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각서를 쓰게 한다. 실버 시니어가 노후를 누리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건강과 재물은 필수다. 선택적으로 여친과 애인 그리고 아내라고 규정하는 이가 많다. 남녀관계란 불과 같아서 동요하면 그만큼 탄다. 이성 사이는 애정이 있으면 소찬이라도 맛있고 애정이 없으면 고량진미膏粱珍味라도 요리 탓을 하게 한다.
지하철 안은 온통 ‘그레셤의 법칙’이 난무하고 있다. 이 또한 각서감이 아닐는지? 모름지기 나는 평화와 화목과 사랑의 잎과 가지와 열매가 있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이따금 아내와 여행을 한다. 언제부턴가 고창 지방으로 여행을 자주하였다.
거기엔 한여름에는 무릇꽃이 희롱한다. 그런가 하면 무서리가 내릴 즈음엔 국화가 손짓한다. 여느 계절에 가도 반기는 것은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이다. 무릇을 보노라면 연인의 모습이 해가 막 떠오를 때 빛내림과 함께 그 아우라에 눈을 의심케 한다. 선운사 가는 산 계곡에 지천인 것이 무릇이다.
영국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릇이라고 하지 않던가. 예로부터 절에서 터부시했던 5신채五辛菜에 무릇이 들어간 것은 무슨 연유일까? 팔·구월에 엷은 황자색의 꽃이 총상꽃차례로 피어 있는 것을 보면 핑크색 잠옷을 입은 s라인의 교태로 착각한다.
인간사에만 기이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줄 모양의 잎이 사랑스럽게 자랄 때면, 세상 구경은 하나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한편 꽃은 잎이 다 말라 없어진 뒤에야 세상을 본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기에 ‘상사화’라고 하나 보다. 그런데도 잎과 꽃은 한 뿌리가 아니던가. 한집에 있어도 만나지 못하니 그리움이 도질 수밖에···.
국화꽃은 나의 여친이다. 고창 국화축제장에는 30만 평의 땅에 300억 송이를 자랑한다. 이 지구상에 이만한 장관이 또 있으랴! 그 많은 이 가운데 샛노란 꽃 한 송이가 다정한 친구가 되어 다가온다. 넌 어떤 친구가 좋더냐고 묻자, ‘반즐아친’, 불어도 아닌 것 같고 다소 생뚱맞아 보였다. 만나면 반갑고 바둑을 한 수 하거나 술잔을 건네거나 정담을 나눌 때면 그저 즐겁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아쉬운 친구. ‘반즐아친’은 나에게도 와닿는 축약된 키워드이다. 친구에게서 향 내음이 물씬 풍긴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슬러도 쉼 없이 스며든다.
가을이 되면 모든 식물이 성장을 멈추듯 사람 또한 노후가 되면 기력이든 정력이든 쇠락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요 우주의 섭리일진대 나 또한 궤도를 이탈할까 봐 두렵다. 바다와 민물을 오가는 풍천에서 자라는 장어 요리에 흠뻑 젖었다. 안주 접시 옆에는 장미 꽃꽂이가 수반에 놓여 있다. 아내는 평소에 장미를 헤어진 소꿉친구처럼 반겼다. 장어 요리와 복분자술은 완벽한 궁합이었다.
오늘 저녁은 곱빼기로 요강을 엎을지도 모른다. 장어는 꼬리 부분이 남자에게 말 못 할 정도로 좋다는 말이 있다고 했더니, 그 부분은 완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오랜만에 술도 안주도 한 달 보름쯤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입안이 분주했다.
선운사의 풍경소리도 잠들었는데 갑자기 뇌성이 방 안을 가른다. 아내의 가시 방망이는 날카롭고 위협적이었다. 꼼짝달싹 못하고 약속대로 각서 두 장을 썼다. 각서 한 장당 벌로 부동산 등기부 1부씩을 넘겨야 했다. 아파트 건물분과 토지 분을 갈취 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리조트 분양권 하나뿐이다. 완전히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되었다.
우리 넷은 한 방에서 어영부영하며 동참하게 되었다. 아내, 연인, 여친 그리고 나 순서로 자리했다. 조명등이 사라지자 나는 한 마리의 용이 되어 구름 위를 휘저으며 꽃들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세 여인은 모두 장미, 무릇, 국화꽃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산해진미로 거나하게 상기되자 그 용은 꽃들과 에멜무지로 노닥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을 향하고 있다. 아내가 그리웠다. 여친과 애인을 타넘어 가려는데 친구가 “부산을 가려면 대전을 경유해야 될 게 아닌가!” 간신히 책임을 완수하고 다시 넘으려는데 “대전을 통과했으면 대구를 경유해야제!” 어쩔 수 없이 봉사했다. 다음은 아내의 앙칼진 소리가 들렸다.
“대구를 거쳤으면 종착역을 향해 출발해야지!”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이 사연이 각서 두 장의 소이연이다.
가슴이 너무나 갑갑하여 몸을 돌리자 아내는 비둘기처럼 새록새록 잠자고 있었다. 국화꽃과 무릇은 온데간데없고 장미 한 송이만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각서 두 장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아내가 1인 3역을 했음이 분명하다. 바람은 꿈에서라도 피울 일이 아니었다. 바람피워 각서 쓰는 일은 남의 일로만 들으리. 친구 같은 아내, 애인 같은 아내로 1인 3역하는 아내가 가까이 있어도 그립다.
(석오균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