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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마태복음 4:12-25
오늘날 한국교회는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다음세대들은 마귀가 건네는 음란물 선악과를 먹고 병들어서 교회학교가 현저히 줄고 한국교회의 미래가 심히 어둡습니다. 코로나이후 한국교회에는 어둠이 강하게 드리웠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강한 빛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는 지금 빛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큰 빛의 역사를 이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통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큰 빛의 역사를 이루셨는지를 배우심으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과 요단강 동쪽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던 헤롯은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는 통치자로서의 덕에 어긋난 것이요, 더러운 행위였습니다.(레18:16,20:21) 그러나 그는 권세를 쥔 왕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일로 그를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양심이요, 등불로서 그의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시대는 참으로 불의가 지배하는 시대요, 정의와 진리는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시대였습니다. 종교 지도자조차 형식적이고 세속적이 되어 어둠에 시달리는 세대들을 전혀 돕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흑암의 세력에 끌려 다니며 죄짓다가 자살하는 등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를 비추는 시대의 등불이요, 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잡힌 것은 그 시대의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증거한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은 광명한 태양처럼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신 예수님은 조용히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례 요한이 잡혔으면 구명운동이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북쪽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성경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대로, 시대의 요구대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과 부딪힐 때가 아닌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셔서 가버나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역의 교통의 중심지로서 전도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사역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5,16절을 보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사역을 보고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그 지역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려졌습니다. 이는 갈릴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헬몬산과 갈릴리 호수가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슬픔과 운명과 한이 맺힌 곳이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되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 있던 시절, 이곳은 북이스라엘에 속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왕은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사마리아 사람을 앗수르로 데려가고 사마리아에는 앗수르 사람을 이민시킴으로 사마리아에는 혼혈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민족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갈릴리는 북쪽이기에 제일 먼저 전쟁터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갈릴리 지역을 이방의 갈릴리라 부르며 멸시하고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 자아에 대한 정체감이나 자존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다 이런 곳에 이런 혈통으로 태어나서 무시를 받고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자부심도 없었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무시를 받고 이방인들로부터도 무시를 받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자학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형편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서 혼돈과 방황속에서 헤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만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완전한 절망과 무기력이 그들을 지배하였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두려움과 불안, 초조, 긴장, 스트레스와 어두움이 항상 그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허무, 무의미, 무목적, 무정, 무자비같은 사망권세가 그들을 늘 사로잡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참된 만족과 기쁨은 없고 염려와 불안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괴롭고 허무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순간의 쾌락을 좇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핸드폰과 인터넷 성인물을 뒤지면서 탐욕, 정욕,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고통하며 번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것은 사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것은 그늘진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중에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요즘 이 시대 사람들의 상태와도 같습니다. 어디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고독하고 무의미하고 괴롭고 허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그러자 갈릴리의 어두움은 모두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에 앉은 그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그들에게 빛이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빛이 아니라 큰 빛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내리쬐는 따스한 봄날의 햇살같이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새벽을 몰고 오는 돋는 해같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큰 빛되신 예수님은 우리 내면의 어두움을 근본적으로 물리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내면에 죄와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참된 희망과 비전을 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공급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병든 내면을 치료하시는 치료의 광선이 되십니다. 빛되신 예수님안에 있을 때 모든 것이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모든 영적 어두움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발견할 때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생명의 빛, 사랑의 빛, 죄사함과 영생의 빛, 참 자유함의 빛을 비추십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정치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로 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근본적으로 죄문제요 죄문제가 곧 어두움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통도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결코 어떤 문제도 진정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치 않으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빛을 선물해 주십니다. 참된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분명한 삶의 의미와 목적,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흑암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십니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17-25절은 큰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감당 하셨는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빛의 역사란 어떤 것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안에서 어떻게 빛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을 잘 받아들여야 빛의 역사가 시작됩니다.(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전파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최고의 가치와 희망을 두어야 할 것이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어짜피 죽을 인생이니까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행복의 나라요, 지옥은 마귀가 다스리는 고통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우리들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현재적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땅에 살며, 언젠가는 죽을 육신의 몸을 입고 있지만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영원히 천국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않는 자의 삶은 이땅에서도 지옥같은 삶이요 마침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천국의 메시지는 천하만민 모두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을 말해줍니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진실되게 회개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중심한 삶을 살겠다는 근본적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회개한 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강하게 들어와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을 따름으로 빛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18-22)
17절 상반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해변에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해변에 다니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시고 키우셨습니다. 이는 인재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한자성어에도 일년지계는 농사, 십년지계는 식목, 백년대계는 인재양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대를 섬기고 변화시키려면 이것을 감당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시대를 변화시킬 사람을 찾아서 사람을 키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특히 복음역사는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역사임으로 사람을 키우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사역의 핵심입니다.
그러자면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빼어난 제자양성가요, Excellent한 성경선생이요, 영적 지도자가 되는 데는 특수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배우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초청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보화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사도 바울과 같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때 그들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요, 위대한 사상가요, 제자 양성가요, 성경선생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들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잘 배우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어둠이 물러가고 강한 빛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셋째,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의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심으로 빛의 역사가 일어납니다(23-25)
23,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양무리들의 실제적인 아픔과 고통을 보시면서 그들의 고통을 돌봐 주셨습니다. 먼저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teaching으로서 영적무지를 깨우치고, 윤리관, 가치관 등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는 preaching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병든 것,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healing으로서 백성들의 육적인 질병과 고통을 감당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백성들을 향한 예수님의 실제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무리들이 영육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시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자들은 앓는 자,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시대에 큰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제자가 되어 따르면 반드시 강한 빛의 역사가 나타나고 연약함이 치유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빛을 받아 빛나는 삶이 되시고 이 시대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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