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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공감각적 이미지’, 장민용의 실험영화
서은주
장민용은 한국 독립영화를 내러티브 위주의 서사 영화와 내러티브를 벗어난 실험 영화로 구분할 때, 실험영화 진영으로 분류되어온 사람이다. 또한 한국 실험 영화사적 맥락으로 보면 삼 세대 실험영화 작가 군에 속한다. 해방 후 한국 실험영화의 역사는 1960년대 ‘시네포엠’, 1970년대의 ‘영상연구회’ 및 ‘카이두 클럽’과 ‘영상시대’의 한 멤버였던 홍파의 작업, 그리고 권중운 선생이 이끌어온 1990년대 ‘뉴 이미지 그룹’을 거친 지하창작집단 ‘파적’과 김정구의 작업, 부산 ‘동녘 필름’의 전수일과 유상곤, 끝으로 채기와 윤성호, 곡사, 그리고 장민용으로 이어진다.
일 세대가 ‘시네포엠’, ‘카이두 클럽’과 ‘영상시대’의 작가들인 홍파와 한옥희 감독이라면, 이 세대로는 뉴 이미지 그룹에서 활동한 권중운, 임창재 등이 언급될 수 있으며, 삼 세대는 독립영화 진영의 실험영화 작가들인 채기와 곡사, 그리고 유학파인 장민용, 허기정 등이 거론될 수 있다. 말하자면 장민용은 실험영화사적 계보로 볼 때 제 3세대 실험영화감독이며, 유학파와 자생적인 독립영화 진영으로 구분할 때는 유학파에 속한다. 특히 그의 영화 작업은 유학파 감독들의 졸업 작품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그치고 마는 한국의 특수한 제작 현실에서, 유학파 실험영화의 흐름을 끈끈히 잇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장민용은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튜트에 진학하여 실험영화 연구와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학 당시 제작한 작품은 「The Dark Room」(2001)과 「The moment」(2002)이다. 「The Dark Room」은 샌프란시스코 클리프 하우스의 ‘자이언트 카메라’라 불리는 ‘카메라 옵스큐라’ 스크린에 비친 바다 형상으로 카메라 매체의 가능성을 실험해본 작품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필름페스티벌인 뉴욕, 토론토, 샌프란시스코 필름 페스티벌에서 상영되면서, 영화 매체의 근원적 연구 및 원시적 시각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었다는 호평을 얻은 바 있다. 「The moment」는 움직임의 극히 짧은 순간을 매크로렌즈로 촬영한 영화로, 사진을 층층이 쌓아올림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이른바, ‘시각적 침묵’으로서의 한 찰나를 포착한 작품이다.
현재 장민용은 서경대학교 영화영상학과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와 영화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The moment」 이후로 대나무 풍경을 오브제로 ‘변화와 생성의 순간’을 표현한 「숨, The breath」(2007)을 발표한다. 이 영화는 2008년 전주국제영화제의 ‘한국단편의 선택 : 비평가 주간’ 섹션의 경쟁부분에서 상영되었고, 제 10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 선정되어 ‘후지필름 상’을 수상하면서 두루 회자되었다. 장민용은 비록 발표한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영화 매체 본연의 존재론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몇 안 되는 실험영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이전과 확연히 바뀐 제작 환경에서 새로운 매체로서의 디지털 영화에 대한 연구와 제작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기원의 탐구
예술가는 끊임없이 미래의 타자를 길러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세계는 새롭고도 이질적인 그 타자의 틈입으로 계속 변화되고 또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장민용의 대표작 「숨(The breath)」의 한 장면(망원 렌즈로 촬영된 대나무 숲)
그렇다면 장민용에게 있어 타자를 길러내는 방식이란 영화매체 본연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민용은 인간에게 있어 영원한 먼 타자인 기계, 즉 카메라로 산출되는 기술 이미지인 영화를 통해 기존의 관행적 표현을 벗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영화들에 있어 당연시되었던 이미지의 연쇄 자체를 의문시하면서 동시에, 논리적인 인과율에 따른 내러티브 전개 대신 이미지의 변형 전략에 천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이미지의 변형 전략들이 관객들의 관람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관심 또한 잃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민용은 영화의 기원 및 카메라 메커니즘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영화 매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다.
영화 매체의 기원에 대한 관심은 공교롭게도 오브제의 선택과도 상동을 이루고 있다. ‘근원적인 움직임’으로서 한 찰나를 포착하려는 매체인 카메라 앞에 ‘갓난아기’라는 근원적 생명 형태의 오브제가 놓인다. 또 물질의 기원 격인 ‘해변의 바다’ 오브제를 원초적 카메라 매체인 ‘카메라 옵스큐라’로 탐색함으로써, 물질의 ‘기원과 운동’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며(「The Dark Room」), 마지막으로 세계의 ‘근본적인 리듬과 질서’로서의 ‘변화와 생성의 과정’을 감지하기 안성맞춤인 영화매체는 근원적 현상으로서의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자연 풍경인 대나무 숲 오브제를 관찰하고 있다(「숨, The breath」). 그러니까 장민용에게 있어 대상의 근원성은 항상 영화매체의 기원과 연동되어 있는 셈이다. 이는 그의 영화에 있어 내용과 형식, 그리고 소재와 표현방식이 무리 없이 서로 소통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매체의 기원 및 메커니즘에 대한 근본적 탐구란 결국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소외시켜 왔던 어떤 근원으로서의 순수한 것을 일깨워주는 작업과 다름없음을 의미한다. 「The Dark Room」에서 다양한 카메라 렌즈로 이질적인 ‘보기’의 방식들이 중첩되고 이행되는 과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우리 스스로 놓치고 사는 세계의 시원적 형태를 다시 되찾고 있다. 「The moment」에서 이색적인 카메라 매체를 사용한 결과 산출된 이미지들과 파편적 편집방식은 일상적이고도 상투적인 우리의 감각을 열어준다. 그 결과 움직임의 가장 근원적인 한 순간을 발견하도록 하는 체험을 가져다준다. 「숨, The breath」 또한 특별한 카메라 매체들을 동원한 감각적 이미지들로 대상과 관객을 순수한 감각의 공동체로 이어주고 있다. 이는 모두 인간 중심의 상투적이고도 도식적인 지각 방식을 벗어나게 해주는 영화매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순수한 운동
장민용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미지 뒤에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지 위 그 이미지와 관객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이다. 그의 영화는 이미지와 감각이 직접적으로 맞붙는 일종의 격전장이다. 장민용의 이미지는 매체 고유의 개별적이고 내재적인 방식으로 창안된다. 그것은 일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지각에 의한 심도(깊이 감)로 조성되는 환영효과가 일체 삭제되고 있는 이미지다. 그래서 서사 작용에 의한 의미 관계를 걷어내고, 오로지 이미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 가능하도록 견인한다. 그의 영화들에 이미지의 평면성을 노출시키는 다양한 렌즈들과 파편적 몽타주(편집) 방식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다. 그로 인해 관객은 모종의 변형 가능성, 곧 일정한 감각의 변화를 요청받지 않을 수 없다.
「The Dark Room」에서 광각렌즈로 재촬영된 장면(파도치는 해변의 바다)
말하자면 매크로렌즈와 광각렌즈, 그리고 망원렌즈에 의한 다양한 프레임 방식과 피사체가 놓여있는 전반적 상황에 대한 조감이 불가능하도록 극대화시키는 클로즈업 화면 구성, 또 파편적인 몽타주, 바로 이들이 장민용 영화의 주된 표현 기법이다. 특히 그의 첫 영화 「The Dark room」(2001)은 광각렌즈로 인한 입체적 이미지와 망원렌즈 및 매크로렌즈의 클로즈업 구성으로 조성되는 평편한 이미지가 두드러진 작품이다. 여기에 해변의 바다를 대상화하며 바라보는 식의 동일시 시선 방식과 카메라 옵스큐라 및 매크로 카메라렌즈를 통한 자기 반영적 거리두기 시선의 방식이 함께 놓여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다양한 카메라의 눈을 통한 여러 이질적 ‘보기’의 방식들이 중첩되어 나열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해변의 바다’라는 오브제 특유의 볼륨감과 빛깔, 그리고 유동성을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다.
「The Dark Room」에서 자이언트 카메라(카메라 옵스큐라)로 촬영된 바다
영화가 시작되면 타원형의 테두리 안으로 알 수 없는 형상이 하나 보인다(위 삽입 이미지). 관객은 의아스럽다. 도대체 타원형의 테두리가 무엇인지, 그 테두리 안의 형상은 또 무엇인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 다양한 매체들로 촬영된 이미지들이 나열됨으로써 그 형상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판명난다. 사실 그 타원형의 이미지는 해변의 바다를 카메라 옵스큐라로 촬영하고 이를 매크로렌즈를 장착한 카메라 필름으로 다시 변형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 클리프 하우스의 ‘자이언트 카메라(카메라 옵스큐라의 이름)’가 구멍을 통해 벽에 이미지를 투사시키고, 이를 다시 광각렌즈와 매크로렌즈로 굴절하고 확대시킨 것이다. 해변의 바다는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1차 왜곡되고, 다시 광각렌즈로 2차 왜곡된 이미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크로렌즈가 이를 다시 확대시켰다.
그런데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 즉 인간의 눈과 카메라 메커니즘의 시각과의 중첩 및 나열로 인한 재해석의 과정으로 인해 이미지의 환상효과는 소거되기 이른다. 해변의 바다는 더 이상 하나의 형태로 재현되거나 고정되는 실체가 되지 못한다. 여러 시선이 들고 나는 것을 거친 바다는 처음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대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순간 어떤 이데올로기나 개념에 오염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의 현실이 나타난다. 그 새로운 현실로 인해 바다의 파도는 단지 움직임의 표면이라는 일종의 껍데기로 전환된다. 그것은 의미 작용의 현실로 환원될 수 없는 ‘순수한 운동’이다. 게다가 소리의 부재는 그 다중 시선의 교환을 더욱 노골화한다. 매체의 시각과 인간의 시선 간의 충돌, 즉 대상의 동일시 시선과 다양한 렌즈 및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한 거리두기 시선 간의 차이와 간격에서 오는 긴장은 그 침묵으로 더 한층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민용에게 있어 영화란 세계의 모든 가능성의 시선이 뒤섞인 잠재적 공간, 일명 ‘검은 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태초의 인간 이후 놓치고 살았던 우리들의 근원적이면서 무한한 차원의 감각의 방식을 되돌려 주는 장소다. 장민용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기구의 발명을 가능케 한 16세기의 시각 기구인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존경을 바침과 동시에 인간의 눈과 상이한 카메라 렌즈에 대한 연구를 시도한다. 그럼으로써 그 다양한 시선의 방식으로 ‘본다’라는 감각의 방식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그 이질적인 시선의 교환 과정은 장민용의 다른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각적 침묵
「The moment」에서 메크로 렌즈로 촬영된 장면(잠자는 아기의 눈)
장민용의 모든 영화는 소리가 없다. 더구나 「The moment」(2002)는 색마저 다 빠진 흑백 톤이다. 여기에 클로즈업의 확대 구성 및 얕은 심도(깊이 감)의 평편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매크로렌즈가 주로 쓰였다. 또 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들을 파편화하여 드러냄으로써 통일적 공간 구성에 제동을 거는 몽타주(편집) 방식도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장민용은 이미지의 어떤 단 한 순간도 의미 관계와 환영 효과로 귀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틸 사진을 층층이 쌓아 올림으로써 동영상을 꾸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환영의 연속성을 피하고 싶어서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청각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치 ‘시각적’으로도 ‘침묵’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관객은 가능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아기의 미묘한 몸짓, 즉 스크린의 극히 작은 소요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그 ‘시각적 침묵’의 기획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서 흑백 톤의 매크로렌즈 이미지는 아기의 미묘한 움직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필름의 물질성을 촉각적으로 느끼기에 좋다. 특히 흑백 이미지는 실제 현실을 추상화시킨 느낌을 줌으로써 환영 효과를 얼마간 소거하고 있다. 또 매크로렌즈를 통한 클로즈업의 확대 구성은 현실과 거리를 두는 시선, 즉 고전적인 원근법이 기능하지 않는 카메라의 눈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미지의 평편함을 시각적 효과로 가지는 흑백 톤의 매크로렌즈 클로즈업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행위의 드라마적 요소들에 대한 판별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이미지 자체의 정서적 차원에 대한 집중을 더 한층 요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조명 상태를 낮춰 컨트라스트(조명을 통한 색채 대비 효과)를 줄임으로써 필름의 입자를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그 결과 관객은 내러티브적으로 조성되는 의미 작용보다는 대상 그 자체, 즉 아기의 아주 작은 미동, 그 일시적인 미묘한 움직임에 시선이 자주 붙들린다.
아기의 작고도 순간적인 운동, 그 우연하고도 즉흥적인 움직임은 즉각적인 사태다. 이는 결코 연출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움직임 자체는 카메라에 담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다. 촬영된 순간이란 사라져버리는, 이른바 덧없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저히 내러티브 관계로 재현되거나 의미로 규정될 수 없다. 오직 영화적 의도나 구성으로 수렴되지 않은 채 빠져나가는 이미지의 잔여, 말하자면 의미 관계 밖 무의미한 것들로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해석이나 의도로도 환수되지 않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 그 우연하고도 즉흥적인 형태로 잠시 환기될 따름이다. 바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 이 영화는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아기의 현실을 의미 관계의 현재로 환원시킬 수 없는 순수한 것으로 보존하고 있다. 아기의 움직임은 근원적이고도 자동적인 운동이다. 일정한 의미 관계나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물들기 이전, 살아 있음의 약동이 전부인 운동이다.
「The moment」에서 파편적 몽타주로 구성된 장면(아기의 발)
그 순수한 운동은 편집의 차원도 돕고 있다. 장민용 특유의 파편적 몽타주 방식은 흑백 톤의 평편한 매크로렌즈 이미지와 함께 화면의 깊이 감을 파기함으로써 이미지의 환영 효과를 제한한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전반적인 상황이나 전체적인 공간을 조감할 수 있는 설정 쇼트가 없다. 어디에도 아기의 전신이나 아기가 환경과 관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관객은 깊이 없는 평편한 이미지와 그들의 파편적 배치로 인해 아기의 미묘한 움직임 그 자체에 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더 이상 아기가 놓여있는 상황 및 아기의 움직임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의미 작용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움직임의 미묘한 순간 그 자체, 환영과 같은 유기적인 조직으로 관습화되기 이전 태초의 순간(‘The moment’)으로서의 움직임만이 유일하게 포착될 뿐이다.
어쩌면 장민용은 영화 매체 본연의 방식을 통해 아기의 눈과 아기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 아이의 내부에서 세계를 새롭게 다시 보는 태도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기는 뚜렷한 형체로 대상을 움켜쥐거나 의미 관계로 규정할 줄 모른다. 다만 색 없이 흐릿하고 뭉클한 감각의 덩어리로서의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따라서 아기의 움직임은 이름이 없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움직임의 즉각적 순간, 그 찰나(‘The moment’)만이 오직 경이로움으로 빛난다. 그렇다면 「The moment」를 통해 우리는 바로 아기의 시각처럼 경계를 모르는 태초의 원시적 시선을 소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장민용의 영화는 완전한 시지각적 절대성과 시각의 순수성에 가닿는 체험의 방식으로 세계와 인간 사이를 개입하고 있는 것 같다.
공감각적 이미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희망 없이 바라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를 계속 하다보면 어느새 자기 자신이 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심해지는 시간이 불현듯 흘러드는 것이다. 순간 대상이 물리적이고도 독자적인 감각의 형태로 변한다. 마치 「The Dark room」에서 바다의 물결, 그리고 「The moment」에서 아기의 움직임이 ‘순수한 운동’ 으로 전환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의미로 가득 찬 우리의 사유 체계가 무너지는 틈 사이로 껍질로 만져지는 것 같은 현실이 환기된다.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은 그렇게 나타난다. 따라서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대상을 의미 관계로 포섭하고 규정하는 식의 시선 작용으로는 더 이상 가능하지 못할 것 같다. 세계는 그 특권적 시선조차 희망 없이 놓아버릴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본연의 제 모습을 드러내주는 이른바, 잠재적 차원의 것이니 말이다. 장민용의 영화는 바로 그 차원을 향해 열려 있다.
이는 특히 「숨, The breath」(2007)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 영화는 대나무 풍경을 다양한 크기와 각도로 촬영하고 편집했다. 여기서 장민용은 대나무 풍경을 하나의 특권적 시선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다. 또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나 관념적인 철학자들처럼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해석의 틀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영화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기술이다. 그러므로 카메라로 인해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관찰의 태도가 일관되게 적용되는 기계 이미지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제 숙명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대나무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에 과학자의 현미경 사진, 혹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 이미지와 같은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태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민용은 다양한 화면크기와 각도가 가능한 촬영 매체와 편집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대나무 풍경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 말하자면 대나무 풍경의 잠재적 차원을 포착하고 있다.
「숨, The breath」의 첫 장면
(매크로렌즈로 확대 촬영되고 파편적으로 편집된 대나무 표면)
스크린이 밝아지면 대나무 표면을 포착한 이미지 파편이 다섯 컷의 클로즈업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도 역시 대상의 전체 모습이나 전반적인 상황을 조감할 수 있는 설정 쇼트를 넣지 않았다. 대나무는 부분적인 모습으로만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형상을 얼른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이리 저리 대상을 살피면서 전체 형상을 상상해보려 애쓴다. 하지만 여유는 충분치 않다. 끊임없이 크기와 방향이 바뀌면서 툭 툭 던져지는 파편적 이미지들로 인해 전체적 형상에 대한 추론, 말하자면 이미지의 환영 효과가 지속적인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나무 파편 이미지들은 모두 매크로렌즈와 망원렌즈로 촬영되었다. 그들 렌즈로 인해 평편하고도 극대화된 이미지들은 스스로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 독자적 존재감을 획득하고 있다. 이들에게 환영이 조성될 특권적 시선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숨, The breath」에서 바라보는 눈을 다시 자기 반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영화상으로는 대나무 숲이 담겨진 눈 -타원형- 형상이 계속 깜빡거림)
또한 그 장면들은 모두 핸드 헬드(카메라를 고정시키지 않고 손으로 들고 찍는 방식)로 찍혀있다. 매크로렌즈와 망원렌즈로 도무지 환영의 깊이 감을 느낄 수 없는 이미지들은 핸드 헬드로 인해 더 한 층 그 정도가 심해진다. 핸드 헬드로 흔들리는 화면으로 인해 스크린의 이차원적 평면성이 폭로됨으로써 환영 효과가 제한당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매체의 본래 얼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대나무 풍경에 대한 감정 이입,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동일시의 시선을 교란시키고 있다. 거기에다 대나무 풍경의 동일시 시선을 다시 자기반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위 삽입 이미지의 경우)을 덧붙임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동일시와 거리두기 시선이 마구 섞이는 일대 혼란의 국면에 들어서게 한다.
바로 그 혼란의 순간에, 말하자면 동일시와 거리두기 시선 간의 순환 및 이행의 과정 중에, 갑자기 대나무 풍경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드러난다. 물론 그 현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동일시, 즉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재현되고 복원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과 다시 그를 거리 두기하는 이질적 시선 간의 부단한 교환의 과정으로 포착되는 이른바, ‘변화와 생성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변화와 생성의 과정’ 자체가 이 영화가 일련의 대나무 풍경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숨’일지도 모른다. 장민용의 말처럼, 영화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변화와 생성의 순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장민용은 ‘변화와 생성의 과정’으로서의 ‘숨’, 그러니까 영화 「숨」과 「The Dark room」, 그리고 「The moment」에서의 이질적인 시선들의 이중적 교환으로 얻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곧 이미지의 절대적 기원에서 바로 우리들 감각의 본적本籍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리가 실리지 않는 영화들, 오직 이미지로만 가득 찬 그 곳에서 마치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모두 장민용의 이미지로 창안된 어떤 절대적 근원의 장소에서 우리들의 서로 다른 감각이 동시적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영화들을 일종의 ‘공감각적 이미지’라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