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슬

[이준황n]

고구려 건국신화는 동아시아 건국신화 가운데 유일하게 술 얘기로 시작된다. 고려 제 23대 고종(재위

1213~1259) 때 문신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 편」에는 서사시로 된

고구려 건국신화가 나오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비단자리 눈부시게 깔아놓고

     금동이에 맛좋은 술을 차려두니,

     짐작대로 찾아와 대작하더니 취했구나.

천재(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궁궐을 화려하게 꾸며놓고 맛좋은 술을 준비해둔 뒤 물의 신인 하백의

세 딸 유화‧원화‧위화를 유혹했는데, 이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더니 대취하여 뻗었더라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해모수는 세 자매 가운데 가장 잘생긴 유화를 골라 성폭행하여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게

했다. 이 신화는 2천여 년 전의 사회상과 性풍속도를 점쳐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모수가 유화를 대취하게 만든 ‘맛좋은 술’은 한자로 순지(淳旨)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淳은 진

하고 독한 술, 旨는 아주 맛좋은 술을 뜻한다. 따라서 순지는 진하고 독하면서도 아주 맛좋은 술, 즉

안동 제비원소주쯤 되는 특주였던 모양이다. 순지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2천여 년 전

에 이미 누룩을 발효시키는 기술을 포함하여 고급 증류주를 빚을 수 있는 고도의 양주(釀酒)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동강 하구에서 발굴된 약수리고분에는 귀중한 사료인 벽화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분이 축조된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벽화에는 한 여인이 돌확 앞에 쭈그리고 앉아 키질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 어린 시절까지 시골 디딜방아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광경이 그대로

그려져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벽화는 매우 선명하여 디딜방아의 모양이며 여인의 옷맵

시까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시절에 이미 이렇게 방아를 찧어 밥도 해먹고 떡도 해먹고 술도

담아 마셨던 것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굴된 무용총 벽화에는 연회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무용총은 고구려 고분 가운데 가장 선명한 벽화로 유명하다. 일곱 명의 무용수가 춤

추는 모습이며 입고 있는 무용복이 시대적 특성을 잘 나타낸다. 여러 백성들이 둘러서서 무용수들의

춤사위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연회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는 법, 시종들이 부엌

에서 연신 음식을 나르고 있다. 쟁반에 받쳐 들고 있는 음식그릇이 매우 고급스러워 보인다. 시종들

을 따라 한 여종이 술병으로 보이는 도자기를 들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중

국의 여러 사서에도 ‘고구려인들은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기

록되어 있다.

황해도 안악에서 발굴된 안악3호분은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의 크기는 남북 33

m, 동서 30m, 높이 6m로 지하궁전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규모다. 고분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

의 규모는 더욱 크고 정교하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부엌 그림이 나오는데, 부뚜막이나 아궁이가 한

결 세련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아궁이에는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거대한 토기 솥에서는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데, 한 여인이 솥뚜껑을 열고 음식이 다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찔러보고 있다. 극사실

주의 화풍이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술을 담그기 위해 고두밥을 찌고 있는 형상으로 추정된다. 고

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식음(食飮) 문화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듯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술과 관련된 도구는 방아‧솥‧시루‧단지‧그릇‧수저 등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가 오늘날 전통주를 담그는 술도가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이다. 2천년 세월이 흘러도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술을 양산(量産)하기 위해 그릇

이 좀 더 커지고 자동화가 더해졌을 뿐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 있는 각종 문헌을 종합해 보면 술의

원료로는 좁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쌀보다는 좁쌀이 흔했다는 뜻인데, 좁쌀은 기장‧보리‧수수‧콩

과 함께 고구려의 주식이었다. 10여 년 전 단양에서 조 껍데기 술을 마셔본 적이 있는데, 맛이 좋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가 너무 독해서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좁쌀로 담근 술은 빛깔이 진하고 독하다. 쌀에 비해 당화(糖化)와 발효가 불규칙적으로 진행되기 때

문에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도 그만큼 더 어렵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좁쌀을 찌자마자 엿기름을 고루

섞어 뜨겁게 띄우는 방법을 택한다. 다른 잡곡도 마찬가지지만, 좁쌀로 술을 담글 때는 쌀술에 비해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엿기름과 누룩은 동아시아에서만 사용하는 전통기법으로 술에

맛과 영양을 더하는 신비한 매개물이다. 누룩을 제조할 때 콩을 사용하여 술에서 장향(醬香)이 나도

록 한 것도 고구려인들이었다. 중국의 박물지인 『흠정사고전서』에는 이 기법이 외국, 즉 고구려에

서 들어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고구려로부터 누룩과 엿기름 제조술을 받아

들여 술을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밑바닥에 음식이 눌어붙어 맛을 훼손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토기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증기로

찌기 시작한 것도 고구려인들이었다. 시루의 발명이다. 아마도 수백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해낸

‘세기적 발명’이었을 터. 시루는 음식의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종로복떡

방 같은 기업에서는 상굿도 2천 년 전에 고구려인들이 발명한 시루로 전통 떡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안악3호분의 고분벽화에서 한 여인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뚜껑을 열고 긴 수저로 음식을 찔러보는

모습은 바로 시루로 음식을 찌는 장면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서우철]

태풍의 영향권이 수시로 바뀌고 다소는 수그러들어 다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동안 가뭄 탓으로 채소류가 흉작이 되어 무우,배추등이 고가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번 비로 고갈을 면하였으면 합니다. 가까운 곳 주변 산책도 하시며 즐거운 주말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