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분신, 자전거 정길순
연수동에 연수1차 아파트가 있다. 처음 입주하니 입주자는 몇 가구 되지 않고 도로 정비는 되어있었지만, 가로수도 없고 아파트 마당에 시멘트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동 사무소도 지금의 ‘시대 종합아파트’ 앞에 컨테이너 하나를 두고 그곳에서 업무를 보았고 우체국도 없었다. 은행은 남동공단 공업 공단 건물에 있는 신한은행이 있었다. 구청은 남동구로 가야 했다.
그때는 온라인이 구체화되기 전이어서 전출입을 전산으로 하지 않고 사람이 서류를 날라 왔었다. 그때 나는 52세의 나이였으니 벌써 20년 전 일이다. 수지 절단으로 상반신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모든 일상은 순조로웠을 때이다.
자전거를 배우면 차를 타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수 있으니 버스 노선이 없었던 그 시절, 걷는 것보다는 시간도 덜 들고, 택시비를 아낄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전거를 배울 때는 뒤에서 안장을 잡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족이 없는 나는 자전거를 잡아줄 이가 없었다. 그즈음 점차 입주자들이 늘어나면서 반장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입주했다. 그 신랑이 자전거를 잡아 주었다. 힘차게 발을 구르니 자전거가 앞으로 쭉 나갔다. 그러고 한참을 달리다가 멈추고 싶었다. 승용차들이 쭉 있는 곳에서 차를 의지해서 멈추려고 하다가 앞 차에 내 몸이 부딪쳤다.
그 바람에 승용차 앞에 있는 뾰족한 것이 부러졌다. 밖을 내다보고 있던 1층에 있던 어느 여인네가 차의 안테나가 부러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얼마인지 값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그는 됐다고 하면서 육천 원이지만 갈아 기울 때도 되었으니 아주머니는 그냥 가시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조금 끌고 가다가 언덕에서 발을 높이 올려놓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방법으로 틈만 나면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찻길로 나갔다. 찻길은 그즈음에는 버스도 아직 없었고 길은 넓지만, 마을버스 노선이 딱 하나 있었다. 사거리를 건너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벗겨졌다. 달리던 차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넘어진 자전거를 피해 지나갔다.
이제 페달을 밟고 나가는 것은 익혔으니 이번엔 서는 연습을 했다. 언덕이 아닌 곳에서도 페달을 딛고 올라타는 연습을 했다. 다리를 앞으로 들어 올려서 타는 방법을 연습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왜냐하면 뒤에 짐을 실을 때는 뒤로 해서 앉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자전거를 배웠는데 입주자들이 점점 늘어나니 남구에서 우리 동네에 연수2동사무소를 만들었다. 지금의 ‘승기마을’ 경로당 2층에 동사무소가 들어왔다.
한 날은 동 사무장이 나를 불러 동 사무소에 근무해 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을 시킬 것이냐고 물으니 구청도 다니고 사진관도 다니고 문방구, 은행, 우체국을 다니면서 동 직원들의 업무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했다. 내가 장애인인데 괜찮겠느냐고 하니 관계치 않는다고 말했다. 좋다고 대답을 하자 그렇다면 민간인 이력서를 써 오라고 한다. 민간인 이력서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으니 문방구에서 민간인 이력서를 쓰려고 한다고 말하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문방구에서 민간인 이력서를 샀다. 모두 5매였다. 지금도 그 누구에게 “내가 민간인 이력서를 쓴 사람이야” 하고 말하면 아는 이는 “아유~ 민간인 이력서를 쓰셨어” 라며 알아주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 사환이 되어 매일 우체국, 은행, 구청, 문방구, 사진관도 다니고 청소도 하며 직원들의 뒷일을 도왔다. 이 아파트 사람들의 전입 통지서는 내가 남구청에 다니면서 다 날랐다. 어느 때는 자전거로 남구청도 다니고 힘이 들면 버스를 타고 다녔다. 월급은 월말이면 하루도 넘기지 않고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버스 토큰’도 한 주먹씩 받았다. 그 렇게 출근하다 ‘IMF’가 생기는 바람에 ‘공공근로자’가 ‘사환’ 일을 하게 되어 ‘퇴사’했다.
이제는 남구청에서 연수구가 분할되어 지금의 연수 장례식장 부근에 4층 건물로 임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공근로 신청을 하라는 정보를 얻어 신청해서 공공근로를 약 3년 했다.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일 년에 약 육백만 원을 벌었다.
자전거로 송도 돌산, 아암도, 문학경기장까지 신나게 다녔다. 자전거를 타고 공공근로를 하러 다녔다. 그러면서 온갖 동료들의 심부름을 해 주어 인기가 높았다. 경로당 언니 오빠들의 은행 심부름을 해 드리면 칭찬해 주고 반겨주었다. 자전거 때문에 좋은 일도 많이 있었고 사고를 당해 나쁜 일도 많이 있었다. 그래도 자전거 타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자전거는 어느덧 나의 분신이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운전하며 다녔다. 송도 아암도 도로에 공사가 있는데 그곳에 쓰다 남은 자재가 기다란 게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이거 가져가도 돼요?” 고개를 끄덕이기에 들어보니 묵직하다. 그것을 베란다에 놓으면 화분 올려놓기가 좋을 것 같았다. 가져오려니 너무 길어서 자전거에 실을 수가 없다. 한손으로 중간을 들고 한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집에까지 단숨에 왔다. 힘들어 쉬고 싶지만 자재를 들고 다시 출발하기가 어려웠기에 참고 집에까지 왔다. 지금까지도 그 자재는 화분 올리는 도구로 잘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다리가 많이 아파서 자전거가 없으면 노인복지관을 가기도 힘이 든다. 한 손으로는 운전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래서 뒤 안장에 파란 우유 상자를 부착해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기자가 된 후에도 취재하려면 자전거를 타고 달빛공원에 갔지만 지금은 그것도 힘에 부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자전거와 함께 한다. 다른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밀고 다닐 때 나는 자전거를 의지한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나의 다리가 되어준 자전거. 자전거는 여전히 나의 친구이며 나의 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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