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미 도서상 수상작!
2013년 내셔널 휴머니티스 메달 수상 작가!
작가들의 작가, 조앤 디디온의 대표작
가족을 잃은 상실의 아픔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한다. 게다가 일상을 늘 함께했던 이를 잃는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알 수 없을 테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남은 인생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칠지. 하지만 가족을 잃는 슬픔은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통일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아직 겪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겪게 될 고통. 예고된 고통, 비애, 비통.
작가들의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작가의 존경을 받았던 조앤 디디온은 소설, 에세이, 칼럼 등 다양한 글로 이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을 잃은 후, 약 1년간을 기록한 「상실(The Year of Magical Thinking)」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그녀만의 특유의 언어로 담담하고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작품으로 조앤 디디온은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다.
조앤 디디온은 2003년 12월 30일 남편을 잃었다. 그는 독감이 악화하여 패혈증에 걸린 딸 퀸타나를 면회하고 돌아온 후 급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누구보다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으로 보였던 보호자 조앤 디디온은 사실 마법 같은 사고로 그 현실을 버티고 있었다. 남편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그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다는 희망. 설상가상 병에서 회복해 나가는 것으로 보였던 그녀의 딸마저 다시 병상에 눕고 만다. 남편의 죽음만큼이나 갑작스레 예고 없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태를 살펴보려 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라지지 않는 마법적인 사고에서 굳이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것을 지켜보는 이는 그저 안타깝고 마음 아플 뿐이다. 그녀를 동경했던 독자라면, 그토록 냉철하고 분석적이며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작가의 약한 모습을 바라봐야 해서, 더욱더 큰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자기를 향한 시각에서도 특유의 그 예리함을 잃지 않는 작가로서의 자세를 보면서, 자연스레 존경심이 샘솟는다. 그와 함께 그녀가 펼쳐내는 삶과 죽음에 관한 깊은 사유는 우리에게 인생에 관한 성찰을 안겨준다. 독자는 조앤 디디온의 글이 풍기는 특별한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애는 다르다. 비애는 거리가 없다. 비애는 파도처럼, 발작처럼 닥쳐오고 급작스러운 불안을 일으켜, 무릎에 힘을 빼고 눈앞을 보이지 않게 하며, 일상을 까맣게 지워버린다. 가까운 사람을 잃음으로써 비애를 겪은 사람은 거의 모두가 이런 ‘파도’ 현상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본문 40p
‘부검’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부고’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다. ‘부검’은 나와 존과 병원 사이의 일이지만, ‘부고’는 그게 정말로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일이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일어났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논리적으로 터무니없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존이 죽은 게 몇 시인지, 로스앤젤레스도 그 시간이 되었을지를 계산해 보고 있었다.
-본문 44p
이제 안전해, 나는 UCLA 집중 치료실에서 퀸타나를 처음 봤을 때 이렇게 속삭였다. 엄마 왔어. 이제 괜찮을 거야. 퀸타나의 머리 절반은 수술 때문에 짧게 깎여 있었다. 긴 절개 자국과 절개 부위를 봉합하는 금속 스테이플이 보였다. 퀸타나는 기관 내 튜브를 통해서 숨을 쉬고 있었다. 엄마 왔어. 이제 괜찮을 거야.
-본문 131p
그전까지는 슬퍼하기만 했을 뿐 애도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애는 수동적이었다. 비애는 저절로 생겨났다. 그러나 비애를 다루는 행위인 애도는 주의를 집중해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에 관심을 끊거나 생각을 몰아내고 하루하루의 위기를 버텨낼 아드레날린을 새로 끌어 올려야만 할 시급한 이유가 있었다.
-본문 192~193p
비애는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만(알지만), 상상한 죽음 직후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다음의 삶이 어떠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 며칠이나 몇 주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죽음이 급작스레 닥친다면 충격을 받으리라고 예상은 하지만, 이 충격이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리리라는 건 모른다. 탈진하고 슬픔에 잠기고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되리라고는 예상한다. 우리는 실제로 미쳐 버릴 것으로는 예상치 않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비애는 치유가 기본형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지배적이리라고, 최악의 순간은 며칠뿐이리라고 생각한다. 장례식이 일종의 진통제가 되리란 것, 다른 사람의 돌봄 속에서 행사의 엄숙함과 의미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일종의 마약성 퇴행이 되리란 걸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한없는 결핍, 공허, 의미의 부정, 무의미를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의 연속(이게 상상한 비애와 실제 비애의 핵심적인 차이다)도 겪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본문 248p
재러드 맨리 홉킨스의 시가 생각난다.
마거릿, 슬퍼하고 있니
골든그로브에 잎이 떨어져서?
인간은 시들기 위해 태어났단다
네가 애도하는 건 마거릿 너 자신이지.
우리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이고, 외면하려해도 유한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실을 슬퍼하면서 좋든 싫든 우리 자신을 애도하게끔 되어있다. 우리의 이전 모습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존재를.
시간은 우리가 배우는 학교다
시간은 우리가 불타는 불이다.
다시 델모어 슈워치의 시다.
-본문 261p
글을 최종 교정할 때, 내가 저지른 오류가 어찌나 많은지 보고 깜짝 놀랐고 마음이 동요되었다. 잘못 옮겨 적거나 이름과 날짜를 틀리는 등 단순한 실수들이었다. 나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운동 능력 저하와 스트레스인지 비애인지로 인한 인지 결손의 사례일 뿐이라고 자신을 달랬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내가 다시 정상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게 될까?
왜 항상 당신이 옳아야 해? 존이 말했었다.
당신이 틀렸을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없어?
-본문 2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