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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공깃돌
한주간동안 승리하셨는지요
말씀안에서 교제케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복음을 민수기21장을 통해 정확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불뱀과 놋뱀
민21: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광야 생활의 긴 여정으로 인하여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이 흐트러 지기 시작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선민들이었지만 오랜 여정속에 몸과 마음이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게 되었던 것이다.(4절)
한마디로 모세가 인도하는 길과 백성들이 원하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왜그런가?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가는데 있어서 에돔왕이 그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민20:14-21)
에돔이 누구인가?
이삭이 나은 쌍둥이 아들중 큰아들인 에서의 후손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이라 촌수로는 사촌이요 서로 형제지간이었다.
당연히 길의 인도를 해주어야 마땅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서서 비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앞에두고 부득이 행군방향을 가나안과는 다른 홍해길로 바꾸게 되자 그동안 38년동안 광야생활에 시달린(신2:14) 백성들은 심신이 지친 나머지 그만 마음의 화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5절)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인도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이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길은 자기들이 가기에 편안한 길이었다.
즉 그들은 조급한 마음에 쉽고 빠른 길로 가나안에 들어가고 자 했던 것이다.
이는 영적인 측면에서 보게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야 할 고난을 회피하고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려는 인간적인 자기 중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길로 인하여 마음이 맞지 않아 불평이 생기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5절)
이들은 얼마전 까지만 해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그토록 찬양하고 영광돌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황량한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기들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을 에돔왕의 반대로 갈수 없게 되고 다시금 되돌아서서 홍해길로 바꾸게 되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자기소리를 내는 불신앙의 대적을 범하게 된것이다.
그들이 내는 자기소리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랜 광야 생활을 지나오면서 가나안이라는 마지막 고지를 눈앞에 둔 그 시점이었다.
그러나 에돔의 반대로 지칠대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광야로 되돌아서서 먼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이제는 싫었던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자기들의 온전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기 옳음의 소리이다.
즉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오랜 세월동안 고생하면서도 지금까지 참았던 것은 그나마 하나님의 왕국안에 시민으로서 살날을 꿈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렵고 힘들었어도 참았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약속의 땅을 두고 또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고 하니 더 이상 길로인해 이런 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좁고 고생스러운 삶의 길을 다시금 걷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모세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정도의 지도자라면 최소한 기본적인 삶의 질은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항변의 소리였다.
사실 끝없이 펼쳐진 광야 사막길에 낮에는 뜨거운 태양과 맞서 40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더위와 싸워야만 했으며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진 관계로 영하의 날씨에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성지순례한 목회자들의 말을 들어보며 단 하루도 그곳에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고 한다.)
음식과 마실물조차 없다보니 노약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자연히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고 건장한 남자들은 이들을 돌보느라 점점 탈진 되어져 갔다.
결국 열악한 자연 환경이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마음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사단이 그 틈을 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완악한 마음을 드러내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만약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받아 들였다면 그들의 외침과 간구에 즉시로 응답하셔서 당장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원함은 하나님의 예정안에서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 43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가졌다.
그들은 신음했고 애굽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과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이끌어내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그 역사를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원함은 너무도 달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시대 당시에 세계최고의 문화와 문명을 가진 애굽아래 있었다.
최고의 교육, 최고의 종교, 최고의 삶의 질 이 모든 것이 애굽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통치하에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으로서는 눈으로 보고서도 누릴수가 없었다.
그래서 400여년전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계시했던 그 언약을 기억하며 구원자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애굽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으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백성이 되어 세계가 무릎끓는 그런나라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원함은 결국 인간세상안에서 애굽을 최고모델로 한 그런 이상국가였다. 이는 물질세계를 풍요롭게 누리고자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정욕일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말씀이 430여년이 지난 그때에 이루고자 했을때 택한 백성들은 모두 애굽의 문화와 정신에 길들여 져 있었다.
비록 몸은 천한신분으로 고된노역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힘든 삶을 살았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자신을 끌어들여 백성이 원하는 그러한 세계제일의 이상국가를 꿈꾸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우선적으로 애굽의 사상 애굽의 문화 애굽의 종교 애굽의 생활을 완전히 빼버리는게 우선이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애굽왕자에서 쫓겨나 40년이 지나자 애굽의 모든 것을 다 버렸을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년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가 광야 40여년동안 훈련받고 연단받은 년수와 너무도 같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이스라엘) 원함에 가득찬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께서 그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나타나시고 말씀으로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믿음을 갖기를 원했고 믿음안에서 살아가
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만 할 줄 알았지 이러한 언약을 이루기까지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은혜의 믿음을 가질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의 은혜로 그의 소유된백성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자기중심적 모든 것들을 다 벗겨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4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애굽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겨내기 위해 훈련과 연단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애굽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과의 단절이다.
백성들이 원하는 행복은 출애굽하여 애굽보다는 나은 생활을 원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질것임을 알려주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을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모세 조차도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인내가 한순간 백성들에 대한 분노로 지팡이를 땅에 두 번씩이나 내리쳐 하나님이 원치않는 혈기를 부림으로 그 역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운을 맛보지 않았는가?
모세의 온유함이 온땅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니라 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인간적 노력이나 의지로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랜기간에 걸쳐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게 되었을때 마지막 관문이 나타났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다시 백성의 마음이 상했다.(민21:4)
이처럼 오랜 40년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훈련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것은 율법아래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은혜가 없는 법아래 사는 자들에게는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언제나 자기 중심의 옳은 소리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된 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에 어긋난 자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죽음의 도구에 불과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을 내려주게 되었을때 어느누구라도 다 지켜 질 것 같은 감격에 기뻐했지만 그들은 얼마못가 전부 율법의 저주아래 떨어지고 마는 더욱 불쌍한 존재들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입을 막기위해 역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요구와 달랐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에 그 응답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고 빠르고 쉬운길을 준 것이 아니라 불뱀을 보내주었던 것이다.(6절)
결국 나타난 응답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이처럼 다르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모세인들 몰랐을까?
이제는 다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예기치 못한 에돔왕의 결사반대로 인해 에돔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꿈과 계획이 무산되었다.
다시금 되돌아서서 홍해 광야길로 걸어가는 백성들을 이끌고 가면서 나이든 노인들이 힘들어 걷지 못했을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린아이들이 배고파 울음을 터뜨릴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뜨거운 태양열에 빈혈로 쓰러지는 사람을 볼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백성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그리고는 길을 걸으면서도 휴식을 취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겠는가?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끌어 가게 하셨는지요?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너무 불안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해결해주세요.
저는 다만 믿음으로만 나아갑니다.
얼마나 외쳤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이 타당한 말을 한다 할찌라도 내일일을 알지 못하며 옳은 일을 한다 할찌라도 한낱 먼지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이 자기마음의 소리를 내는 그 순간 우리는 마음이 느끼는 그 소리를 인하여 판단받게 되어지고 정죄받게 되어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모르시겠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400여년 뒤 일어날 일까지도 세세히 말하였거늘(창15:13-16)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른척 하셨겠는가?
아니다. 알았다.
그럼 왜 침묵하셨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아직 영적인 눈이 띄어지지 않은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시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영적인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이 세계를 보이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의 고난을 통해 자기 포기의 길을 이끌고 계시는 것이다.
자신이 포기되어질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을 이끌고 나아가시는 영적세계를 발견할 수있게 되는것이다.
무조건 믿고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믿음의 목적이 아니라 온 세상 천지에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가득찬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 이처럼 자기 포기의 과정을 지금 하나하나 치르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포기되어지지 않은 인간의 원함은 하나님의 뜻과 늘 정반대가 되어 항상 어긋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포기라는 극약 처방을 쓰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먹을 것 마실 것 대신에 불뱀을 내려 주셨다.
이처럼 인간의 원함과 하나님의 응답하심은 인간이 볼때는 늘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으로 (자기포기가 이루어진) 거듭난 자들은 이것이 가장 필요하고도 중요한 응답인 것을 안다.
이 지역의 불뱀들은 붉은 반점을 가지고 있는데 날아 다니기 까지 한다.
게다가 한번 물리면 치명적일 정도로 독성이 강해 고열로 신음하다가 서서히 죽어간다.
더군다나 뱀은 사단의 화신으로 여겨 저주의 대상이었다.
이런 불뱀들에 물려 고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민21:6)
이제 백성들이 불뱀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다시금 무너져 모세를 찾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뱀들을 물리쳐 달라고 간청한다.
여기서도 인간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너무도 신비롭다.
우리 인간들은 자식들이 아파 울면 자기 몸이라도 팔아서 그 아이가 낫기까지 온갖 간호를 하며 밤을 지새우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너에게 너무 무관심했다고 하면서 아이를 향한 뜨거운 눈물을 흘릴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즉각 불뱀을 물리쳐 준 것이 아니라 불뱀을 그대로 놓아두고 대신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아 물린자 마다 그 매단 것을 보면 산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마음을 꺾기위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났다.
왜 하필이면 놋뱀인가?
불뱀을 물리쳐 달라는 요구에 하나님은 그 요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뱀소리만 들어도 몸서리치며 싫어하는 놋뱀을 만들게 해서 장대위에 높이 매달아 백성들이 보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원함과 하나님의 행하심은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져 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인간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좋은것이나 생각하기에 합당한 것을 하나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것들을 앞에다 놓고 이것을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성경을 보라 인간의 요구에 하나님은 철저하게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심을 보게된다.
간혹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실때가 있다.
왕을 세워달라는 간청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지만 부득불 사울로부터 왕조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선지자가 있다고 하나 왕의 권력으로 인해 나라가 타락되어지고 결국은 다른나라의 식민지 생활을 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우리마음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능력이 많으면 그까짓것 우리스스로 해결할 수 있지만 우리보다 한없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인간역사를 이끌어가신다면 인간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자기 생각과 의지로 그러한 난관을 헤쳐 나가든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끌림을 받고자 할때는 자기포기가 이루어져야만 갈수 있게 된다.
또 한 예로 자기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기생각 자기뜻을 다 버리고 내 생명을 쥐고있는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만 순종하고 움직이게 될 때만 구할수 있다.
죽어가는 자가 살기위해 스스로 발버둥쳐봤자 더 빨리 세상을 뜰뿐이다.
살릴수 있는 자가 와서 조치를 취하고 자신은 가만히 있을 때 그 사람은 살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단의 화신인 불뱀에 물려 죽게되었을때 뱀소리만 들어도 화들짝 놀라 경끼를 일으킬 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였으니 이들이 쳐다보겠는가 안보겠는가?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보는자 보다는 안보는자가 더 많았다.
“그 지긋지긋한 뱀을 또 쳐다보라고.....죽으면 죽었지 뱀은 안쳐다봐” 하고 보지 않은 사람은 죽어갔다.
자기가 살았다 라고 생각하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끝까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뱀을 쫓아준 후에 약을 발라주고 독을 빼주고 이렇게 해야 자신들이 살고 하나님을 의지할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뱀을 쫓아내 주신 것이 아니라 보기싫은 뱀을 달아놓고 그걸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른 것이다.
“자, 여러분, 뱀에게 물렸어도 놋뱀을 쳐다보면 삽니다. 놋뱀을 쳐다보시오. 쳐다보면 삽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을 안 듣고 “나는 안 쳐다봐. 안 쳐다볼 거야.” 그렇게 고집 피웠던 사람들은 죽었다.
“그래..... 이래나 저래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모세의 말씀대로 쳐다나 보고 죽자.... 밑져봐야 본전인데 쳐다보자.”
그런 사람들은 보는 즉시 살았다.....
다시한번 정리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을 때, 백성들은 불뱀을 쫓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불뱀을 쫓아주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명하기를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다.
무슨말인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가?
길로 인한 마음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이세상의 모든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세상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 행복과 영생을 위해 길을 걸어가지만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행복찾는 길로 인해 죽음으로 향할 뿐이다.
이세상은 옳고 그름을 통해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놓았다.
그 안에서 양심과 윤리와 도덕 철학등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죄값에 대하여 죽음이라는 사형틀을 통해 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자 공개적으로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 십자가에 사람을 매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는 나라의 흉악범이나 가장 극악한 사람이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십자가를 보면 무서움에 몸서리처져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십자가 가까이에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가장 흉악한 죄인들만이 당하는 십자가에 우리 예수님이 못박히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믿겠느냐는 것이다.
자기생각과 자기의지가 살아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누구를 위한 죽음인지 그 죽음이 자기를 위한 죽음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저 무서운 십자가는 죄인이 죽어야할 사형틀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땅의 모든사람들중 자기가 살아있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죄지은 사람만이 박혀야 할 곳이란 것을 알기에 자신은 그래도 깨끗하다고 생각되어져서 이 무서운 십자가를 바라볼 엄두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어떠한 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길로인하여 마음이 상할데로 상한 우리들이다.
인생은 고이다.
만족과 기쁨이 없고 질병과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죄의 값으로 사망을 선고를 받은 우리이다.
모두가 지긋지긋한 이 인생의 고통속에서 헤어나길 원하고 있지만 아무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천년전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나타나 인간의 죄와 죽음을 자유케 하고자 인간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하는 십자가에 죄없으신 몸으로 대신 죽어 주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사망의 저주이지만 은혜의 법으로 주님이 대신 당하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생명을(거듭남)얻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망을 풀어 자유케 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고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저 예수의 십자가를 내가 왜 믿어 내가 왜 바라봐야 하나? 라고 자기 중심적생각으로 의문에 빠져버린자는 자기 옳음의 죄로 정죄에 빠져 멸망에 갈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불뱀에 물린자가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말해도 보지 않고 죽는 어리섞은 자와 똑같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 불뱀에 물려서 사망이 엄습해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에 말씀에 의지하여 놋뱀을 쳐다봤다.
그들은 놋뱀을 쳐다보자마자 생명을 얻게 되었다.
죽음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아멘!
그러면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비록 더럽고 흉측하더라도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어있는 놋뱀에게 있는 것이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역시 모든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어있는 가장 흉악한 사형틀인 십자가를 바라볼때 그 십자가엔 날위해 죽으신 주님이 계시므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명을 우리가 얼마나 옳은일을 했나하고 행위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되고, 나와 나의 죄를 못박아버린 십자가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생명을 얻을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불뱀이 죄와 사망이라면 놋뱀은 생명과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자유를 놋뱀에게서 찾는 것이다.
만약 또 다시 불뱀이 와서 우리를 꽉 물었다고 하자.
이때 이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놋뱀에게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물린 자기 육체와 그 고통에 매여서 ‘이제는 나는 죽는다.’ 고 하지 않고, 처음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았던 것처럼, 다시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생명을 얻었음에도 다시 사단이 와서 우리를 무서운 죄에 빠뜨렸다고 하자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다시금 주님앞에 나설 용기가 없는가?
아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이세상이 존재하는 날까지 영원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다시금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 하면 죄는 우리가 짓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십자가의 은혜를 한번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와 죄가 주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버렸기 때문에 이미 죽은자이다.
죽은자가 또다시 죄를 범한 것은 자기가 범죄한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죽은 내 몸을 이용해 또다시 우리가 범죄에 빠지게 해서 우리스스로가 정죄하고 주님을 부인하도록 항상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우리가 처음처럼 또다시 용서해달라고 울고 불고 떼쓰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두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무슨 의미의 놋뱀인가?
첫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멸망에서부터 생명으로 구원해 준 구원의 놋뱀이라면, 두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불뱀에게 물린 자신을 보면서 불뱀에게 물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다시 십자가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허물과 죄악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나는 언제까지 이런 죄를 지어야만 하는가? 하며 정죄하는 신앙이 아니라, 연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영원히 속죄해 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신앙,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난 사망의 몸을 가진자로서 이와같은 비참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자임을 고
백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깝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었을 때에 주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완전하고 완벽한 삶을 살도록 사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만 죄가 없어지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하고는 상관없이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사랑을 베푸시거나 또는 심판을 내리시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시면서 동시에 예수안에서 그 믿음의 증표가 없는 자들을 심판하고 계신다.
여기 A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죄 없이 선하게 살아왔다.
이 사람은 사람들이 불 때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B라는 사람은 정반대이다.
나면서부터 굵직한 죄만 가지고 나와서 사단이 이끄는 데로 평생 죄를 짓고 살았다.
이 사람은 완전히 지옥의 자식이다.
예배도 한번 못드리고 선한일 한번 못해본그러던 그가 어느날 감옥에서 주님을 만났다.
그런데 제가 거룩한 마음으로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득히 품고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A라는 사람을 자기 수중에 두고자 할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다.
비록 말썽피우고 무익한 자이나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그를 의인이라 여겨주시며 그를 자기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은 비록 죄안짓고 선한 삶을 살았으나 그 자신의 마음을 의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필요치 않은 자연인이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세력안에 매여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길이 없다.
B라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행위하고는 상관없이 깨끗하게 되었다.
B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약점으로 말미암은 고통도 있지만, 반면에 용서를 받음과 동시에 용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된다.
그러나 A는 그렇지 못하다. 용서해주시는 하나님 없이도 그의 삶은 워낙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마음이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B는 값없이, 은혜로, 일도 하지 않았고 경건치도 않았는데, 의롭다 함을 얻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또한 자기 속에서 연약함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하고,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 생활 속에서 허물과 실수가 나타나고 그것 때문에 양심에 깊은 가책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미래의 죄까지도 해결해 주신 것이다.
만약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가 내일부터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분명 바라보지 않게 된다.
또한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실 때 세상 미래의 죄까지도 전부 가져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로부터 과거의 죄만 해결해 주면 우리는 얼마든지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을 아셨다.
육신을 가진 우리가 앞으로도 정욕적인 생활을 할 줄 아셨기 때문에 미래의 죄값까지 지불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는 날동안 교만할 수 없고 낮은 마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 이런 구원을 이루어 주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러면 미래의 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주님께서는 다 이루셨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스스로 죄에 대해서 또 이룰려고 하는가?......
그렇게 용서를 해 주신 하나님께 이제는 감사와 영광을 돌릴 마음이 여러분 속에 형성되지 않겠는가?
육신이 드러나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의 무게를 느끼거나 죄에 대하여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죄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의 욕망만 있을 뿐이다. 정말 죄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 죄가 해결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돌릴 줄 안다.
그래서 이제 성령은 구원을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거하시면서, 율법처럼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허물과 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 자체가 얼마나 형편없고 부족하며 악하여 저주받을 인생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은 이끌어 주신다.
그런데 율법은 그렇지 않다.
죄의 가책만 주었다.
그리고 너는 지옥에 간다고 지적한다.
너는 멸망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멸망의 공포 속으로 우리를 몰아 넣은 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죄로 인하여 오히려 그리스도 앞에 더욱더 담대하고 힘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보혜사로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을 때, 백성들은 불뱀을 좇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불뱀을 쫓아주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장대 위에 놋뱀을 만들어 달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을 때에 마지막 희망으로 놋뱀을 쳐다본다. 그들은 놋뱀을 쳐다보자마자 생명을 얻게 되었다.
죽음에서부터 구원을 받게된 것이다. 아멘!
그러면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놋뱀에게 있는 것이다.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명을 우리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되고, 놋뱀에게서 찾는 것이다. 만약 또 다시 불뱀이 꽉 물었다고 해보자. 이때 이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놋뱀에게 있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물린 자기 육체와 그 고통에 매여서 ‘이제는 나는 죽는다.’ 고 하지 않고, 처음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았던 것처럼, 다시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무슨 의미의 놋뱀인가?
첫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멸망에서부터 생명으로 구원해 준 구원의 놋뱀이라면, 두 번째 쳐다보는 놋뱀은, 불뱀에게 물린 자신을 보면서 불뱀에게 물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다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허물과 죄악과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나는 언제까지 이런 죄를 지어야만 하는가? 하며 정죄하는 신앙이 아니라, 연약한 자신을 인정하고 영원히 속죄해 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신앙,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깝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분은 이미 우리의 연약함 무지 실수들을 다 알고 계시는데 우리가 왜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인데 뭣 하러 우리가 허물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써야 하는가?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도 죽은 것을 시인하게 하기 위해서, 허물과 여러 가지 실수와 잘못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고 약하며 얼마나 추악하고 얼마나 저주받기에 합당한 육체를 입고 있는가를 현실 속에서 느끼게 하고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악합니다.” 하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악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굉장히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하여 그것 즉 죄책감을 느껴도,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악이 우리의 영혼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질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의 생활 속에서 시인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서 허물이 계속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근본의 발견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조그마한 죄 하나 가지고 “아이고, 하나님, 오늘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더러운 우리 육신의 모습을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안 하려면 안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 큰 자유나 평안을 느낄 수가 없다.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경험한 여러분들이여! 이제 놋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 제물로써 여러분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어주신 주님을 자기 마음속에 받아들인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바라보고 믿고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두번째 바라보는 놋뱀은 그런 놋뱀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물리면 물릴수록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주님은 놋뱀을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다.
한번 물린 사람과 두 번 물린 사람, 세 번 물린 사람,…영원한 속죄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삶으로서 불뱀에게 많이 물린 사람과 불뱀에게 조금 물린 사람은 다르다.
‘이제 내가 조심해서 불뱀하테 안 물리도록 해야지. 지팡이도 준비하고, 투구도 써야 되겠다는 것은 놋뱀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죄안짓고 깨끗하게 살아야 겠다는 것은 결국 주님없이도 내노력 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자, 내가 이제 조심해서 살아야지, 주님이 나의 죄를 영원히 속죄해 주셨는데 그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갚기 위해서는 내가 착실하고 성실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 속에는 죄가 자꾸 생기게 된다.
죄는, 안 지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나타나는 법이다.
여러분, 하번 생각 해 보라,
거짓말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짓말했는지 안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이제 내가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입을 열 때마다 조심한다.
“안녕하셨습니까? 건강하신지요?” 하고 말을 상당히 조심한다. “예, 가내 두루 평안하십니까?” “예, 저희 집안도 그렇습니다. 예, 아무일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집에 가서 냉정하게 기도해 보면 성령이 뭐라고 하시는지 아는가?
“너, 오늘 또 거짓말했다.”
“나, 오늘 인사밖에 한 것이 없는데…”
“인사가 거짓말이야, 너 지금 집안에 문제가 있는데, 뭐가 가내 두로 평안하냐?”
그렇다. 인사 속에도 거짓말이 참 많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참 많다. 그래도 여러분은 ‘안녕 이라고 하지않는가?
집안에 문제가 많지만, 인사이기 때문에 그냥 뜻없이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것도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 집회할 때 오시라고 부탁을 하면 “아, 예. 가지요. 가겠습니다. 몇 시에 시작하죠?” “아, 예. 알겠습니다. 시간 내어서 가보도록 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예, 예” 그러면 난 생각하기를 분명히 오는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나중에 만나보면 그것은 그냥 인사였다는 것이다.
여러분중에 인사성의 말들이 많다. “언제한번 집에 놀러오세요.....”
“우리 한번 식사나 하지” 이러한 것들은 대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다. 그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인사를 했지만 거짓말이다.
여러분, 불뱀도 여러 종류와 불뱀이 있다.. 불뱀 어미도 있고 새끼도 있다.
불뱀에 안 물리려고 작심하지만 갑자기 불뱀이 쑥 날아와서 물고 도망간다.
물고 서 있는 것도 있지만, 딱 무고는 도망가는 것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충격이 크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늘 기억나게 하는 것도 있다.
그렇다.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늘 기억나게 하는 죄도 있지만, 스쳐 지나가는 죄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저런 죄들이 참많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의롭게 되고,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어 그 안에 거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로 ‘이제 내가 온전하게 살아보자. 이제 내가 죄 안 짓고 살아보자,’ 이렇게 되면 여러분 안에서 성령이 역사를 하시지 않게된다.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주신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 절대로 저주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의 마음에 영원히 속죄 제물이 되시고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주님 앞에서 한량없는 은혜와 감사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려가면서까지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 약하고 추한 놈을 주님이 구원해 주시고, 이런 나와 동행하시면서 인도해 주시고 있는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불뱀과 같은 죄에서 신음하며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십자가위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장대위에 달린 놋뱀처럼 구원을 의지하며 바라보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