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단 '청명상하도':다리와 시장이 만나는 삶의 정오
다리, 삶의 의지가 소용돌이치는 時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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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의 화가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 전체 6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 그림 가운데 홍교(무지개다리)를 그린 부분이다. |
- 경이로운 사실주의가 일궈낸
- 생동감과 현장감은
- 홍교에서 정점에 이른다
- 다리 위의 번잡함과 그 아래 화물선이
- 다리를 통과하려는 일대 소동의 극적 순간,
- 이곳이 태양이 수직으로 작열하는
- 삶의 정오다
삶은 그러하다.
1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왁자지껄, 떠들고 웃고 마시고 흥정하고 싸우고 구경하며 흘러간다.
삶이여, 그대 흘러가라! 우리에게 허락되는 이 시간을 견디고 살고 흘러가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때가 되면 다른 삶과 다른 시간이 이곳을 살아갈 것이다.
북송 도화원 화원인 장택단(張擇端, 생몰 연대 미상)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6m 가까이 되는
긴 두루마리에 당시 수도 변량(개봉)의 번영했던 상업 활동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것은 삶의 다큐멘터리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800여 명 인물, 73마리 축생, 스무 개가 넘는 수레와 가마, 20여 척 배가
저마다의 삶으로 삐걱대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그곳에 우리도 있다.
■ 번화한 물류 중심지 묘사
변량은 수당 시대에 이르러 강남 개발이 진척되어 변하(汴河)가 대운하와 이어지면서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부터 산은 공간을 나누고 물은 공간을 이어준다.
물길이 만나는 곳에 삶이 모인다.
송나라 맹원로가 편찬한 '동경몽화록'에서는 변량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여들고
교외 곳곳이 저잣거리와 같다 하였다.
'청명하상도'는 이 삶의 현장을 이동하는 카메라처럼 숱한 삶의 표정을 따라 흐르면서 생생히 증언한다.
6m 두루마리를 조금씩 펴다가 이 홍교(虹橋; 무지개다리) 장면에 이르면, 문득 물살을 거스르는 배들이 몸을
뒤채는 소리, 배꾼들의 외치는 소리, 장사치, 호객을 하는 사람, 짐꾼, 거친 숨을 몰아쉬는 노새, 선술집의 술꾼들, 구경꾼의 떠드는 소리가 와락 우리 눈으로 달려든다.
소리, 소리, 수많은 소리는 강의 소용돌이 파동으로 무늬를 이룬다.
삶의 무늬란 우아한 화음이기보다 늘 이러한 잡음과 소음 위를 떠돌기 마련이다.
장택단에 관한 정보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데 '청명상하'라는 화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청명'이 봄의 청명 절기가 아니라 태평성세를 가리키는 수사이며(또는 지역명이며), 그림의 풍경은 봄이 아니라 가을이라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그림에 흐르는 기운은 쇠락하는 가을의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분명 이 인간들의 군상, 저잣거리 잡음과 소음에는 생동하는 봄의 기운이 넘치고 있다.
버드나무 가지에 화가는 담채를 넣어 봄물이 오르는 가지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주막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목동이 아득히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더라"는
당나라 두목(杜牧)의 시 '청명절'의 살구꽃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여기는 봄이어야 한다.
장택단이란 한 화가가 어떻게 이러한 경이로운 사실주의를 돌연히 성취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중국회화사에서 이 수준에 도달한 사실주의를 우리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완벽한 단축법(다리를 통과하려는 배와 강 왼편 끝의 배), 인간의 천태만상, 주점, 객점의 정교한 묘사는
최고 수준의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객선과 화물선의 형태 역시 사료가 될 정도로 정교하게 그렸다.
화물선이 배 밑이 평평하고 중간 부분이 넓은 형태를 이루는 반면 여객선은 선형으로 좁고 길며, 선실 위로 차양 덮개가 있는 정각 같은 것이 세워져 있다.
선실에는 휴식과 식사를 위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 큰 풍경, 작은 풍경의 어울림
'청명상하도'의 리얼리티는 장대한 스펙터클에서뿐만 아니라 작은 풍경에서도 탁월하게 성취된다.
오른쪽 하단 골목길로 들어가 보라.
좁은 길을 무단으로 점유한 주점의 탁자, 그 위의 찢어진 일산(日傘)은 골목길 풍경으로
얼마나 어울리는 묘사인가. (그림 전체에서 찢어진 일산은 여기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옆 버드나무의 부러진 가지에서 사실성은 더욱 섬세해진다.
지금 그곳에 있는 듯한 현장감은 홍교 풍경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곳은 '청명상하도'의 눈[目]이다.
홍교의 번잡함과 그 아래 한 화물선이 다리를 통과하려는 일대 소동의 극적인 순간, 이곳은 태양이 수직으로
작열하는 삶의 정오다.
홍교는 지금 다리이자 시장이다.
삶이란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하염없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다리를 건넌다.
다리가 삶의 여정을 단축법으로 보여준다면, 잡음과 활기로 넘치는 시장은 삶의 공간을 압축한다.
다리와 시장(장터), 그 속에 우리도 있다.
홍교는 삶의 모든 것이 한순간으로 수렴되는 극적인 시공이다.
다리의 정점에서는 가마꾼 행렬과 말을 탄 행렬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있다.
그리하여 대립하는 힘의 팽팽한 긴장감을 풍경에 부여한다.
다리 밑의 저 소란한 배를 보라. 배 선실 지붕에서는 돛대를 풀고, 옆에서는 상앗대로 배질을 하고,
다리 위에서는 밧줄을 던지고 한바탕 난리법석이다.
몸을 비트는 배는 다리를 통과하려는 힘의 집약이다.
그것은 생의 한 경계를 통과하려는 의지의 구현처럼 보인다.
다리 밑 물살도 여기서 가장 역동적으로 소용돌이친다.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그 짧은 순간, 모든 삶의 모순과 세계의 불완전함이 문득 있는 그대로
긍정되는 영원의 순간, "위대한 정오의 시간"(니체)이 여기에 있다.
세계는 완전해졌다.
모든 불완전한 것이 뒤엉키는 이곳에서 세계는 완전하다.
모든 소리가 집약된 정오의 순간, 삶의 비의(秘義)란 부대끼며 울고 웃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저 거칠고 소란한 잡음이야말로 삶의 황홀한 화음이 아니면 무엇이랴.
쨍쨍한 정오의 장대 끝에 백로 한 마리가 앉아 영원한 한순간에 붙잡힌 인간의 군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직의 정오는 이곳에서 작열한다.
■ 저잣거리에서 만나는 삶
다리를 지나면 풍경은 고요해진다.
뱃머리가 다리를 빠져나온 배의 사공들은 이미 긴장을 풀었다. 건너편에는 객선들이 조용히 정박했다.
정오의 다리를 빠져나오면 얼마 있지 않아 저녁이 오리라.
완전한 삶의 정오에서 우리는 다시 각자만의 불완전한 저녁을 맞이해야 한다.
고뇌와 번민과 알 수 없는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객선에서 쓸쓸한 저녁을 맞이했던 한 시인의 노래를 기억한다.
과거에 낙방하고 귀향하는 객선에 몸을 실었던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달은 지고 까마귀 울고 찬 서리는 하늘 가득한데
강교와 풍교의 고깃배 불빛을 보며 시름에 졸고 있나니.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의 종소리만 객선에 밀려오네.
청명절 정오에서 어느새 '풍교야박'의 가을 저녁에 이르렀다.
삶은 참 빠르기도 하다.
그러나 번민의 밤이 지나면 삶이여, 우리는 다시 정오를 향하여 배를 젓고 다리를 건너야 한다.
저잣거리에서 울고 웃고 노래하고 외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요, 우리의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