡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집사는 주인의 살림을 충실하게 꾸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낭비를 일삼았습니다. 주인은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에게서 집사 직위를 박탈합니다. 집사는 자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미리 대비를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주인은 영리한 그의 대처를 칭찬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도 쫓겨나기 직전인 이 집사처럼 자신의 앞을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는 자신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고 무늬만 신앙인 노릇을 하였다면, 이제부터라도 삶을 바꾸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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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잔머리를 굴립니다. 자신의 부정이 들통 날 것을 대비해 문서를 조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칭찬합니다. 하지만 잘못을 덮어 주는 칭찬이 아닙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는 준비성을 칭찬한 것입니다. 복음의 교훈은 단순합니다. 세상일에는 이렇듯 준비하면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는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합니다. 토끼는 자신만만합니다. 느린 거북이를 경주 상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북이가 이깁니다. 빨리 가던 토끼가 도중에 잠을 잤기 때문입니다. 그새 거북이가 추월했던 것이지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솝 우화입니다.
누가 주인공이겠습니까?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토끼라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습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토끼는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천재들입니다. 거북이처럼 ‘끈기 있게’ 걷는 이가 늘 성공하게 마련입니다.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도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 쉽게 포기합니다. 참을 수 있는 상황이건만 불평부터 쏟아 냅니다.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화를 내어 분위기를 흐립니다. 언제라도 은총은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하늘의 힘은 조용하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 우는 것은 ‘삼류’입니다. 참는 것은 ‘이류’입니다. ‘일류’는 웃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웃습니다.
어렸을 때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서 잔디밭을 샅샅이 뒤졌던 기억이 납니다. 나폴레옹의 일화가 워낙 유명해서 그럴까요? 정말로 네잎클로버만 있으면 제게 커다란 행운이 찾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들도 이러한 행운을 생각하는 듯 평범한 세잎클로버보다는 찾기 힘든 네잎클로버를 더욱 더 선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흥미 있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잎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이지요. 네잎클로버는 ‘행운’, 세잎클로버는 ‘행복’.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행운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만이 주는 것이 아님을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예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커다란 행운을 얻었지만, 이들 중 많은 이들의 말로는 결국 불행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즉, 타락과 방탕한 생활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얼마 전 네잎클로버가 원자력발전소 근처에 갑자기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잎클로버가 정상일까요? 아니지요. 물론 발전소 자체의 안전상 문제는 없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아 기형적인 형태의 네잎클로버가 나오게 된 것이고 따라서 결코 이것이 꼭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운과 행복 역시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평범한 곳에서 세잎클로버가 나오는 것처럼, 행복 역시 우리의 정상적인 평범한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이렇게 평범한 곳에 있는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특별하게 보이는 행운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행운은 마치 원자력발전소 옆에서 자라는 네잎클로버처럼 건강하지 못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즉,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는 주인의 모습이지요. 이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고, 이 사실을 주인에게 들켜서 결국 쫓겨나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깎아줍니다. 횡령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히려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 이유는 영리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집사처럼 올바르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기 앞가림을 위해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집사가 쫓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행운만을 기대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하고 비참하게 쫓겨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칭찬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렇게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할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가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나의 구원을 위해 어떤 앞가림을 해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때 행운이 아닌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행복은 불행의 원천을 아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
심판과 준비?
-정희완 신부-
우리 생의 끝날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이승의 삶에서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얄팍한 계산이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삶의 끝에 비정한 심판이 있으리라고는 왠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이승의 생이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조금은 슬퍼지고 허망함을 느끼며, 동시에 삶에
대해 진지해지고 자신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고 싶어지는데, 심판이라는 그 무서운 단어를 굳이 연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생애의 끝, 그 자체가 심판이 아닌지. 이 이승의 삶을 무한정 사는 것이 아니라 눈물 같은 청춘을 흘려 보내야만 하고, 쓸쓸히 노년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 자체가 이미 하나의
심판이 아닌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가는 우리 생을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 서러움인데, 또한 때때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서러움인데, 생이 끝나는 날
냉정한 심판이 있다고 왠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이승의 삶이 다하는 날,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것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숱한 죄와 못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실 거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과 희망 때문에
지금 여기서 그분과 함께하는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신앙의 신비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지혜롭게
- 황영준 신부-
어떤 형제님이 성당 바로 앞에 살고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그 형제에게 선교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님이 스스로 성당에 나와 예비자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부님이 “우리 교우들이 찾아가 성당에 나오라고 할 때는 안 나오시더니 갑자기 무슨 이유로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까 ?”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님 왈 “세례 받으면 성당 마당에 내 차를 편하게 주차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가끔 보면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장사가 좀 될까 해서 성당 바로 근처에 가게를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면 이 성당 신자들이 우리 집을 많이 이용해 주겠지.’ 하는 바람이 살짝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니 감사할 일이고 축하할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때로는 잔머리도 쓰고 편법도 쓰면서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 신앙인들도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 천국에 못 가면 어떻게 하지 ? 나의 이런 모습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 오늘 내가 천국에 들기 위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
우리 모두 조금 더 지혜롭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대로 어영부영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주님 보시기에 영리한 삶을 살면 정말 좋겠습니다
선심장이들
-김찬선신부-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더 중요한 집사의 덕목은 무엇인가?
주인에 대한 충성인가, 영리함인가?
물론 주인에 대한 충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집사가 직책에서 잘리는 이유도
직무에 충실하지 않고 주인에게 불충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집사의 영리함을 칭찬합니다.
어떤 뜻이 이 비유에 담겨있는 것일까요?
영리(怜悧)함은 슬기 또는 지혜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슬기 또는 지혜가 덕과 관련이 있다면
영리함은 눈치를 잘 살펴 자기 이익에 해가 되는 짓은 안 하고
유익한 것은 가려 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남에게 선심을 쓰는 것은
집사 입장에서는 매우 영리한 것이지요.
그러나 주인 입장에서는 사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집사를 칭찬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 것을 가지고 선심을 팍팍 쓰라는 뜻이지요.
여기에는 우리의 모든 것은 어차피 하느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어 하신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인 양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잘못이고 심지어 어리석음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인 양 움켜지고 있지 않고
주인의 다른 종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집사의 영리함입니다.
집사란 주인이 아니고 종이며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을 관리하는 대표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프란치스코의 일화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주지 않고 자기나 형제들이 가지고 있으면
하느님의 것을 가로챈 것이기에 도둑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나타나면 뭐라도 줬고
심지어 수도원의 유일한 신약성경마저 줘버렸습니다.
성경이 주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식사 때가 되자 포도를 그냥 따 먹었습니다.
그러다 주인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같이 따먹었지만 붙잡히지 않은 형제에게 길을 가는 내내
맛세오 형제는 잘 먹었네, 그러나
프란치스코 형제는 잘 얻어터졌네 하며 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포도를 따 먹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남의 것을 가지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주인이 하느님의 것이기에
우리가 농담 삼아 얘기하듯 그것은 위치이동일 뿐입니다.
그래도 두들겨 맞은 이유는 포도밭 주인이
사실은 관리인일 뿐인데 자기가 관리인이 아니고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맞은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것인 우리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선심장이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도 없다
-김찬선신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필리피서 3,18-20)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 성당에는
십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면에 매달려있습니다.
처음 그것을 설치할 때 지금은 돌아가신 수사님께서
그것은 제대로 된 십자가가 아니니
떼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를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상 숭배가 아니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떨어질 수 없게 못 박히시어
그리스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껴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을 수 없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한탄하듯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원수로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껴안았을 때 체험한 것이 이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원수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나환자를 너무도 싫어하여 만날까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환자 마을을 지날 때는 2마일이나 돌아서,
그것도 얼굴을 돌리고 코를 막고 피해갔습니다.
어느 날 피할 수 없는 외길에서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데
이때 프란치스코는 기도를 하고는 용기를 내어
자기가 거부하고 피하던 나환자를 다가가 껴안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니 나환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환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이 바로,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내가 싫어하는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계신 곳이라는 것.
싫다고 십자가를 거부하면
거기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된다는 것.
십자가를 거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도저히 만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이후의 프란치스코의 삶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느라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삶,
수난의 그리스도를 묵상하느라 골짜기를 한 숨으로 메운 삶입니다.
말년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고
그 결과로 오상을 받게 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승리의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껴안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 그리스도는 주어지는 것이지 나의 선택과 성취가 아닙니다.
나에게 가능한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인 우리의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독서> : 하늘나라의 시민인 우리
-경규봉 신부-
하느님을 믿고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무런 유혹이나 어려움도 모두 없어지고 행복과 기쁨만이 넘치는 삶이 시작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할지라도 모두가 다 하느님을 믿고 살지 않을까?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여 어려움이나 시련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여전히 고통과 악이 존재하고, 악마는 여전히 우리를 악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악마의 유혹과 싸워 이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에게 자신과 동료들을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자신들의 삶을 배우도록 권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다. 그들은 육신의 욕망에 빠져 그리스도를 거부한다. 그들은 육체의 정욕대로 살며(로마 16,18; 1고린 6,13;)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부도덕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즐긴다(에페 5,12). 그들은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며 산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비록 외국인이나 나그네처럼 살지만 하늘나라에 소속된 시민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합당한 모든 책임과 의무를 기뻐하여야 한다. 신자들은 하늘나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며 진정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로마 8,21-23).
주님께서는 재림하시어 신자들을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실 것이다. 신자들의 죄짓기 쉬운 연약한 몸을 썩지 않는 영광의 몸이며 영적인 몸(1고린 15,42-44)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신자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며, 유혹과 시련을 당한다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악한 이들의 교설에 흔들리지 말고 굳세게 살아가자고 권고한다.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악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셨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셨을 때, 악마는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에서도(마태 26,38)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하고 기도하시면서 오직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셨다. 십자가상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하고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변화시켜주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현세의 어려움과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이겨내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마르 9,23)..............◆
어떤 형제님께서 동물원 구경을 갔습니다. 그리고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를 보고 있는데 글쎄 눈에 티가 들어간 것입니다. 얼른 눈을 비볐지요. 바로 그 순간 우리 속의 원숭이가 느닷없이 이 형제님의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형제님은 관리인을 찾아가서 원숭이가 감히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때릴 수 있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관리인은 “원숭이는 웬만하면 사람을 때리지 않는데 무슨 행동을 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형제님은 “저는 원숭이의 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에 티가 들어가 눈을 비빈 것 외에는 없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맞을 만하네요. 눈을 비비는 것은 원숭이에게 ‘바보’라는 욕이거든요.”라고 말해줍니다.
기분이 나빴지만 원숭이에게 욕이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요. 그래서 다시 원숭이 우리로 가서 원숭이를 째려만 볼 뿐이었습니다. 그때 바람이 휙 불어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려 해서 급히 모자를 손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원숭이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로 그 순간, 이 형제님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자신의 뺨을 살짝 때렸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는 똑같이 자신의 뺨을 살짝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님은 웃으며 다시 자신의 뺨을 조금 더 세게 때렸지요. 원숭이도 더 세게 자신의 뺨을 칩니다.
형제님은 드디어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넌 이제 죽었다.’하고는 전봇대를 향해서 돌진했지요. 너무 세게 부딪혀서 아팠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를 따라 할 원숭이를 상상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원숭이는 눈을 비비고 있었답니다.
아마 이 형제님보다 원숭이가 더 똑똑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 형제님도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고 말았으며, 이 행동은 절대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혜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 복음을 바라보지요.
솔직히 오늘 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인데, 부당하게 주인의 재산을 빼돌리다 들통이 난 집사는 쫓겨나기 직전에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기로 결심하지요. 즉, 빚진 사람들을 불러 자기 직권으로 빚을 깎아줍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집사에게 더 큰 벌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칭찬합니다. 이렇게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는 주인을 이해하기 쉽습니까?
그렇다면 이 집사처럼 불의하게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곧 일어날 일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단호하고 지혜로운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자포자기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 ‘너 죽고 나 죽자’ 라는 심정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 등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기를 살리는 것은 물론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 행동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행동임을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진정한 용기란 모든 사람 앞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하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돈이 되는 일이라면 …
- 장동현 신부-
고장 난 휴대전화를 고치러 수리점에 갔습니다. 입구에서 도우미가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창구 직원은 벌떡 일어나 접수를 돕습니다. 주말 동안 얼마나 불편하셨냐면서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과 어투로 저를 대합니다. 극진한 서비스를 받고 며칠 후 전화기 회사에서 수리점에 대한 고객만족도를 조사하기 위한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매우 만족’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답을 하며 갑자기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토록 친절하게 대하던 사람들이 자기 가족한테도 그렇게 친절할까? 동료 사이에서도 그렇게 상냥하고 공감 넘치는 대화가 오고 갈까? 그 회사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매우 만족’하며 지내고 있을까? 그 회사는 종업원들을 고객 대하듯 대할까?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만일 아니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또 궁금해졌습니다. 이른바 ‘고객감동 경영’의 일환으로 손님을 상대하는 상술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사의 정직하지 않은 모습을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세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애를 많이 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천상의 보상을 얻기 위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은 너희가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며 우리를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일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노력, 이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크게 자리하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을 위해 쏟아붓는 희생과 노력에 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봉헌이 너무 작아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집 집사들!
-김찬선신부-
약삭빠르다는 말과 영리하다는 말이 저에게는
같은 말인 것 같으면서도 어감에 있어서 꽤 다릅니다.
약삭빠르다는 말은 자기 이득을 취하는데 있어서 계산이 빠르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을 일컫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반해
영리하다는 말은 지혜와 같이 덕 면에서 무엇을 잘 아는 것과 달리
지능 면에서 머리 회전이 빠르다는 일반적인 뜻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가 보기에 약삭빠른 집사를
주님께서는 영리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말하자면 회사 돈을 횡령하여 좋은 일 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적으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앙으로 보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셔서 얻어가지게 된 것이고,
그래서 모든 것은 어차피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고,
어차피 하느님의 것을 내 것인 양 주는데 인색하면
그것도 멍청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것을
내 것인 양 움켜쥐고 있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당신 것을 활수하게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어차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다른 자녀에게
인심 팍팍 쓰며 활수하게 나눠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 재산의 관리자인 하느님 집 집사가 할 일이고
이것을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이 영리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집의 집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영리한 집사처럼
당신 집의 영리한 집사가 되라고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같은 북한 돕기를 하는 단체로부터 도움 요청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북한을 돕기 때문에
지금 우리 정부의 불허로 북한 돕기가 중단된 상태인데
그곳은 국제적인 연결망이 있어서 지금도 돕기가 가능합니다.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
‘남북 관계가 재개되면 우리도 쓸 데가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즉시 오늘 복음이 생각났습니다.
아직 다른 형제들과 회원들과 의논을 하지 않았지만
제 생각에 오늘 복음의 정신에 따라
그 단체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한우리’가 주님의 사업이라면
그 단체도 주님의 사업이고,
그 단체의 기금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우리 한우리의 기금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활수하게 도와야 합니다.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영리하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
-전삼용신부-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하면 좋은 곳에 취직하고 나중에 사업을 하더라도 유리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처음 경제에 대해 배울 때는 잘 몰랐지만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사람을 잘 이용해야 된다는 것 등을 배울 때는 약간 거부감이 왔습니다. 다른 학과 학생들이 오죽하면 경영학과를 ‘사기과’로 부를 지경이었습니다. 사람 등쳐먹는 학문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편견이긴 하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이용한다...’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증가하는 만큼 세속에서 돈을 벌기 위한 학문엔 진력이 났습니다. 특별히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엔 더 이상 내가 계속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이용당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존중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어 갈수록 세상에서 돈 벌어 부자 되는 것과는 멀어지나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장사를 하셨다면 아마 다 말아먹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퍼 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가장 세속적인 유다에게 재정 관리를 맡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집사가 아주 나쁜 사람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이라도 또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일일 지라도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베풀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이면서도 결국 주인에게 칭찬받으면서 이야기가 끝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엔 부자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종이 나오는데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주인의 돈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렇게라도 공을 쌓아 놓아야 나중에 쫓겨났을 때 그들로부터 무엇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속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는 주인으로부터도 일을 빨리 처리했다고 칭찬까지 받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으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며 자신을 위해 욕심내서 지니고만 있지 말고 그것을 약삭빠른 종처럼 이용해서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물론 남모르게 보답 받지 못할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지만,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보답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라도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W'라는 프로에서 아프리카 어느 곳의 물이 오염되어 동물들의 변과 죽은 동물들이 썩어가는 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에 의해 사망하거나 병이 들어 고생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곳의 6인 가족이 한 달 동안 마실 물을 정수할 수 있는 정수약은 한 달에 3000원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 프로그램에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기아 인구 8억 5천만 명, 기아로 하루 10만 명 사망, 오염된 식수를 마시는 인구 11억 명, 5살 전에 굶어 죽는 어린이 한해 6백만 명, 어린이가 아닌 노동자로 사는 아이들 2억 5천만 명, 30초마다 말라리아로 어린이 한 명 사망,
500원은 방글라데시 어린이의 한 끼, 아프리카 한 가족의 하루 식사, 1명의 아프리카 어린이를 살리는 말라리아 예방 주사, 아프리카 어린이의 6명의 실명을 막을 수 있는 돈, 그리고 1,500원은 케냐 어린이 한 명의 한 달 학비. 지금, 누군가에게 기적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프.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리암니슨 분)는 폴란드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합니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됩니다. 인건비 한 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Itzhak Stern: 벤 킹슬리 분)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스턴은 쉰들러의 이기주의와 양심을 흔들어 놓게 됩니다. 쉰들러도 자신의 눈을 통해 나치의 살인 행위들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들 일명 '쉰들러의 유태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프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태인 명단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됩니다.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을 바쳐 그렇게 많은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해냈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사업 실패만 하다 돈도 제대로 만져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살았던 많은 유태인의 후손들이 아직도 그의 무덤에 찾아와 꽃을 놓으며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유태인들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으로 데려갈 때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차와 시계와 반지들을 팔았으면 수십 명은 더 살렸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이미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쳤지만 완전히 바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부정하게 돈을 모았건,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했건 하늘나라에는 좋은 일을 한 것은 잊히지 않고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자녀였다가 재물을 이웃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결국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한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묵상을 하다가 문득 신학생 때 등산 갔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월악산 겨울 등산이었지요. 선후배들간의 친목을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힘들었습니다. 사실 ‘악’자 들어가는 산을 오를 때 정말로 ‘악’ 소리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힘들게 산을 올라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정상에 도착한 지 30초도 되지 않았는데, 선배가 이제 내려가자고 합니다. 저희는 이야기했지요. 산 정상까지 왔는데, 얼마나 여기에 머물렀다고 벌써 내려가냐고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서 경치도 보면서 즐기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이 다 똑같지 뭐. 볼 것이 뭐 있다고 그래? 얼른 내려가서 시원하게 목욕이나 하자.”
하늘같은 선배의 말인데 어떻게 어깁니까? 결국 저희는 3시간을 힘들게 오른 정상을 단 30초도 머물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산을 즐기지 못하는 이 선배님의 모습이 오늘 떠올려지면서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삶을 즐기지 못하는 이유를 조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감탄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본당 마당에서 어떤 꼬마아이가 저를 아주 급하게 부릅니다. 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얼른 다가갔지요.
“신부님, 여기 개미가 있어요. 와~~”
얼마나 흔한 개미입니까? 그런데 이 꼬마는 겨우 이 개미 한 마리를 보고는 감탄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도 감탄을 느끼는 사람은 어떨까요? 삶 전체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삶을 마련해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탄을 잊어버렸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값이나 주식이 오르면 ‘와~~’하고 감탄할지 모르겠지만, 일상의 삶 안에서 감탄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이제 주님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감탄하는 연습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밥상을 보고서 ‘와’, 책을 읽으면서도 ‘와’, 나무, 풀 들을 바라보며 ‘와’라고 외치는 감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약은 집사에 대한 비유말씀입니다. 재산을 낭비한 소문을 들은 주인이 집사를 쫓아내려고 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집사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를 대비해서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집사가 나중에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와~~’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조건적인 벌을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악하다는 판단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노력한 그 정성을 칭찬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집사를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우리들의 관점과 생각들을 바꾸면서 생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세상의 관점에 맞추어 살기보다는 ‘와’라는 감탄사를 내던지면서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집사가 칭찬받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와’라는 감탄사를 많이 뱉어보세요.
믿음
- 이재성 수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칭찬을 받을 만큼 아주 영리하고
지혜로운 처신이란 무엇일까요? 살면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의 심판까지도 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처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에 그러한 것이 없다면, 큰 비극입니다. 말하자면 나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밖에 안 됩니다. 지혜롭고 영리한 처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셨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벌을
십자가 위에서 다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곧 구원이요, 이 믿음이야말로 신묘한 영약입니다.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아주 재빠르고 슬기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합니다.
아주 약간의 여유와 삶의 지혜가
-김은배 수녀-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병원은 규모는 작지만 독립형 호스피스 병동입니다.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지만 환자가 우선이고 청결해야 합니다. 또한 저에겐 환자의 전인적 치료가 우선이며 늘 환자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삶의 지향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고 간호하시는 선생님들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호사들의 작은 실수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고 그때마다 잔소리를 했습니다. 어느 병원과도 비교되는 것이 싫었기에 잔소리 뿐 아니라 제가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늘 붙어 있어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간호사가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저는 한 치의 양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호사들은 제 요구에 불만이 커져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환자한테 쏟았던 정성을 반만이라도 직원들에게 쏟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저에게 작은 여유와 삶의 지혜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 같이 일하던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했던 것입니다. 이제야 마음 아프게 했던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용서를 청합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많지만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곳에서만이 저를 통한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에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소속된 수도회의 영성이며 제가 살아가야 할 몫입니다. 골고타! 그곳이 제 삶의 최종 목표이고 제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지금 늦었다고 하는 그 순간이 바로 가장 좋은 시작의 때
-김윤태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을 한번씩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1년을 보면 1달이 부족하고, 한달을 보면 하루가 부족하며, 하루를 보면 1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항상 미리 준비한다고 하지만 늘 부족함을 느끼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위로이요 가장 현명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지금 늦었다고 하는 그 순간이 바로 가장 좋은 시작의 때"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분명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그냥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혹시 이웃이 잘 준비하고 있지 않거나 모르거나 하지 않고 있다면 분명 가르쳐 주고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 부모님, 이웃, 친구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도 어떤 방법으로던지 우리가 차지하게 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잘 준비하라 하십니다. 나아가 아직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잘 알려주라 하십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알려 주라 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복음전파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전해 듣는 사람이나 예외 없이 모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음을 강조하시고 어떻게 해서든지 꼭 들어가야 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늘나라 티켓을 돈으로 살 수 있거나, 누군가에게 유산이나 양도받을 수 있는 증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함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면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항상 준비한다는데 어떻게 준비해야 될까요. 우리가 가끔 듣는 이야기 이 세상의 종말이 내일 온다면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할 것입니까라는 말에 우리는 쉽게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피노자의 이야기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을 가장 평범하게 떠올리고 혹은 말하곤 합니다.
우리도 어떻게 살면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스님의 생활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무소유와 천진한 성품으로 유명한 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스님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주변의 땅을 일구고 경작을 하며 일하는 스님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 스님은 몇 십년을 모아서 마침내는 논 열 마지기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마지기의 논을 모두 팔아 버린 스님은 그 돈을 모두 투자하여 산등성이를 사서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땅에 돌이 얼마나 많았던지 땅을 파고 돌을 캐어 둑을 쌓는데 많은 돈이 들게 되어 열 마지기를 판돈으로 겨우 다섯 마지기의 논밖에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아주 기뻐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해는 참으로 좋은 해로군요. 논을 다섯 마지기나 장만하였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다섯 마지기를 잃어버리고도 그런 말을 하는 스님을 보고 한 젊은 제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스님도 참 딱하십니다. 논 다섯 마지기를 손해 보신 것이지 어떻게 다섯 마지기를 번 것입니까?" "어허! 그게 무슨 말이오? 처음의 열 마지기를 저 아랫마을 김서방이 사서 잘 짓고 있으니 좋은 일이고, 산등성이에 있는 다섯 마지기의 논은 새로 얻은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처럼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한 삶이나,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스님처럼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것만을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에서 우리 모두의 것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는 보입니다.
우리에게 보여지거나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필요성을 느낍니다. 때론 필요성이 우리를 보게하기도 합니다. 이 두가지의 것을 잘 활용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와지고 끊임없이 새로움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티켓을 구입하는 것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며, 예수님의 유언처럼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새벽을 열며
우리가 함께 나눌만한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1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고시생이나 고3 수험생들, 군인병사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달 이른 아이를 낳은 산모를 찾아가보세요.
한 주의 가치는 신문편집자들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한 시간의 가치가 궁금하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일 분의 가치는 금방 열차를 놓쳐버린 사람에게,
일 초의 가치는 아찔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천 분의 일 초의 소중함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문 육상 선수들에게 물어보세요.
이 글을 보는 순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시간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순간이라는 시간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인간은 누구나 다 ‘백만장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있으면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100만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즉, 잠자는 시간, 텔레비전을 보면서 잡담하는 시간,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 옷 입으면서 보내는 시간 등등을 다 빼고 나면 일생에서 겨우 100만분 정도만 자기만의 시간으로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얼마나 의미 있게 쓰고 있을까요?
자기만의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정한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순간’이라는 찰나의 시간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하자 그 주인은 집사 일을 청산하라고 명령을 하지요. 이에 집사는 집사 일을 그만두었을 때, 자신을 자기 집에 맞아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기 위해서 빚진 사람들의 빚을 깎아주기 시작합니다. 이런 행동이 주인에게 도움이 될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지요. 그런데도 주인은 이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불의한 집사를 오히려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의한 일도 서슴지 말고 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정직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자기를 위해서는 불의하게 살 수 있다는 일까요?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칭찬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에 대해서 곧바로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제 쫓겨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면 그는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했고, 그리고 곧바로 실천했지요.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영리함을 요구하십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지금 당장 곧바로 해야 할 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어영부영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순간을 사랑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집사의 영리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의함만 배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한 집사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내게 주신 ‘지금’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보세요.
시간 약속을 잘 지킵시다.
빠다킹신부
선심 쓰면서 살아갑시다
-장재봉 신부-
‘영민한 집사’를 생각하는데 뜬금없이 다윗왕의 고백이 떠오릅니다(1역대 29,14 참조).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것 가운데 과연 내 것이 무엇입니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과 쉼 없이 뛰고 있는 맥박조차 내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물며 세상의 재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꼭 한 가지 내가 원하는 바대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 있지요. 말 그대로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그것, 바로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잇속에 밝은 집사는 솔직히 고약합니다. 주인이 빌려주고 받아 놓은 빚 문서를 조작해서 그 대가로 훗날 대접을 받으려는 심보이니까요. 착하신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셨을까 싶을 정도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을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느님께서는 모자람이 전혀 없으신 헤아릴 수 없는 재산가이십니다. 그렇게 부자 아버지 재산인데 푹푹 좀 나눠 쓰면 어떻겠습니까? 하느님 것으로 선심 쓰는 일, 얼마나 신나는지 해본 사람은 압니다.
갖은 재주. 갖은 꾀
-김희자 수녀-
루카 복음사가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재물 사용에 관한 해답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신다. 아마도 재산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첫째 괴로움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인 것 같다.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집사도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라고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중동 지역에서는 위신이나 명예를 음식이나 생명 자체보다 더 중요시한다고 한다.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집사는 매우 난감한 처지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놀라운 행동을 실행한다. 후에 집사의 자리에서 쫓겨나더라도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빚을 처리하는 데 놀라운 수완을 보여준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는 집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신생활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는지 살펴봐야겠다.
한편 이 비유는 우리가 빚을 질 때 자신을 얼마나 잘 대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집사가 한 일을 다 알고서도 칭찬한 주인처럼 말이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빚이 생겨도 좀더 잘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속세의 재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다룬다면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좋은 가치, 이를테면 영적 은사나 교회 안의 사명을 맡겨주실 것이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재물을 다루는 데 하느님은 ‘섬겨야 할 분’이시고, 재물은 좋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대원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이상윤 신부 -
상식적으로 오늘 복음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불의한 집사의 행동에 대해 부자의 행동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부자의 재산을 낭비를 하여 집사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 하는데, 집사는 그 자리에서 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임의로 부자의 재산을 처분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자신의 집사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풀이하기에 앞서 간략하게 핵심을 이야기하자면 주인의 재산을 농락한 집사를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세속적인 것, 즉 돈밖에 모른다고 지탄받는 세속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팔아서라도 사람을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주제는 자신의 죄와 잘못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Lk 16, 1).’ 이미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소외받고, 가난한 이, 죄 많은 이 모두를 사랑하고 계심을 용서하고 계심을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이후에 제자들에게 약은 집사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죄를 바라보기 보다는 죄인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Lk 16, 1)’ 부자를 주님으로 집사를 우리로 생각해봅시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사랑이라는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나눌 생각을 하지 않고 함부로 탕진하고 훼손시켰습니다.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함부로 탕진하고 훼손시켰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말로 기회를 한번 더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는 약은 집사의 모습처럼 우리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기 보다는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방법을 찾습니다. 이 집사의 독백은 바로 우리의 독백인데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죄인의 옷을 뒤집어 쓴 채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잘못을 반성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모든 것을 올바르게 행하고 모든 계명을, 특히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빈틈없이 지키기 위하여 치열하게 살 것인지, 아니면 주님께 지은 빚을 갚거나 수치심에 빠져 살아가기 보다는 이 빚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기회로 삼을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살핌 속에서 주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지도 함께 살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집사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인 주님께 지은 빚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기회로 삼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바로 그것은 주님의 자비하심 안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나 자신의 죄에 묶여 비참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그 죄를 딛고 더욱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바로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서 친히 사셨던 모습이기에 더욱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백년도 우리 살지 못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와 결론은 꽤 아리송합니다. 그래서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공금횡령을 일삼다 그간의 비리가 탄로가 나 ‘짤리게’ 된 집사가 있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를 생각해보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집사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업무를 인수하는 그 틈을 이용해서 또 다른 비리를 저지릅니다. 이번에는 공문서위조입니다. 빚진 사람들을 한명 한 명 불러들여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줍니다.
공금횡령에다 공문서위조, 직무태만, 직권남용...오늘날로 치면 손 크고 간 큰 경제사범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습니다. 주인은 이런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고 칭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퇴직 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한 집사의 노력, 그 이상으로 우리 영혼의 미래를 준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현세적 안녕, 육체적 무사함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건강과 미(美), 레저문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두입니다.
S라인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투자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음식 제대로 하는 식당이 있다면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보다 한 차원 높은 고려대상인 영혼을 위한 투자는 어떠합니까?
인간은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영(靈)과 육(肉)으로 구성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요즘 너무 육체에만 투자하고 육적인 생활에만 올인하다보니 우리의 영적생활이 너무도 무뎌져 있습니다. 영혼에 대한 의식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자신 안에 영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 에너지와 능력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의 투자나 계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영은 다 빠져나가고 육만 홀로 남게 된 것입니다. 허깨비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점점 남루해져만 가는 육신의 옷을 부여잡고 발버둥치지만 세월 앞에 아무도 장사가 없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백년도 우리 살지 못하고 언젠가 모두 내려놓고 떠나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단지 육신만을 위한 올인, 그것은 정녕 영양가 없는 투자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이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영혼입니다.
그때 우리를 든든하게 해줄 보루는 그간 아까운 돈 들여 매달 부어왔던 각종 생명 보험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그 동안 주력했던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 생활의 결실인 나눔과 베품의 삶입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거부하지만 죽음은 어느새 우리 곁에 친구처럼 내려와 앉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눈앞의 삶, 육체적 삶에만 혈안이 되어왔던 지난날을 절절이 뉘우치며 크게 가슴 칠 것입니다.
약삭빠른 청지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은 꾀많고 교활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노예이긴 했지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것을 알고 그 사람을 파면 시키려고 하자 그 관리인은 자기가 그 직책에서 쫓겨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일자리가 떨어지게 됐을 때 그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러한 능력있는 직책을 맞고 있는 동안 최소한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 그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주인은 그의 약삭빠른 행동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속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할짓, 못할짓을 다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의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어떤 중공사람의 생활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생활의 유형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공사람은 극장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관리인이었는데, 그는 그 입장권을 잘 이용하여 많은 친구를 갖게되고 아쉬울것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빵집에 가서 빵을 먹을 수 있었고 고급식당에 가서 값비싼 음식도 무료로 먹을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역시 중공이라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유형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마다 서로를 필요로하고 협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맡고 있는 직분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남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과 재산은 가지고 많은 친구를 만든다는것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현명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물질과 재산을 받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함으로써 영신적인 이익을 구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자선행위,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많은 친구를 만들수 있고 또 그것은 어느날엔가 저 세상에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각자 갖고 있는 직책과 재산을 유용하게 이용함으로써 영신적 이익을 얻도록 힘씁시다. 아멘.
-이기양 신부-
성서를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대목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대목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청지기는 아주 교활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꽤 많은 횡령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하자 다시 잔머리를 굴리며 술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빚진 사람을 불러서 그 액수를 고쳐주며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하지요. 빚진 사람들은 좋아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청지기나 빚진 사람이나 교활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히려 이 사실을 모르는 주인에게 일을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비윤리적인 일도 얕게 잘 처리하면 괜찮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지기가 윤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살 궁리를 어떻게 해나가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 청지기가 살기 위해서 세속적으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또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얕다고 하신 말씀에는 영적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이득이나 승진, 또 자녀 교육이나 재산 축적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또 밤과 낮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무슨 아파트 청약이 있다고 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줄을 서고, 무슨 유치원이 좋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텐트까지도 치고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은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쓰는 만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신앙에 있어서는 별 노력 없이 있어도 저절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시간이 흐르면, 또 주일미사에 빠지지만 않으면 내 신앙이 저절로 성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소한 것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옹졸한 삶을 살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노력한 그만큼 우리는 성장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서 쓰기>에 이어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참여하여 성서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일년이 지나서 하늘과 땅 차이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신심 서적 읽기 역시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성서를 쓰기 전에는 단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책 한 권에 지나지 않았던 성서가 이제는 살아 있는 책이 되어 깊이 있게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성서를 쓰느라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심 서적을 읽으면서도 놀라운 변화는 많았습니다.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어찌보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많은 분들의 높은 참여로 놀라운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신앙에 대해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꽉 채워진 느낌이라는 분, 이제야 신앙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 책을 통해 얻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정된 도서들을 이웃에게 선물로 전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있는가 하면 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 어디까지 기를 쓰고 내려가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이런 일은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관계되는 일은 놓치면 큰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 일은 나의 영적 생명에 있어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하듯이 하느님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도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면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마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품위가 다르고 지혜와 삶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듯이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도 부단히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밤 낮 없이 연구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듯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노력들 역시 우리의 삶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분명 하느님은 노력하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삶의 청산과 퇴출의 명(命)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일 처리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복음의 비유는 주인이 청지기의 약삭빠름과 부정직함을 탓하고 있기보다는 그의 슬기로움을 오히려 칭찬하는 내용으로 끝맺는다. 예수께서도 아마 주인과 같은 입장에서 부정직한 청지기를 칭찬하려 하신 것 같다. 다만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는 말씀은 빛의 자녀들이 이를 흉내내지 말 것을 바라시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청지기의 어떤 면이 칭찬 받을만한 지를 살펴보자.
비유는 어떤 부자가 고용한 청지기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낭비(횡령)한 것이 드러나, 청산(淸算) 후 퇴출(退出)을 강요받는다. 그 동안 재무관리로 의자생활에 습관이 되었을 청지기는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에 묘안을 생각해 내고 일사천리로 일을 해치운다. 묘안은 퇴출 후에도 자기를 후하게 대접해 줄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빚을 삭감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5-7절) 마지막에 가서 주인은 청지기의 이러한 일 처리를 보고 약삭빠른 줄은 알지만 그 슬기로움은 칭찬한다.
청지기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절묘한 방책을 마련한다. 청지기는 비록 부정직한 방법을 택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법을 동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청지기의 부정직하고 비양심적인 면은 덮어두고라도 그의 슬기로움은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할 줄 알고, 이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도 이 점을 칭찬하신 것이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가능하면 본받으라는 것이다. 임박한 심판 앞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걱정해야 한다. 그것도 영생(永生)을 판가름 짓는 심판이라면 그 절박함이 더욱 고조된다. 청지기가 당한 청산 후 퇴출이라는 실직(失職)의 위기처럼 최후의 심판을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회개(悔改, Metanoia)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이젠 머지않아 우리도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이 세상에서의 퇴출을 명(命) 받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의 삶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