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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잡히심
막 14:43-52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막 14:43-52 / [예수께서 잡히시다; 마 26:47-56, 눅 22:47-53, 요 18:2-12]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보낸 일당과 함께 그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44) 유다는 미리 그들에게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실수 없이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말해 두었으므로 45) 그곳에 당도하자 곧 예수께 다가가서 `선생님!' 하고 소리치면서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일당들은 재빨리 예수를 붙잡았다. 47) 그때 예수 곁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 버렸다. 48)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무장을 하고 나를 잡으러 오다니 내가 무슨 위험한 강도라도 된단 말이냐? 49) 왜 너희는 내가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칠 때는 잡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다.' 50)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51) [도망한 청년] 예수를 따르는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었는데 일당들이 그를 붙들려고 하자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예수님께서 세 번 씩이나 드려진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향한 본격적인 수난의 길이 시작됩니다.
유다의 입맞춤(43-45)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을 마치기도 전에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유다에게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회개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주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요 13:30). 그리고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어두운 밤에 서둘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유다는 입맞춤을 군호로 삼고 병사들에게 어두움 속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줍니다(마 26:48; 막 14:44). 당시 입맞춤은 서로의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였습니다(눅 7:38; 15:20; 행 20:37). 하지만 유다에게는 위선적인 행동이었고 배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도망(46-50)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칼을 꺼내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요 18:10). 당시 베드로가 검을 휴대한 것은 제자들의 신앙 무장을 촉구하기 위해 ‘검을 사라’는 그리스도의 상징적 교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눅 22:36).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책망하시고(48),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다른 복음서에는 “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 “...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22),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저녁(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만 하더라도 “주를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던 제자들은 그가 잡히시는 것을 보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한 청년의 도망(51-52) 이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청년마저도 두르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당시 대개 남자들은 헬라어로 ‘키톤’이라는 속옷과 ‘신돈’이라는 겉옷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이 입은 ‘신돈’은 수입품 세마포로 상당히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부자가 아니고서는 걸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이것을 포기하고 도망을 한 것입니다.
적용: 가룟 유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마음은 멀리 떠난 자들의 가증함과, 베드로처럼 인간적인 혈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가룟 유다의 배신과 뻔뻔함은 예수님과의 입맞춤에서 그 극치를 보여줍니다. 당시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배신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가룟 유다를 친구로 부르시고 맞이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요, 용납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가룟 유다의 반응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죄인들의 손에 팔리신 예수님
마가복음 14:43-47 / 박상훈 목사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 동안 오래토록 지켜 내려오던 유월절을 종료하시고, 그 대신에 성찬을 새롭게 제정하셨습니다.
성찬이 시작되기 전, 가룟 유다는 다락방에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찬이 끝난 후,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감람 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요18:2 말씀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은 가끔 예수님이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도 하시며, 또한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가룟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그들보다 좀더 동산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홀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시는 중에도, 제자들을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기도 사이마다, 그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마다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시면서,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막14:41∼42 말씀입니다.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손에 팔리시는 광경입니다.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기 위해,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에게 잡히셨습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의 말씀은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 이외에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팔아넘긴 가룟 유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제자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막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세 번 같은 내용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잤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좀더 정확히 번역하면, 이제도 자고 쉬느냐)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이 때의 유다는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가리킵니다. 앞에 나오는 가룟은 지명이고, 뒤에 나오는 유다는 인명입니다. 그는 로마의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의 아랫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삼 년 동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늘 함께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로, 그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행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찬이 시작되기 전, 가룟 유다는 그 곳을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만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이 때가 예수님을 넘겨주기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들은 즉시 산헤드린, 곧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모두 소집한 것입니다. 그들도 이 때가 예수님을 잡을 적기라고 판단하고, 그 즉시 무리를 파송했습니다.
마26:47 말씀과 같이, 이 때 공회는 예수님을 잡기 위해 “큰 무리”를 파송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의 아랫사람들만 파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눅22:52 말씀과 같이, 이 때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도 직접 따라 나섰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요18:3 말씀과 같이, 무리에는 군대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군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군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18:12 말씀과 같이, 이 때 천부장이 로마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말 그대로 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지휘관입니다. 비록 이 때 천 명 전부가 동원되지는 않았더라도, 수백 명은 천부장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의 수는 모두 합쳐서 일천 명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나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말하면서, 얼른 잡지 않으면 예수님이 백성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거짓으로 모함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는 천부장도 또한 총독 빌라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막15:7 말씀과 같이, 바로 얼마 전 로마에서 벗어나려는 민란이 실제로 일어났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장에서 보면, 또다시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일어난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부장을 위시한 군대를 보내서 예수님을 잡도록 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어우러져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그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검은 로마 군대가 지니고 있는 무기였습니다. 예수님을 잡는데 방해가 되면, 그들은 가차 없이 검으로 찌르고자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몽치는 짤막하고 단단한 몽둥이를 가리킵니다. 몽치는 성전의 경비대가 지니고 있는 무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경비대는 성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몽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18:3 말씀처럼, 그들은 등과 횃불을 들고 왔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기에, 보름달이 떠서 주변은 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등과 횃불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숨으시더라도,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3절 끝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앞장을 서서, 무리를 그 곳으로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무리를 이끌고서, 먼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실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바로 감람 산의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를 이끌고, 곧이어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아주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오도록 큰 무리를 파송했습니다. 이에 무리는 검과 몽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등과 횃불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검과 몽치를 들고,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등과 횃불을 들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처럼 정신없는 짓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예수님을 배척하며 기독교를 폄훼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날마다 힘써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막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예수를 파는 자가.” 가룟 유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어긋나자, 그는 예수님과 함께 했던 세월을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는 자기가 맡고 있던 돈궤에서 도적질했습니다.
며칠 전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을 허비시켰다고 불평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은 삼십을 받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기기로 했습니다.
은 삼십은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 일백 이십 데나리온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그가 놓친 삼백 데나리온의 삼분의 일 정도를 대신 챙겼던 것입니다. 그는 은 삼십에 눈이 어두워서,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가룟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 사이에는 이미 약속된 군호, 곧 신호가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가룟 유다의 입맞춤을 받는 자가 그들이 잡아야 할 목표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름달이긴 했지만, 감람나무들 때문에 주변은 어두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후광이 비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자들 중 하나가 스스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잡힐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실수가 없도록, 그들 사이에 신호가 필요했습니다.
본시 입맞춤은 사랑이나 존경 또는 감사를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님을 파는 하나의 신호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곧이어 그의 실제적인 의도가 밝혀집니다.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가룟 유다는 그의 손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면서, “이가 바로 예수다”라고 크게 외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했더라면 차라리 덜 가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니 그는 너무도 가증스러운 짓을 행했습니다.
막14: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그가 이미 무리와 짠 군호대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랍비여.” 이는 제자가 스승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랍비의 뜻은 선생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 짐짓 반가운 척하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역시 위선적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하려는 짓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2:48 말씀을 보면, 입맞춤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장에라도 가룟 유다를 멸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시41:9에 있는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45절 끝에 있는 말씀입니다. “입을 맞추니.”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연 개의치 않았습니다. 요13:27 말씀과 같이, 이미 가룟 유다는 사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입을 맞추다”라는 동사가 헬라어에서는 강조형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큰 동작을 하면서, 열렬하게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는 행동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끌고 온 무리에게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확실하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막14: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가룟 유다의 입맞춤을 신호로 무리는 예수님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요18:12 말씀처럼, 이방인인 군대와 천부장 그리고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도망을 치시면 안 된다는 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했습니다.
이로써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고, 예수님은 죄인들의 손에 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위선적인 입맞춤도 참으시고, 죄인들의 손에 결박당하시는 부끄러움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도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의 쾌락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역시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도, 이 세상 명예와도, 이 세상 행복과도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에,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이와 같은 고백대로 살며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떤 제자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습니다.
막14: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무리가 예수님을 잡아서 결박하려 들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막 잠에서 깨어난 제자들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잡히시는 것을 보더니, 그들 중 한 사람이 돌발적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성급하게 나서기를 좋아하고, 또한 충동적으로 행하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베드로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요18:10 말씀을 보면, 이 때 무모한 일을 저질렀던 사람은 다름이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칼을 빼어.” 눅22:36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검을 가질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눅22:38 말씀과 같이, 그 때 제자들에게는 검 둘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가진 칼을 빼서 휘둘렀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을 쳐.” 요18:10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종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에 해당할 만큼, 그는 아주 막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무리 중 로마 군대는 천부장이 통솔했습니다.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가 통솔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 말고가 무리 전체를 총괄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다가, 그만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변을 당했습니다.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베드로는 전문적인 칼잡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말고는 얼른 고개를 숙여서, 다행스럽게 그의 목이 떨어져나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그의 오른편 귀가 칼에 베여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언뜻 보면, 베드로의 용기가 가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어리석은 짓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잠자다 일어나서 정신없이 객기를 부렸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18장 말씀을 읽어보면 분명해집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에게서 목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또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요18:8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계속해서 그 다음 절인 요18:9 말씀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한 사람도 잃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실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무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신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들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살인미수죄나 업무방해죄로 바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즉시 나서서 베드로를 보호하셨습니다. 눅22:51 말씀처럼,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새 귀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 사이에서, 말씀으로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은 능력으로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말씀으로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하면, 예수님은 능력으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우리도 무리처럼, 무턱대고 예수님을 배척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며 우리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세우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주를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으로 가득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 날마다 힘써 복음을 전하는 복 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겁한 자, 용감한 자
노경모 목사
우리가 상대방한테 ‘너 비겁하구나’ 한다면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 사람은 굉장기 기분 나빠하고 듣기 싫어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한테 ‘당신은 비겁하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 역시 마음이 아주 상할 수 있습니다. ‘비겁하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기분이 아주 안 좋습니다.
‘비겁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강한 자한테 약하고, 약한 자한테 강한 사람,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계속 핑계를 대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사람, 힘들거나 돈이 들어갈 것 같으면 무조건 바쁜 일 있다고 피하는 사람, 친구가 얻어 맞고 있는데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 양심을 버리는 사람‘ 이렇게 대답들을 했습니다.
비겁한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책임감이 없다. 2.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치는 법이 없다. 3. 남의 약점을 잡아서 공격을 한다. 4. 잘못했을 때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5. 거짓말을 잘한다. 6. 고집과 이기심이 충만하다. 7.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한다.
하여튼 ‘비겁하다’는 말이 안 좋은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한테 ‘비겁하다’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진짜 비겁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시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 예수님으로 부터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입은 사람들, 예수님의 놀라운 교훈들을 듣고 배운 사람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으로 부터 큰 혜택을 받은 사람들... 누구지요? 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주를 버릴지라도 나를 주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당시의 실세들인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자기들도 잡혀 갈까봐 겁이 나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칩니다. 제자들은 비겁한 차원을 넘어서 배신을 하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한 청년도 자기의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합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칩니까? 창피한 것은 상관없어요, 내가 살고 보자는 것이지요, 정말 비겁하지요. 과연 벗고 도망친 이 청년은 누구일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글을 쓴 마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비겁한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었던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귀타고 입성했을 때,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했던 수많은 사람들.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상황이 바뀌어 지니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정말로 비겁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비겁한 사람들과 반대되는 용감한 사람들도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인 바로 다웟입니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나타나서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했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을 비롯해서 사울왕까지도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참 비겁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10대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나가서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인간적인 면으로 볼 때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그는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용감했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겁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다니엘이나, 활활 타오르는 풀무불을 겁내지 않고 바벨론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다니엘의 세 친 구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참으로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마음으로 조국 유대나라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왕후의 자리를 잃어버릴 것을 각오하고, 심지어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바사 왕에게 들어간 에스더.. 정말로 여성이지만 이렇게 비겁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할 정도로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 용감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갑. 그는 로마 총독으로 부터 ‘당신 나이를 생각해 봐라 이제 그만 고집을 피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지만,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 동안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폴리갑은 비겁하지 않은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비겁한 자를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비겁한 자가 되는 것도 싫어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비겁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용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겁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받은 은혜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와 은총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삼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는 특권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람 낚는 어부로 그들의 신분이 변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변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곁에서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가까이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 받은 은혜와 혜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예수님이 잡히게 되었다고, 도망을 칩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잊고 않고 기억했다면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에서는 주인이 너무 잘헤 주고, 주인으로 부터 받은 은혜가 컸다면, 종으로 있다가 이제 자유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어도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 주인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원해서 계속적으로 주인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귀를 뚫습니다.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주인으로 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 말에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 주었더니 가방 내 놓으라’고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주었더니 그 은혜에 감사하지는 않고 도리어 자기의 가방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혜, 주변 사람들의 은혜을 항상 잊지 않고 감사하고 산다면,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다윗도, 다니엘도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비겁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용감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가 곧아야 합니다.
마음과 뜻이 흔들림이 없이 바른 사람을 심지가 곧은 사람,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요리저리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심지가 곧은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 같아요, 일이 잘 풀리고 모든 것이 내 뜻으로 잘 이루어져 갈 때는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러다가도 힘든 일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게 되면 언제 내가 신앙생활 했느냐 듯이 옛날 불신자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신앙생활을 잘 안합니다.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꾸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할 때는 사랑하셨다가, 잘 하지 않을 때는 미워하셨다가.. 하나님이 이러십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지요. 이것은 비겁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용감한 사람들을 보십시요. 이분들은 자기가 아주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가 왔을 때에도 믿음의 심지가 곧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까 읽은 아사야 26잘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평강하도록 지키십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가들은 믿음의 심지가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기분이 좋고 상황이 좋을 때는 마치 예수님을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것처럼 하다가, 막상 예수님이 잡히실 때는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예수님이 세워주셨는데, 그냥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 가버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만 한 것이나 아니라 저주까지 합니다. 마가복음 14장 17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원수들한테 팔아 버립니다. 제자들의 비겁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비겁해지고 비굴해 지기가 쉽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용감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갑자기 인도로 돌진한 난폭 차량에 몸을 던져 어린 소년을 구한 흑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난폭 운전 차량이 10대 초반 어린 소년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그녀는 소년을 자기 몸으로 감쌌습니다. 그녀는 돌진하는 차량에 밀려 빌딩 벽에 강하게 부딪치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어린 소년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깝다고 자기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망설였거나 주저했다면 이런 용감한 행동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 아이의 처지였다면, 얼마나 그 흑인여성이 고맙겠습니까? 생명의 은인이지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룟는 예수님의 사랑과 신임을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돈궤, 오늘날로 말하면 통장이라고 할까요? 돈궤까지 맡겼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은 삼십에 스승인 예수님을 파는, 인류 중에서 가장 비겁하고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던 분이십니다.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의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누가 더 크냐고 자기들끼리 논쟁을 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더 크게 되겠다는 명예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예수님으로 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욕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리더라도 자기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장담하지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은 이러한 욕심들을 내려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비겁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용감한 사람들을 보십시요.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목숨까지도 내려 놓았습니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더 잃을 것이 있겠습니까? 무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 것을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 시간도, 내 물질도, 주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좀 손해 보십니다.
용서하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이 복음송의 가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 큽니다.
1.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의지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 주를 위해 쓰렵니다.
2. 천한 이몸 내것이라고 주의 일을 멀리 했네 주신 이도 주님이시고 쓰신 이도 주님이라
아버지여 불충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유혹 다 멀리하고 주의 일만 하렵니다.
3. 주님 사랑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몰랐었네 주님 말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주님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만 해도 감사와 감격이 차오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비겁한 자가 아니라 용감한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 부터 잘했다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다스리는 길
김영주 목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참을 수 없고, 깊은 상처가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할 때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배신을 당해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때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4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말씀하시고 있는데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들이 닥쳤습니다. 유다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시면 참 분위기가 무섭습니다. 잡으러 온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되었고(그들 중에 천부장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전부 손에 검과 몽치를 들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라는 한 사람을 잡는 것치고는 너무 과격하고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아마, 이렇게 많은 군사가 파송 된 것은 예수님이 워낙 능력을 많이 행하시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유다를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43절에서는,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46절로 가보시면, '예수를 파는 자'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을 연결시켜보면 이렇습니다. 과거 축복된 그룹인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유다가 이제는 예수를 파는 자가 되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유다 그는 과거에 열둘 중의 하나에 속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직접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해도 거절당했습니다. 하고싶다고 되고 싶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시고 배우고 따르게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가정도 재산도 배도 부모도 버리고 따른 사람들 아닙니다. 인생의 실패자들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축복된 그룹의 멤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는 그 축복을 차 버렸습니다. 공동체에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사단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유혹하고 결국 배신자로, 예수를 파는 자로 써먹었습니다. 사단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어느 순간 사단의 영광을 위한 헌신 자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인생이 잘되었다면 모릅니다. 사단에게 일회용으로 쓰임 받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때 헌신된 사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누구를 말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함께 갈 공동체가 있고, 함께 기도할 공동체가 있다는 것, 축복입니다! 서로가 같이 도와주고, 끌어주고, 기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유다가 힘들어도 끝까지 뛰쳐나가지 않고 이 그룹에 계속 붙어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의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나머지 제자들의 장래를 봐서 예측해볼 때 그는 훌륭한 사도의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배신자나, 예수를 파는 자의 자리에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단 말입니다.
요13:30절에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더라"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빛'이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반대되는 현상을 '밤'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그 제자공동체를 떠나는 순간 그 영혼의 상태는 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한 어둠을 향해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올 때는 '예수를 파는 자'로서 돌아왔습니다. 참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여러분, 내 신앙에 빨간 불이 켜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영혼에 어두움이 찾아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공동체가 싫어질 때입니다. 모임이 싫어질 때입니다. 혼자서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입니다.
신앙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물론, 때로는 그 공동체에 적응하면서 갈등도 합니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사람이 싫어지고 모임이 부담될 때도 있습니다. 전혀 남남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같이 모였는데 어찌 갈등이 없겠습니까? 가족들끼리도 싸우고, 형제간에도 싸우고, 부부간에도 의견이 다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어찌 이 정도의 갈등도 없이 신앙생활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공동체가 되어가고, 서로 이해하고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싫다면 혼자 살아야지요. 그런데 혼자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들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르고 받는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남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44-46절을 보시면 유다는 매우 감정적인 반응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4절 보세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군호'라는 말은 '신호'라는 말입니다.
첫째, 입맞춤을 신호로 했습니다. 입맞춤은 서로 안고 하는 인사입니다. 유대관습에서는 친구나 사제간에 사랑의 표시로 입맞춤의 인사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표적을 입맞춤으로 쓴다는 것은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장한 배신을 계획한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 것을 보면 매우 감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44절을 잘 보시면 잡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그냥 '잡아가라'하면 될 것을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했단 말입니다. 여기도 보면 감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잡아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잡아 가지고 단단히 끌어가는 장면을 봐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이 변하니까 감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무섭더라구요. 특별히 인간관계는 사랑이 변하면 꼭 감정으로 돌아서 버리더라구요.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47-52절까지 보시면 이 상황에서 제자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먼저 47절 보시죠.
"곁에 섰던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리니라"
베드로는 이 상황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감정이 상했습니다. 너무 격분한 나머지 '이 나쁜 놈들' 하면서 칼을 빼서 휘둘렀습니다.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상처를 입혔습니다. 어떻게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고, 너무 분해서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잡히는 대로 꺼내어 휘둘렀습니다. 이것 보면 베드로도 급하니까 옛 성질, 기질들 다 나옵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삼 년이나 주님을 따랐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 때문 아닙니까? 이 말씀, 이 꿈에 붙들려 모든 것을 버리고 견딘 것 아닙니까?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알고 생명을 얻는 꿈, 이것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며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것입니까?
생명을 살리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성질 나니까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예수님이 이 종의 귀를 고쳐주시지 않았다면 이 종이 나중에 예수 믿는다고 했을까요? 안 믿었을 것입니다. 아니, 안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욕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주변에 혹시라도 믿으려는 사람들 있으면 절대 믿지 말라고 말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 아녜요?
"보라고, 내 귀 보라고 그 베드로라는 사람이 잘랐다"고. "그것도 가장 잘 믿는다는, 수제자라는 베드로가 이렇게 만들어 놨다고" 이러면 어떻게 전도가 되며, 복음이 전파되겠습니까? 다행이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만 큰일 날 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억울하게 잡히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당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선생님을 도와보겠다고 이렇게 라도 한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럴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혀 돕지 못했습니다. 일만 만들었습니다. 일은 베드로가 벌리고 수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바쁘게 했습니다. 복음에 있어서도 도움은커녕 방해물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좌충우돌하면서 여기서 충돌, 저기서 충돌,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영혼을 죽이는 복음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사람 낚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게 해달라고, 하지만 정작 문제가 터지면 옛 습관, 기질, 성질들 다 나옵니다.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좌충우돌하면서 문제만 일으킵니다. 복음의 장애물만 됩니다. 하나님 영광 가립니다. 생각해보세요. 화나기로 하면 누가 더 화나겠습니까?
배신감을 가장 강하게 느낀 분은 누구입니까?
가장 감정이 상한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입니다. 예수님은 훨씬 더 했습니다. 직접 가르쳤던 제자에게서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사랑의 인사를 가정한 배신의 입맞춤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것을 다 참고 견디셨습니다. 오히려 그 와중에서도 귀 잘린 종--말고--을 고쳐주는 여유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잡으러 온 사람이니까 '당해봐라' 하면서 모른 체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밉잖아요? 그런데 잡혀가는 중에서도 이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애초부터 우리와 다른 분이니 별 고민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감정도 없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조금 전 기도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14:33)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막14:34)
예수님도 감정이 있는 분입니다. 놀라기도 하시며 슬퍼하기도 하셨던 분입니다. 때로 심히 고민하여 죽을 정도로 힘들 시간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분노를 안 느꼈겠습니까? 아무런 감정도 못 느꼈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감정들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기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다스리며 묵묵히 감당하고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겟세마네 동상에서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깊은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스릴 능력,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사람 안에는 이런 능력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겠습니까? 우리는 안 되는 사람들이요,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능력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기도시간에 잤단 말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 능력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 능력으로 사랑하려니 됩니까? 안 됩니다. 될 수 없습니다. 성질부터 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야하는 데 내 것으로 하려니까 안됩니다. 기도해서 받아야 하는데 기도하지 않았으니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깊은 기도 속에서 이 능력을 얻었습니다. 어떤 시험, 어떤 유혹, 어떤 장애물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능력과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이 평안을 누가 흔들겠습니까? 사단이 베드로의 마음은 뒤흔들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이 세상에서 얻는 평안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것도 이 평안이었습니다. 어떻게 얻었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다는 가르쳐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 빌4:6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
찬송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469장 2절,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평화는 땅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깊은 기도 속에서 이 평화를 받았습니다. 누가 이것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안에 이런 평화가 있기 바랍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이 평화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
도망갔습니다. 51-52절을 보시면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 오다가 무리에게 잡혀서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여기 베 홑이불은 인도산의 세마포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잠옷으로도 입고 시체를 싸는데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싼 것도 이런 세마포였습니다. 이걸 볼 때 이 청년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가 누군가로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듣고 예수님이 걱정되어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옷차림으로 뛰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람들에게 잡히니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밤이니까 다행이지 낮이었다면 볼 만했을 것입니다.
참 의리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이 잡혀가는데 자기들은 도망가고 있습니다. 옥에도 가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던 사람들이 다리야 나 살려라 도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도망가게 만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오히려 더 담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18:4-6을 보시면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게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 지라"
예수님은 자신이 잡힐 것을 다 아시고도 도망은커녕 담대하게 나가서 '내로다'말씀하셨습니다. 하도 당당하게 말씀하시니까 잡으러 온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무슨 차이일까요? 도망치는 제자들과 앞으로 나가는 예수님.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역시 기도의 차이입니다. 기도를 통해 담대함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 기도 전에는 예수님도 두려워하셨습니다. 고민하셨습니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후에는 평안과 담대함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제자들은 이 때 잤습니다. 그러다가 부끄러운 짓은 다했습니다. 의리도 없죠, 자기 감정 조절도 안되죠, 도망갔죠, 약속해놓고도 못 지켰습니다. 믿는다해도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허깨비입니다.
평상시에는 다 잘 믿는 것 같고, 다 열심인 것 같은데 문제가 터지면 확 드러납니다.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천지차이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터지면 본성 나옵니다. 옛 성품, 감정, 기질들이 다 드러납니다. 믿음은 없어지고 인간적인 수단 방법만 찾아다닙니다. 그러면서 해결은커녕 오히려 문제만 만들고 다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 버립니다. 숨어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의 원한과 분노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이요, 담대함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이런 것들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