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서약
노세웅
결혼 12년째 되던 봄, 순오는 아내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순오와 그의 아내는 너무 달랐다.
순오는 말수가 적었고, 그의 아내는 대화를 해야 마음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순오는 화가 나면 입을 닫았고, 그의 아내는 끝까지 이유를 따졌다. 순오는 지나간 일은 덮어 두자고 했지만, 그의 아내는 덮어 둔 일일수록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점이 좋았다.
순오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아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다름은 매력이 아니라 불편함이 되었다. 아내의 말은 순오에게 잔소리로 들렸고, 순오의 침묵은 아내에게 무시로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를 피해 다녔다. 식탁에는 밥과 반찬이 놓였지만 따뜻한 말은 없었다. 밤이면 같은 침대에 누웠지만, 두 사람은 등을 돌리고 각자 다른 세상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순오는 이혼서류를 준비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순오가 말하자 그의 아내는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물었다.
“정말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을까?”
“당신도 힘들잖아. 우리 둘 다 편해지는 길이야.”
아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편해지는 길이 언제나 옳은 길은 아니잖아.”
그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순오는 듣지 못한 척했다.
며칠 뒤, 순오는 지방에 사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고 자란 고향 그집에 아직도 살고 계신다. 우리 집에 같이 살자고 해도 응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소신이 뚜렸하시고 사리가 밝은 분이시다. 어머니께 이혼 사실을 말씀드리고 새 출발을 하겠다고 알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시장 골목 끝에서 작은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자 멸치국물 냄새가 따뜻하게 퍼졌다.
“혼자 왔니? 며느리는?”
“바빠서 못 왔어요.”
순오는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손님이 뜸해졌을 때, 어머니가 순오에게 도시락 하나를 내밀었다.
“건너편 시계방에 좀 가져다드려라.”
“시계방 할아버지요?”
“그래. 오늘은 비가 와서 할머니를 혼자 두고 나오지 못하실 게다.”
순오는 우산을 쓰고 오래된 주택가로 걸어갔다. 시계방 주인 최 노인은 순오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었다. 그는 평생 고장 난 시계를 고치며 살았다.
최 노인의 집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순오가 안으로 들어가자 마루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내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그의 아내는 방금 마당의 빗물 속을 맨발로 돌아다닌 듯했다. 바지는 흙탕물에 젖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비에 달라붙어 있었다.
“할머니, 가만히 있어요. 발 다쳐요.”
최 노인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내 남편 어디 갔어?”
노인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양반이 나한테 부탁했어요. 할머니 잘 돌봐 드리라고.”
“정말이야?”
“그럼요. 아주 단단히 부탁했어요.”
그제야 할머니는 얌전히 발을 내밀었다.
순오는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할아버지, 힘드시지요?”
최 노인은 젖은 양말을 벗겨 내며 웃었다.
“힘들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왜 안 힘들겠나.”
“요양원에 모시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어요?”
“생각해 봤지. 나도 늙었으니까.”
노인은 아내의 발에 연고를 바르고 새 양말을 신겨 주었다.
“그런데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네. 내가 할 수 있는 동안은 내가 해야지.”
그 말은 순오에게 대단한 신앙고백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저녁에 밥을 먹겠다는 말처럼 담담했다.
벽에는 빛바랜 결혼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젊은 시절의 최 노인과 그의 아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정말 많이 사랑하셨나 봅니다.”
순오가 말하자 최 노인은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젊을 때는 사랑했지. 그런데 살다 보니 미울 때도 많았어.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낸 날도 있었고, 짐을 싸서 집을 나가려고 한 적도 있었네.”
순오는 뜻밖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함께 사셨어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50여 년 전의 결혼식 순서지였다. 종이는 누렇게 변했고 글자도 희미해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읽었던 혼인서약이 적혀 있었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한 문장을 가리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그는 더 읽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잠시 후 노인이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의 병을 예상하고 서약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겁이 나서 못 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계속 지키시는 겁니까?”
“서약은 미래를 다 알고 하는 약속이 아니네. 미래를 모르면서도 그 사람이 혼자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지.”
그 순간 방 안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여보! 어디 있어?”
최 노인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여기 있어요. 안 갔어요.”
노인이 방문을 열자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이 내 남편이야?”
“그래요. 이제 알아보겠어요?”
할머니는 노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최 노인은 서운한 기색 없이 웃었다.
“괜찮아요. 내가 당신을 알아보니까 됐어요.”
순오는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국숫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최 노인의 말이 순오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알아보니까 됐어요.’
순오는 아내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원망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그러나 그는 과연 아내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했던가. 아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 때문에 외로워하는지 진심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결혼식 날, 순오는 아내의 손을 잡고 어떤 형편에서도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약속을 사랑이 넘치던 날에만 유효한 말처럼 여기고 있었다.
순오는 어머니에게 이혼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서울로 돌아왔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그의 아내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순오가 서명해야 할 이혼서류가 놓여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
아내가 말했다.
순오는 의자를 당겨 아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의 아내는 순오가 서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감았다.
순오는 서류를 천천히 반으로 찢었다. 다시 한 번 찢고, 또 찢었다.
아내가 놀란 얼굴로 순오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당신을 다시 사랑할 자신이 생겨서가 아니야.”
순오의 말에 아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순오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다시 사랑하려고 노력할 용기는 생겼어.”
“무슨 뜻이야?”
“우리가 결혼하던 날 했던 약속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
순오는 최 노인의 말을 들려주었다. 그의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
“당신이 변할 수 있을까?”
아내가 물었다.
“한꺼번에는 못 변할 거야. 또 실수하고, 화도 내고, 당신을 힘들게 할지도 몰라.”
순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그래도 떠나지는 않을게. 당신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날에도 내가 먼저 당신을 이해하려고 해 볼게.”
아내는 순오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노력할게.”
그날 밤 두 사람은 오래 이야기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서로 무엇이 아팠는지를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그 뒤로 모든 것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성격이 달랐다. 사소한 일로 서운해했고, 때로는 옛날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다툼이 생길 때마다 두 사람은 한 문장을 기억했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잘못을 무조건 참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처를 숨기거나 부당한 일을 견디겠다는 뜻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