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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묵상글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사랑이 배고픈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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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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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2022년 9월 21일 성 마태오 사도축일 강론글입니다.
성 마태오 사도 축일-사랑이 배고픈 사람
아시다시피 저는 식당을 하고 있는데 제가 식당을 하는 것이
돈을 벌 목적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사랑이라면
저의 식당이 필요한 사람은 배고픈 사람이고
제일 필요한 사람은 제일 배고픈 사람일 것입니다.
실제로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저의 식당을 찾지 않을 것이고,
돈이 많아 제일 맛있는 것을 찾는 사람은 저의 식당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의 식당은 음식값이 3천 원으로 싸고 가짓수도 세 개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에게 음식값이 싼 식당은 자기 체면에 어울리지 않고,
세 개뿐인 음식으로는 그의 입맛을 다 채울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태오 사도 축일에 왜 제 얘기를 길게 한 것일까요?
물론 마태오 사도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주님께서는 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시고
마태오 사도는 왜 주님을 따랐는지 얘기하기 위해섭니다.
주님께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신 것은, 그가 주님 사랑을 배고파했기 때문이고,
마태오 사도가 주님을 따른 것도, 그가 주님의 사랑을 배고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마태오 사도만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걸까요?
마태오 사도만 주님의 치유가 필요한 병자이고,
바리사이나 우린 치유가 필요 없는 사람인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병자임에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유 받으려고 하지 않듯
영혼의 병자 곧 죄인임에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사람은
그 영혼의 병을 치유 받으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과 용서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인식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의 인식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죄인이 아니라는 사람은 하느님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느낄 것이고,
그의 죄가 크든 작든 큰 죄인이라고 느낄 텐데
율법 앞에 있을 때 나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그러니 죄 없다고,
다른 사람 앞에 있을 때 나는 저 사람에 비해 죄 없다고 할 겁니다.
그러므로 병이 의사를 필요로 하고 만나게 하듯
우리의 병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고 만나게 하고
우리의 죄가 은총 곧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만나게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죄만 보고 주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음습한 죄 안으로 숨습니다.
이는 더러운 빨래를 빨지 않고 구석에 처박고 햇빛에 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자기 죄를 보았고 주님의 사랑을 봤으며 은총에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다른 죄인들도 주님께로 데리고 와서 나아가게 했습니다.
오늘 영성체 후 기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복된 마태오가 구세주를 집에 모시고 잔치를 열었듯이
오늘 저희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기뻐하오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도 마태오 사도처럼 주님 구원에 참여하고 있다면
우리의 집에서 구원의 잔치를 열어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우리와 함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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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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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의 끝에 남는 질문은 두 개다. 누구를 도왔나? 얼마나 배웠나?(찰스 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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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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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 는 확답을 들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시고,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로마13,8공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초대받았고,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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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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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태오 사도 축일입니다. 마태오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며 세례명을 마태오로 정하신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주님께서 마태오 사도를 보시고 바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미있게도 마태오 사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께서는 왜 마태오를 부르셨을까요? 특출난 능력이 있어서 그를 부르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움이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부르셨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맞습니다. 마태오 사도를 비롯해 수많은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필요하고 치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께 사랑과 치유 받은 사도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부족한 것이 없어서, 부유하거나 능력이 출중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사랑과 관심과 치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런 사랑과 치유로 우리 서로가 사랑이 되고 치유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오늘은 한 번 더 우리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가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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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할수록 맘에 안 듭니다.
벌써 그림 그리기를 배운 지 2년이 되어갑니다.
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 같은데
그리면 그릴수록 더 맘에 안 듭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그리고 자기 계발로 시작했습니다.
아주 작고 편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다 보니, 그리고 관심을 받다 보니 욕심이 생겼나 봅니다.
분명 늘었을 텐데….
욕심의 커짐이 실력보다 더 빨리 늘어난 듯합니다.
우리 삶에 이런 모습들은 자주 만나집니다.
욕심 때문에 자신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모습 말입니다.
분명 이런 모습은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가볍게, 다시 가볍게 붓을 잡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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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중심, 방향, 일치의 공동체-
저는 언제나 기상하면 만세칠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가장 좋은 기도, 만세칠창을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시작했으니 1년이 훨씬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후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들여다 본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통해 가르침을 배웁니다. 국제 가톨릭 학생 모임의 회원들을 만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정중에 있는 순례자들로서 주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에로 불림받고 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도 성 마태오가 주님께 불림받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당대 세리라 하면 죄인처럼 사람 취급 못받는 아주 무시당하던 신분이었습니다. 바로 세관에 앉아 있더 세리 마태오가 그런 신원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후 길을 가시던 길이신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갈망의 사람, 마태오를 첫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그의 과거나 신분이 아닌 그의 내면의 당신을 찾는 순수와 열정, 갈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마태오의 운명적, 축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정관념이 없고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고 실상의 본질을 직시하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런지요?
한두번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당대 제자들이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았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마태오이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또 주님께 부름 받은 세리 마태오는 “혼자”의 삶에서 “더불어”의 제자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께 불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포함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네 제자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참으로 바리사이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일뿐임을 까맣게 모른 무지한 바리사이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복음중의 복음이요 참 명쾌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며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격이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의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의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병없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요, 자비로운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말씀이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은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서로 좋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중심의 주님께 부단히 맞춰가며 각자의 책무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양성과 조화의 일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아름답고 성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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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아무도
보지 않는 이
그분
보시니
그 사람
참으로 있지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
그분
부르시니
그 사람
기꺼이 따르지요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이
그분
함께하시니
그 사람
끝까지 함께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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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는 망설이지 않었다
당신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실 참이던 주님께서는 세리였던 마태오를 기꺼이 선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마태오에게 배푸신 존중의 선물은 구원의 본보기입니다. 모든 죄인은 주님께 선택되어야만 하고, 신앙심과 경건한 마음만 지니고 있다면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마태오를 선텍하셨습니다. 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거룩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속 숨겨진 구석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마태오가 그의 지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신심때문에 주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고 하시자,그는 한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피조물이 하느님에게 들리는 찬양은 복에 대해 복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축복이야말로 인간 영혼의 작품이자, 창조의 걸작이다. 유대인 특유의 복의 신학에 대히여 베스터만이 지적한 것을 살펴보자.
“영혼”이라는 말은 인간의 총체적인 생존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혼은 힘으로 충만한 총체적 존재다. 이 힘을 통해 영혼은 성장하고 번성하고, 자신을 유지하고,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한다. 이 생명력이 없으면, 어떠한 생물도 존재할 수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생명력을 일컬어 베라카, 곧 “복”이라고 불렀다.(243)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어느 외래 종교든지 풍류도의 구성적 원리를 타고서라야만 한민족에게 의미 있는 종교로서 기능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외래 종교들이 풍류도의 구성 원리에 접촉함으로써만 비로소
토착화될수있다. 풍류도는 <삼국시기>에 인용된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타나는 말에서 유래힌다.
“우리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다. 이것을 풍류(風流)라 한다....이는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 뭇 사람들에게 접(接)해서는 그들을 교화(敎化)한다."
최치원이 위 비문에서 말하는바 유불선(儒佛仙) 3교를 포함한 ‘풍류’란 ‘부루’, 밝 , ‘환 , ‘한’의 한문 표현으로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면 크다(한밭) , 위대하다(마루한), 바르다(한글) , 빛누리 (한울), 하늘님이 모두 그러한 개념에서 파생한 것이다. ‘한’은 바로 모든 것을 포용히면서도 초월하는 님 , 만유 속에 충민하면서도 비움으로 텅 빈 님, 유영모의 표현으로 하면 ‘없이 계신 히나님' 이다. 유동식이 앞선 인용문에서 밝힌 대로 한민족에게서 ‘한’은 히나이면서 전체이기 때문이며, 현대 물리학에서 빛을 파동과 입자라는 ‘이중성' 으로 설명하거니와 한민족이 이해하는 하느님은 우주에 편만하는 빛의 파동처럼 만물의 궁극 원리이면서도, 빛의 입자처럼 사람의 치성과 지극한 기도에 감응하는 '크신 하늘님' 으로서 인격적인 신이었던 것이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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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9,13)
저와 함께 미사를 드렸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양식 ‘다 양식’을 할 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9,13참조)라고 덧붙여서 기도합니다. 그 까닭이란 어느 때부턴가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실존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저의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이 자비 안에서 과거와 똑같은 길이 아닌 참된 생명이 충만한 상태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2,14참조)이며, 직업은 세리(루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리는 본의 아니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으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의 자리가 아닌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삶을 살아 온 그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뜻밖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였고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그 근본적인 뜻을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 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 하느님 무상의 선물 앞에서 마태오는 이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지며,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9,11)라고 추궁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11,19;루7.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 경건자가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율법이 아닌 다른 길들은 참된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서지 않는 한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다, 하고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요 병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솔선해서 죄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함께 어울렸던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들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9,1213) 는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경건한 이들의 잘못은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대자대비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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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
박윤식 [big-llight] 2024-09-20 ㅣNo.176118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불렀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는 곧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이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제자들께 일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닌 자비다.’라고 하신 그 말의 뜻을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마태오의 직업은 세리였다. 세리는 자기 민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지배국의 앞잡이 노릇과 자신들 잇속을 채우려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도 했다나. 따라서 유다인들은 영혼과 민족을 파는 그들을 몸을 파는 창녀보다도 더 심하게 멸시하였단다. 마태오는 주님 은덕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 세리는 그가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었든 간에, 당시 그네들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독사 같은 매국노로 지독한 지탄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 마태오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고는 곧장 그의 집에 가시어 여러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기까지 했단다. 그리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닌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라고 큰소리까지 치셨다. 죄인은 치유 대상이지 단죄할 이가 아니라나. 죄를 지었다고 격리가 아닌, 어떻게든 그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만 된다는 거다.
암튼 먼저 부르심 받은 다른 이들에게도 이 일은 여러모로 언짢았을 게다. ‘저런 인간을 우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시다니.’라면 자존심 상했을 수도. 아마도 어부는 세리와는, 세리는 어부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리라. 이처럼 어쩌면 예수님이 제자를 선택하신 그 내막은 다소 힘든 부분이 있었다. 어부들은 그 비린내 나는 손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악수하기조차 꺼리는 이들이었고,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라 하여 유다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 많고 작은 이, 멸시의 대상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당시에는 가히 파격적이었다고나 할까. 보신 눈이 세상 시각과는 확연히 다르셨다. 세상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는 그들을 꼭 필요한 이로 뽑으신 거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할 이를, 이런저런 조건으로 골라 뽑는 우리네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기까지 하다. “나는 의인보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부르심에 거침없이 순종한 마태오는 자신이 세리였음을 고백한 겸손한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다면서 누구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는 이가 아닌, 가책을 느끼면서 절실하게 도움을 간청하는 이를 부르러 오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둠의 자식이라 일컫던 그를 제자로 선택하셨다. 그의 직업을 보신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 됨됨이로만 보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이르셨다. 희생 제물이 오로지 이웃에 대한 순수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희생 제물은 즐겨 받지 않으신다는 뜻일 게다. 사실 주님께 받은 것에 감사해서 나의 것을 내어놓는 그 행위 자체가 봉헌이다. 그런 이들은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가 없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이웃을 향한 자비는 하나이다. 우리 역시 예수님 부르심으로 축복 입은 이다.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그분 초대에 실로 부응하는지? 마태오가 따라간 그 숙명의 길을, 그날까지 끝까지 따라는 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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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따라갑니다. 절 하나로 부르심과 응답이 끝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짧지 않나 싶습니다.
이 한 장면 안에는 세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서 한 편에, 그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세리 마태오가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하는 일을 보시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십니다.
그는 남들에게 공공연히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내세우며 자비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리인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가 어떤 결심을 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회개는 하였는지 물으시지도 않고 곧바로 당신과 함께 있도록 불러 주시는 분이 마태오에게는 분명한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는 것은 그에게 걸림돌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따라가야 할 분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도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기가 부당하다는 것을 말씀드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당함을 다 아시면서도 따라오라고 하신다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라면 따라갈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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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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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이러한 부르심과 응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그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이 말은 다시 보면
응답 안에 고백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비추어 보면
그 고백은 내가 죄인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더 쉽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이 드러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좋아야지만
온전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면서 얻는 것이 있어야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것보다 더 큰 것이어야
내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꾸준히 따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내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주실 수 있는지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될 때
나의 모습이 드러나도
기쁘게 하느님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매번 흔쾌히 응답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부르심과 그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응답으로 끝나지 않고
한 번의 관계 맺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점점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부르심과 응답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나를 잘 찾고, 나의 부족한 모습을 잘 보고
하느님도 잘 발견할 수 있을 때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때
우리의 응답은
기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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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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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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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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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1)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마태오도 갑작스럽게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부 출신 사도들의 경우처럼,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눈여겨보시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곧바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서품식 때의 서약 예식을 보면, “원합니까?” 라는 질문들과 “원합니다.” 라는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서품 대상자들은, 그 전에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를 엄격하게 심사 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갑자기’가 없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부르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로 보이긴 하는데,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사도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은, 직업과 낡은 인생을 버리고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부들처럼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렸다면,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루카 5,29) 베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린 때는 잔치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였을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집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내면은 보지 않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만 자꾸 강조하는 이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는 의인이냐?” 라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셨고,
‘모든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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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의 삶과 신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장면을 들여다보게 되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신 것은 커다란 ‘스캔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민족을 등쳐먹는 배신자이자,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다는 분이 그런 사람을 당신과 함께 일할 사도로 뽑으셨으니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결정을 두고 ‘저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가 맞나?’하는 의구심을 품었을 겁니다. 또한 예수님을 거스르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마태오를 제자로 삼은 예수님의 선택이 그분을 비난하고 배척할 좋은 구실이자 명분이 되었을테구요.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할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마태오를 부르시는 장면, 오해와 비난의 소지가 다분한 그 장면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포함시킨 것은, 더 나아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그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로까지 인정한 것은 커다란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든 것이 명확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아직 신앙에 대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죄인’이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의 ‘리더’ 역할까지 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 것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소명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자신은 죄인들과 ‘다르다’고 자부하며 그들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죄인들을 심판하며 단죄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죄인들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께는 죄인이든 의인이든 그들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이들의 마음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배타적 차별의식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마음가짐이 우리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타인과의 일치를 방해하며 공동체 내부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이 바라시는 건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짓고 차별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또한 사람이 죄를 짓는 건 그의 마음 속에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려는 사악한 의도가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부족함과 약함 때문임을, 그로 인해 죄를 지어 마음과 영혼이 병드는 딱한 처지가 되는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단죄하며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줌으로써 그가 죄로 인해 받은 상처를 잘 치유하고 다시금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함이 마땅하겠지요. 그러니 비난보다는 이해를, 단죄보다는 용서를, 배척보다는 포용과 자비를 지향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나보다 부족하고 약한 이들을 ‘희생제물’ 삼아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큰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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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세리와 죄인”
사도 바오로께서 수인(囚人)의 몸으로 믿음의 공동체에 보낸 서간을 통해 교회의 신비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한 것은 참으로 오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6)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하나로 일치를 말해주고 있고 또한 다양성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11절)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지체는 손발부터 차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제자들의 모습도 놀라울 정도로 예상을 엎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이었던 세리 마태오를 주님께서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동족이면서도 세리는 멸시와 소외의 갈등을 겪었을 마태오는 경제적으로 부유했겠지만 누구보다도 삶의 밑바닥에 서 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잘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죄인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야기를 족보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바로 구약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는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와 다윗의 이야기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배경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처럼 산상설교를 비롯한 주님의 가르침은 신앙인의 법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주님의 기도(마태 6,9-13)는 유대인으로서는 감탄할 정도로 완전할 뿐 만 아니라 황금률은 율법의 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족이 비록 율법을 갖고 있지만 원수에 대한 갈등에서 오는 배타적인 것을 풀어 줄 사랑의 법을 통해 메시아의 진정한 모습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불이해로 멸시와 죽음으로 몰아붙인 예수님이야말로 부활을 통하여 참다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 것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선택은 당장 일어나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앞으로의 교회의 바탕이 되는 복음을 위한 거시적인 안목이시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당장 보이는 것을 통해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1절)이 유대인들의 안목이었다면 주님께서는 구원사적인 대답이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사도 바오로는 비록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적이 없는 이방인의 사도이기는 하지만 율법을 사랑과 구원으로 이끌어 올리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증명한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비체의 다양성과 일치성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긋나고 대치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조화를 이루는 신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놀라운 안목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만 주님은 그를 사도로 또 복음사가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고 당장은 나에게 고통과 미움의 대상인 내 이웃이 바로 구원의 주인공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 겸손과 온유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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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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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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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삶
<2024.9.21>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0:1~17절)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삶❞
❚ 성도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도구로서 악한 세력과 당당히 맞서며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 어떠한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까?
➲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1~11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을 때, 예후가 이스르엘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아들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인즉 아합의 자손 가운데 최고의 자질을 가진 자를 왕으로 세운 다음에 자신과 당당히 대항해 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2~3절). 편지를 받은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은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저 두 왕도 그를 당하지 못하였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그와 맞설 수 있겠소?”(4절,새번역)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5절)..라고 하면서 무조건 예후를 따르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예후는 두 번째 편지를 써서 사마리아 지도자들에게 왕자 칠십 명의 머리를 다음 날 이스르엘로 보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명령대로 바로 시행하였습니다. 예후는 고대의 관습대로 왕자들의 머리를 성문 어귀에 두어 본보기를 삼고, 백성들에게 아합의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아합의 집에 속한 자를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대적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담대하게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후는 상대가 가장 탁월한 자를 세운다 할지라도 결코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구약시대의 예후보다 더 분명하고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당당히 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때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교만을 버리고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12~14절).
예후가 이스르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목자가 양털 깎는 집’에 이르렀습니다(12절). 예후는 이스르엘에 남아 있던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모두 척결하고, 아합 왕조의 핵심 인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후는 그곳에서 이미 죽임을 당한 유다 왕 아하시야 왕의 형제들을 만나 누구인지 묻자 그들은 ‘...아하시야의 형제들로서 이세벨 왕후와 왕자들과 왕의 친족들에게 문안을 드리러 내려왔다...’(13절,새번역)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후는 그들을 사로잡으라 명하고 이들 사십이 명을 모두 죽였습니다(14절). 예후의 눈에는 이스라엘 왕실과 유다 왕실이 모두 동일하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사람일 뿐입니다. 그의 역할은 아합 가문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합 가문을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넘어서서 아하시야의 친족까지 모두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 자신을 도구로 쓰실 때, 우리는 자신의 분수를 잊고 교만하지 않도록 무엇보다 조심해야 합니다. 분수를 넘어선 우리 자신이 자칫 오히려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영적인 교만에 대하여 철저히 경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사명을 위하여 서로가 연합해야 합니다(15~17절).
예후가 그곳을 떠나 가다가 그를 만나러 오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나답은 레갑 족속의 지도자이며, 바알 우상에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여 여호와 신앙을 지켜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호나답은 예후와 동행함으로써 여호와를 위한 예후의 열심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후는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여호와를 위한 열심의 결과였고,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라는 해설이 이어지면서, 예후의 모반과 숙청 작업은 예언의 성취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예후와 여호나답의 연합은 오므리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믿음과 바알 우상의 뿌리를 제거하고 하는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이 땅에 세워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두 함께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연합을 위한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연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연합할 때 더욱 강력하게 영적 아합 세력과 바알과 같은 우상의 세력들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움이 가득한 이때에 영적으로 더욱 연합하며 충성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믿으며 영적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 자신이 도구로 쓰임받고 있음에 감사하며 영적인 겸손함을 갖고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0:1~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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