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내 집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606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서낭댕이 고개마루가 나온다.
불과 70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그곳에는 수령 300년도 넘는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고, 느티나무 밑둥에는 오색댕기로 옭아맨 줄이 늘어져 있기도 한다. 밑둥 세 갈래 큰 가지들이 갈라진 부위는 도톰한 음부 같다. 그 곳에는 사탕봉지, 과자류, 막걸리 병이 이따금 놓여 있을 때가 있었다.
서낭댕이 바로 코앞 어덕에는 내 밭이 있고, 종산도 있다. 지난해 파묘하여 바로 위에 있는 내 산에 옮겼다. 서른이나 가까운 무덤이었다. 나는 이따금 서낭댕이를 거쳐서 산소에 오른다.
서낭댕이는 순수한 옛말이며, 어감이 무척이나 토속적이다.
또 서낭댕이에는 무속 민간신앙이 깃들여서, 누군가가 발복을 기원하면서 먹을 것, 마실 것(막걸리 병)을 놔 두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그랬다.
내가 당산나무 神靈인 양 제물로 올려놓은 사탕 두어 봉지를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는 사탕을 오물거렸다.
'내가 바로 神靈님이여. 맛 있는 사탕과 막걸리를 놔 둬서 고마워. 내가 자네들한테 발복을 빌어 주지'라고 중얼거렸다.
서낭댕이 바로 곁에는 작은 느티나무가 또 있다.
수령이 70~80년을 넘을 것 같다.
내 밭가생이에 있으니 내가 저절로 주인이 된 셈이다.
예전, 젊은날의 내가 기억하는 고갯마루 서당이에는 오래된 사철나무가 있었고, 잔돌이 엄청나게 잔뜩,높게 쌓여 있었다.
갯마을 사람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시오리, 이십리 길 장터에 오고 가면서, 크고 작은 돌맹이를 던져 쌓아올리면서 소박한 소원을 빌었고, 당제를 지냈다는 물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1970년대까지에는 당나무 바로 곁에는 오두막살이 집이 있었다.
부엌 하나, 방 한 칸인 주막집에는 으례껏 동네 사내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밤 깊도록 꼬여들었다. 주모는 한 평도 안 될 성싶은 부엌 아궁이 뭎뚜막 앞에 쪼그려 앉아서 끄덕끄덕 졸았다.
아쉽게도 1980년이던가?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느티나무 앞쪽의 옛길은 폐쇠되었고, 북향 산을 깎아서 새로 도로를 곧게 냈다.
주막집은 철거되었고, 돌더미도 사라졌다. 당산나무는 졸지에 내 소유 밭쪽으로 내몰린 셈이 되었 등다.
이곳도 많이 변했다.
버스가 없었던 때에는 여러 군데의 갯마을에서 장에 나가려면 거의 이십리, 삼십리 길을 걸어야 했다.
쉴 곳이란 말랭이에 있는 주막집. 지친 다리를 쉬고, 컬컬해진 목을 축이고, 오가는 사람들과 교류도 해야 했다.
1980년대에는 시내버스가 하루에 서너 차례씩 다니기 시작했고, 해수욕장 가는 길목이었기에 외지의 차도 부쩍 늘었다.
1995년이던가? 서해안고속도로 나들목이 바로 곁에 생기자 서낭댕이는 완전히 외지의 차로 뒤덮혔다.
신작로를 따라서, 걸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서기가 겁난 세상이 되었다. 동네사람도 차에 갈려서 죽었고.
하물며 차가 대량으로 폭주하는 2017년인 지금은 오죽이나 겁이 나랴.
길 사정이 세월따라 변화되었으니 과거의 문화인 당산나무도 점차로 잊혀지고 있었다.
이따금 서낭댕이를 거쳐서 산소에 오르는 나도 그렇다. 아무런 믿음도 없는데도 神靈이 된 듯이 남이 치성드린 사탕봉지를 슬쩍해서 알사탕을 까먹기도 하니까. 나는 영락없는 神靈이다라고 자위한다.
지난 6월 말에는 서해안 갯바람 넘어오는 시골마을에 며칠간 있었다.
텃밭농사 짓는다며 큰뜸에 있는 내 집 윗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웃집 사람, 60대의 후배가 책 한 권을 들고 찾아왔다.
지방 고등학교 교장직을 역임한 후배이며, 지역의지리, 인문문화에 등에 관한 내용을 책을 냈다면서 나한테 선물했다.
서울로 가져온 뒤 살펴보니 여러 곳의 당산나무 사진이 게시되었다.
내가 사탕봉지를 슬쩍했던 서낭댕이 느티나무가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
늙은 나무의 밑둥은 세 갈래로 벌어졌고, 음부를 닮은 곳 바로 위에는 제물이 놓여 있었다.
얼핏 보아도 아무래도 기자발복이다. 아들을 낳게 해 주십사 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다.
오늘 밤에는 내가 신령이 되어서 저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야겠다.
사진 속의 당산나무 밑둥에 치성드린 사탕봉지를 집지도 않았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단맛을 즐기고 있다.
'요즘에는 딸이 더 우대받는 세상이니 딸로 점지해 줄까?' 하고 의향을 슬쩍 묻고도 싶다.
내 시골집에서 쉬엄쉬엄 40분쯤 걸으면 갯바다 입구에 도착한다.
갯바다가에서 또 슬렁슬렁 남쪽으로 10분 쯤 걸으면 작은 섬이 나온다.
수십 년 전에 시멘트로 리어커나 다릴 정도의 좁은 도로를 내어 연결했지만 그래도 섬이다.
서쪽 바다를 향한 산 아래 바위벽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음부 형태를 지녔고, 촛불 태운 흔적과 제물인 사탕과 과자 봉지류, 사과 등 과일이 몇 개씩 놓여 있는 때가 이따금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탕봉지 두어 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는 사탕알을 오물거리려면 내가 또 海神이 되어야 한다.
'소워하는 거 무엇이여? 득남하고 싶다고? 기다려 봐. 부자되고 싶어? 그렇게 해 주지, 자식들이 시험에 붙게 해 달라고? 그려, 소원 이룰 거여.'
하면서 나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웅얼웅얼거리는 해조음이 들렸다.
내가 사탕봉지를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는 더욱 크게 해조음이 들렸다.
갯바닷가에서 입정거리가 궁할 때에는나는 海神이 된다.
'神靈님이라도 되니?'
하고 물으면 나는 빙그레 웃을 게다.
'너, 소원하는 것이 있니?
당산나무, 갯바위의 도톰하거나 갈라진 곳에 사탕봉지를 놔 두면 돼어.
막거리를 마시지 않으니 막걸리는 안 놔도 돼고, 사탕봉지는 두 개 정도면 되어. 하나는 야박하지 않겠어? 나는 하나만 먹고 다른 하나는 남한테 나눠 주어야 하거든. 작은 동물도 와서 먹거든.'
서울 올라온 지도 벌써 아흐레째이다.
시골로 내려가 텃밭농사 지을 궁량을 하는데도 아내의 눈치나 보고 있다.
시골 다녀오자는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시골 내려가거든 산에 오를 때 서낭댕이를 거치고, 또 무챙이 갯바다로 갈 때도 지나치는 당산나무를 슬쩍 보아야겠다. 누가 사탕봉지를 놓고는 발복기원했는지도 슬쩍 살피고.
'그런데 말이다. 큰 가지가 부러진 고목처럼 나도 나이가 드니까 자꾸만 진이 빠져. 神木의 도툼한 부위, 도끼로 살짝 찍은 듯한 갈라진 틈새에 사탕봉지가놓여 있다고 해도 이제는 눈 딱 감을란다. 내 신통력이 예전같지 않거든.'
서낭댕이, 서낭당, 성황당(聖惶堂)이 같은 뜻일까? 조금은 다를까?
내 생각은 조금씩 다를 것 같다.
나한테는 '서낭댕이'가 입에 배었다. 한자어인 성황당는 이미지가 좀 그렇다.
이 글의 소재가 된 서낭댕이의 당산나무(느티나무0와 사철나무, 돌더미, 방 한 칸의 작은 주막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위 글은 글감이다. 나중에 보완해야겠다. 제법 긴 산문으로...
1751년 이조 중엽,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잠깐 나오는 花溪里.
여러 곳의 마을이 장터로 가려면 합쳐지는 곳이 고갯마루.
고갯마루에 있었는 서낭댕이 주변의 옛모습은 어땠을까?
100년 전의 모습은 무엇일까?
1920년 초.
내 어머니는 아비의 등에 엎혀서, 곶뿌래로 이사 오는 날, 당산 아래이 있는 샘에서 올챙이를 건져 먹는 문둥이 아이들을 보았단다. 허드렛 샘물이었을까 샘물 안에서 헤엄치는 올챙이를 손으로 건져 먹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 신작로가 나기 직전의 모습은 어땠을까?
1980년대, 지방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주막집, 돌무덤들이 사라졌다.
고개마루에는 주막집이 또 하나 있었다.
도로확장되면서 이 주막도 헐리고, 대신 바로 안쪽에 철근옹벽의 새 집을 지었다.
아쉽다. 이런 당산나무, 돌더미, 초가삼칸의 주막집도 옛문화 유산인데...
나이 든 사람만이 기억하는 서낭댕이...
이런 것도 글감이 되나?
그냥 다다닥이다.
무척이나 덥다.
2017. 7. 9. 일요일.
첫댓글 산신이 되었다가 해신이 되었다가...사탕봉지가 그리 좋으신가?
당도 있으시다면서 ㅎㅎ
오륙십년전 기억을 꺼집어 내어 글을 쓰는 일은 중요한 일일 것 같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세대들이 죽어 버리면 그런 기억들도 다 사라지니까
부지런히 기억을 더듬어 기록으로 남기시길 바라네
요즘은 그런 향토적인 글들이 없어...
맞는 말이지요.
우리 세대가 죽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사진이나 책에서 읽는 극히 피상적인 지식으로는...
나도 실은 늦었지요.
한 세대 전인 부모, 두 세대 전인 할아버지 때에 남겨야 했었는데...
서낭댕이. 성황당은 신선시되고 경원시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이 남아 있을까 싶소.
다 미신이고 버려야 할 낡고 구닥다리지요.
예전 수십 년 전, 내 시골에는 무당들이 있어서 푸닥거리를 숱하게 했는데 지금은?
그 자손마저 입 다물지요.
사라져간 옛 문화이지요.
@최윤환 내 아버지는 1982년 돌아가셨지요.
장승뱅이... 예전 아버지 소유의 논이었소. 그곳에는 장승이 서 있고 커다란 당목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장난으로 속에 불질러서 사흘간 타서 죽었다고 하대요. 아마 1935년 쯤이 아닐까 싶소.
철부지 소년의 장난이... 그 뒤로는 느티나무들이 사라졌을 게요. 당산제도 사라지고...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얼핏 들은 내가 전설처럼 댓글 쓰오. 그 장승뱅이도 논 경지정리로 20년 전에 사라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