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표(洪南杓)는 1888년 4월17일 양평에서 그리 부유하지 않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홍순복(洪淳復), 어머니는 이중경(李中卿)이며,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그의 주소지는 양평군 갈산면 신애리 297번지였다.
그는 반일 혁명운동에 참여하면서 한산(韓山), 강우(江宇), 유포심(劉怖深), 진덕삼(陳德三), 이극화(李克華), 김지강(金志剛) 등의 이름과 일강(一剛)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30대 후반의 모습을 보자면, 170㎝가 못되는 키에 마른 편으로 코는 뾰족하고 얼굴은 길고 창백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후원하다 일제 ‘간도학살’ 피해 북경으로 망명>
1920년대 전반 조선일보 기자를 지내던 시절 그의 아내는 정숙자(鄭淑子)였으며, 자산으로 1천원의 동산과 400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생계는 곤란한 처지였다고 한다.
◇3·1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홍남표는 10대 후반부터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합병하려는 일제에 저항하였다. 1906년 경기도 양주군의 사립 한동학교(漢東學校)를 졸업하고, 1909년 4월 항일단체 청년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8월 ‘한일합방 반대운동’ 사건으로 한때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2년 경성중앙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경상남도 통도사 소속의 사립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1918년 1월 고양군 한지면의 사립 한지학교 교사로 있다가 11월에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소재 노림서당(魯林書堂)의 교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용운이 창간한 불교잡지 <유심(惟心)>에 <근로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홍남표는 1919년 1월 자유단 결성에 참여하여 <자유보(自由報)>를 발행하였다. 같은 해 3월 경성중앙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어수갑과 함께 강원도 원주군 부림면 노림의숙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3·1운동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3월27일 노림의숙 졸업식에서 졸업생에게 나눠주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노림의숙 만세운동은 부론면 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이자 원주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울로 올라온 홍남표는 독립운동을 희망하며 중국 길림으로 갔다. 이곳에서 이시영을 만나 그로부터 모스크바에 가서 공부할 것을 권고 받고 이동 중 대한독립단장 조맹선(趙孟善), 한족회 회장 이탁(李鐸)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19년 8월 한족신보사(韓族新報社)를 건립하고 ‘새배달’이란 일간신문의 책임주필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재만독립운동자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12월 일제의 ‘간도학살’을 피해 북경으로 망명하여 군사통일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남공선 등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유하현 해남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조국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다시 국내로 들어오던 홍남표는 1921년 6월19일 중국 안동현에서 조선총독부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7월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8월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제령 제7호 위반사건’으로 징역 2년이 선고되었으며, 또 다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일제는 홍남표의 사상행동에 대하여 “배일사상이 농후하며 항상 정치를 논하고 국권회복에 부심하며 과격한 언동을 행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조선공산당 활동에 참가
홍남표는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사회제도의 불합리함에 더욱 분개하였다. 출옥한 뒤에는 각종 문헌을 통해 사회주의를 연구한 결과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4년 2월경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하고자 조직한 마르크스주의 연구단체인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4월 경기도 가평군 군북면 서당교사로 있다가 조선일보 기자가 된 홍남표는 11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화요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국내에 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해 조직된 고려공산당 중앙총국(꼬르뷰로) 내지부에도 가입하였다. 1925년 1월에는 사회운동의 사상적·조직적 통일을 위한 기관지를 발행하고자 조직된 화화사(火花社)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1925년 3월 시대일보사 편집국 지방부장을 맡았다. 이는 생계를 위한 것이자 동시에 비밀활동을 유지하면서 합법적으로는 각 지역상황 파악에 언론사를 이용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925년 4월에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중에 발생한 ‘적기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1월에는 함흥지역의 지주횡포에 대한 기사 게재로 말미암은 ‘시대일보 필화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의해 쇠수갑이 채워지고 결박당한 채 구속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6년까지 화요회 상무집행위원, 무산자동맹회원, 무명회원, 정우회원 등 사회주의 사상단체와 신문기자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가입… 6·10만세운동 탄로나 안동현으로 피신>
1925년 4월 서울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 구축과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주요 강령으로 내세웠는데, 홍남표는 당시 당 책임비서인 김재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재봉으로부터 “만일 당이 폭로될 경우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이준태 등과 진용을 세워 견고한 당을 조직해 달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그는 조선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 홍남표는 1926년 2월 강달영, 김철수, 이준태 등과 함께 당 중앙을 재건하고, 조선공산당 선전부 위원이자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사상 제2야체이카 및 시대일보사에 있던 경성부 제2구 제4 야체이카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에 제출할 의안작성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홍남표는 시대일보 경영문제 해결을 표면에 내세우고 영호남지역의 신문기자대회에 참가하는 한편 지방대중과 직접 접촉하며 당원획득에 노력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이 탄로나면서 일제 경찰에 의한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홍남표는 6월 중순경 종로경찰서에 검속되어 15일간 구금되었으나 조선공산당 관련 사실을 적극 부인하여 석방되었다. 7월 시골사람으로 변장하고 경성을 탈출한 그는 20여일을 걸어 금강산으로 갔으나 신문에 보도되어 일제 경찰의 수사가 압박해오자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의 안동현으로 망명하였다.
◇또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반일 혁명운동 전개
홍남표는 망명 중에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구연흠을 만나 1926년 10월 중순 상해에 도착했다. 여운형의 집에 머물면서 조선공산당 해외부에 가입하여 조봉암, 조동우 등과 연락하였다. 그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를 마친 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홍남표를 북경으로 파견하였으나 그대로 상해에 남았다. 홍남표는 1927년 4월경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을 받아들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뒤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 특별지부’에서 지부 서기가 되었다. 이는 조선공산당 상해야체이카와 이중조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공산당측에는 조봉암과 양명, 구연흠 등이 참가하였다.
같은 시기에 해외의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전민족의 반일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유일독립당 건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홍남표는 1927년 4월 이동녕, 조완구, 김두봉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상해촉성회는 한국의 유일한 대독립당 성립을 촉진하고, 한국 독립에 필요한 민족적 일체 혁명역량의 총집중에 노력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회가 되었으며, 12월에는 안창호, 조소앙 등과 함께 만주지역의 동포 구축사건에 대한 ‘재만동포 옹호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하였다. 1928년 1월 한국독립당촉성연합회 상해촉성회 당단서기 겸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남북만주와 노령, 미주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독립당 촉성사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조직 이론의 차이와 재래의 감정, 파쟁관계로 분열이 심화되었다. 결국 1929년 10월 상해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촉성연합회 회의에서 해체가 가결되었으며, 이때 홍남표는 조봉암과 함께 잔무처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자리에서 새로이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결성되었으며, 홍남표는 강령·규약·선언제정위원 및 전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은 모든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조선혁명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중국혁명에 참가함과 동시에 전세계 피압박계급과 제휴한다는 강령아래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에 홍남표는 중국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김명시와 함께 만주지역으로 가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중국혁명과 조선혁명 수행할 것을 선전하였다.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 특별지부’ 서기로 활동, 1932년 체포돼 귀국>
상해로 다시 돌아온 홍남표는 1929년 12월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조선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재만조선인 반일본제국주의 대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0년 5월에는 김명시와 함께 아성현(阿城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하여 중국공산당 아성현위원회를 조직하고 서기가 되었다.
한편 1930년 9월경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책임인 구연흠이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면서 독립운동자동맹은 침체를 거듭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홍남표는 독립운동자동맹과 기존의 상해한인청년동맹을 해소하고 그해 12월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 집행위원이 되었다. 상해한인반제동맹은 혁명운동 희생자와 그 가족의 구제,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의 완전한 독립, 반동적 민족주의자 타도, 백색테러 분쇄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으며, 기관지 ‘반제전선’을 발행하고 3.1운동기념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1932년 봄 홍남표는 김단야와 결합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기관지 ‘코뮤니스트’ 발행에 참여하고, 이후 김명시와 김형선 등의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하는 등 당재건 활동을 이끌었다. 당시 홍남표에 대한 일제 경찰의 감시망은 굉장했다. 1931년 5월에는 홍남표를 잡기 위해 일본 영사법원 발행의 영장을 가진 일본 경찰이 조소앙을 홍남표로 오인하여 검거했다가 석방한 일도 있었다. 결국 홍남표는 1932년 12월16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공동조계로 가던 중 특별경계를 펴고 있던 일본영사관 특고 경찰대에 체포되었으며, 1933년 1월22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의 구인장에 따라 인천항에 입항했다.
홍남표는 1926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7년여 만에 일제 경찰에 결박된 채 조국에 돌아왔다. 그는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공판 중에는 조봉암 등과 함께 합병심리와 공판공개, 증거물 반환, 대표선출을 통한 답변 등을 요구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1939년에는 옥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다 탄로나 다시 평양검찰서에 검거되어 9개월 가량 구금당했다. 이후 경기도 양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43년 과거 화요파 동지들과 공산주의그룹을 결성하였으며, 1944년 7월 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광복 후에도 남북통일정부 수립과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다 사망
1945년 8월 광복 이후 홍남표는 조선공산당 재건과 동시에 각종 정치운동에 참여하며 민주정부 수립과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 11인의 재경 혁명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협의하고 정치부 간부가 되었으며, 9월 조선인민공화국 교통부장,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의장단,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 중앙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광복후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주장… 1950년 세상 떠나>
1946년 1월 국내 정치세력의 통합을 위한 5당 회합에서 인공측 대표로 참석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였으며,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에는 공산당을 대표하여 남북의 통일, ‘민족반역자 친일파’를 제외하고 좌우합작에 의한 ‘완전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을 적극 주장하였다. 1946년 9월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1949년 이후)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6월 3일에 사망하였다. 북한에서는 2005년 평양 교외의 애국열사릉에 그의 유해를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