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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묵상글 ( 연중 제25주일. -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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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하는 가운데 모두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겸손의 의미를 잘 가르쳐 줍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의 모습이 겸손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성공을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내가 너보다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자다’ 하는 생각을 다스립니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직 겸손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 하였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기억하며 극복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베드로일까? 안드레아, 아니면? 요한...줄 끊어질까 조바심을 갖는 것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 큰 사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큰 사람은 품이 큰 사람이요,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부들도 인사 철이 되면 누가 어느 본당으로 가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자리가 어디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고 말씀하셨는데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그의 행복과 완성을 위하여 나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공했다는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잘 썼느냐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의 모습이 빛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하신 이유는 어린이의 단순함과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모습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에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하느님께 온전히 낮추어 의탁하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에 힘입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껴안으며 말씀하신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소외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분을 힘입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꾸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1).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 2).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3).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만이 악한 말을 멈출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나쁘게 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만이 대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매맞을 사람이 있는데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의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혹 듣게 되면 흐름을 바꾸십시오. 바꾸지 못하면 응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데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그는 하느님 눈앞에서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을 싸움 붙이고 욕을 보이고 남들의 사생활에 수군거리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목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결국 자신도 그의 먹이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의 명예는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듣는 것은 험담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자기 자랑을 하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기심을 멀리하여 겸손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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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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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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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일 강론글입니다.
김레오나르도 2018.09.23 03:10
- 내려놓는 자 오르고, 오르려는 자 내려놓는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두 번째 경우, 바위에 떨어진 씨는
한 때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의 경험을 보면 세례를 받고 난 뒤
집안에 우환이나 환난이 생기는 경우가 꽤 있고 그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거나 그만 두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또 수도원에서도 서원을 앞두거나 서품을 앞두고
부모형제에게 시련이 닥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 더 좋은 일만 있고,
남들보다 더 잘 살게 되며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 높아질 거라고 믿었는데
어찌 그 반대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답을 줍니다.
세상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남보다 더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높아져 남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오르려는 사람은 다 내려놔야 합니다.
오르려면 무게를 줄여야하고 이 세상 것은 다 내려놔야 합니다.
부귀영화, 지위, 자존심, 주장, 고집 같은 말할 것도 없고
근심걱정, 불안, 두려움, 이런 것들도 다 내려놔야 합니다.
왜냐면 근심걱정이나 불안 두려움도 다 세상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주님처럼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데 여러 번 제가 얘기하듯
이 세상에서 최악을 각오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선이 되면서
두려울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으며 근심걱정은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최악, 그러니까 수난과 죽음을 각오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말이 맞다 생각하고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그 각오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 쉽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수난과 죽음이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고
파스카 의식이 부족하고 파스카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맞이할 것이 그저 수난과 죽음뿐이라면 누가 그것을 각오하고
그뿐이라면 누가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고통을 불평하며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광야에서 유랑하는 것이
고생스러워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나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고 가나안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가 약했던 것은
가나안이 행복의 땅이라는 믿음과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로 돌아가려한 것은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에 가까웠을 때고
정찰대를 보내어 가나안에 대한 보고를 듣고 난 뒤
갈 수 있다는 희망이 꺾이면서 갈망도 의지도 꺾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지금 예수님과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파스카의 수난과 죽음의 행진 중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권력다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세상 것을 다 내려놓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려놔야 오를 수 있지만
오르고자 할 때 내려놓고
오르고자 할 때 이 세상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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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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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이별의 커다란 슬픔 그 너머 영원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내게 있음에 감사한다(고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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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2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 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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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동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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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은 높은 자리로 올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공부 좀 해라.’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가장 높은 자리는 꼭 한자리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높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자리가 두 자리라면 그 자리는 가장 높은 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얼마 없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자들 또한 세상의 눈으로 하늘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규칙과 반대로 사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가장 비천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수난당하시고, 벌거벗겨지고 매를 맞으며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권력자가 이런 죽음을 선택하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권력자가 자기 항변 한번 안 하고 순한 양처럼 처형당하겠습니까?
이제 우리 선택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첫째 자리를 열망하며 끌어내리며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하늘나라 첫째 자리를 위해 말씀 안에서 사랑과 의로움을 찾으며 살아갈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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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쪽지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기도 내용을 작은 쪽지에 적습니다. 그 쪽지는 이내 하늘나라로 전송됩니다.
그리고 금방 하늘나라는 기도 쪽지로 가득 찹니다.
하느님이 되면 편할 줄 알았던 브루스는 수많은 기도 내용과 업무에 깜짝 놀랍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이곳에 봉헌된 기도 쪽지를 보며 함께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참 바쁘시겠다.’하는 생각입니다.
전 세계 많은 사람이 매일 이렇게 많은 기도를 봉헌하는데, 하물며 모든 기도를 세상의 혼잡해지지 않도록 들어주셔야 하니, 하느님은 얼마나 바쁘시고 머리 아프실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는 기도합니다.
작은 쪽지에 담아 하늘로 올려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순간, 방법대로 이루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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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나의 행동
평등한 세상이 과연 이루어질까요?
고대인들은 식량과 땅을 빼앗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계급과 권한이 주어졌고 불평등한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권한과 부를 갖기 위해 전력 질주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도전해야 할 대상, 때로는 넘어가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두머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고, 제일 끝 가장 겸손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회의 통상적인 지위가 역전되는 혁명, 즉 나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이 가장 존중받는 세상, 사랑의 혁명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가 변화되려면 권한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특권을 포기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진정한 평등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서로가 경쟁 상대, 제거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따뜻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권력은 권한을 가진 사람,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위란 단지 업무와 책임을 분배할 때만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자 주어진 일은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겸손을 따르는 새로운 사회로 변화된다면 더 이상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아직도 더 좋은 자리, 더 중요한 자리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아직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다시 또 주님의 길로 돌아 가기 위해 스스로 작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를 조금만 놓아버리고 마음의 평화를 가지십시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따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한번만 더 그들을 돌아보십시오.
나의 작은 행동과 따뜻한 마음이 어느 한 누군가에게 평화와 작은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주님, 주님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저희가 다시 아버지 주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닮게 하여 주소서.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오늘날 아동과 여성, 장애자들은 그 옛날보다 훨씬 많은 관심과 돌봄을 받고 있지만 또 다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면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예수님께서 가장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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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첫째의 삶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신망애(信望愛) 삶을, 진선미(眞善美) 삶을 두터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은총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너무 잊고 지낸 생명의 주님입니다.
어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갈망하여 피정자들과 파견미사후 퇴장성가 부르기전 일어나 함께 부른 만세칠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자 강론에 이어 실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양손을 활짝 펴들고 만세칠창을 바쳤습니다. 피정자들도 이런 체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우리 가정 만세!”
함께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두발로 서서 눈들어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입니다. 순교자성월 9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철은 정말 기도의 계절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받쳐 주는 주님께 기도할 때 활력넘치는 충만한 삶이요, 위에서부터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는 수제자 베드로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 예고 때는 철부지 제자들은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승이자 주님께 공감하는 분위기가 전무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신, 생명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길은 걸을 때 마다 상기해야 할 사실은 길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과 목사 이현주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목사인 자기에게 성서 말씀이 아닌 도인이라 불러준 것에 대해 묻자 장일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허, 자네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신가? 길 도(道)에 사람 인(人), 그러면 그게 길 가는 사람이지, 사람이 길을 간다는 건 길을 닦는 거라.”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길 가는 사람’ 도인(道人)이자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들임을 깨닫습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말마디가 도(道)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 중국한자 성경은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삶의 지혜도 길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싶어 나눕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위해, 소식(小食)에 고기를 먹기, 뭘하든 계속하기, 햇빛 쬐기, 눕지 말고 움직이기, 일부러 외출하기, SNS를 즐기기, 지인과 대화하기, 느슨한 운동을 습관화하기”
이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쉬지말고 기도하기, 적절한 걷기 운동”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필시 이런 삶의 지혜도 적절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는 질문에 차마 부끄러워 대답을 못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위에서 오는 지혜의 절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이런 지혜를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 영적 진리의, 겸손의 최고봉이자 천상 지혜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이런 첫째의 삶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런 첫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공동체의 첫째 원리입니다. 모두가 “커지기 경쟁”이 아니라 모든 이의 “꼴찌 되기, 작아지기의 경쟁, 모든 이의 종이 되기 경쟁”이라면 상상만해도 너무 흐뭇한 장면입니다.
여기서 지체없이 택한 오늘 강론 제목, “첫째의 삶-모든 이의 꼴지, 모든 이의 종”입니다. 영어 말마디 역시 은혜롭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또 하나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Last of all, Servant of all(모두의 꼴찌, 모두의 종)”
얼마나 멋집니까!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우리의 파스카 영성은 어원도 같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 어린이를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로 이 또한 ‘위에서의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건강하고 건전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환대가 예수님 환대요 하느님 환대라는 놀라운 신비를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물론 모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약자, 병자, 죄인, 난민, 노인들, 변두리 소외된 사람들...끝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환대함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일이요, 모든 이의 꼴지로, 모든 이의 종으로 사는 자가 참 영성가이자 신비가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가한 박해와 시련중에도 이런 위에서의 지혜와 하나된 이들의 내공은 놀랍고 주님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녕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과정을 통해 입증된 영적승리자, 하늘 지혜의 화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영적전쟁의 상황은 흡사 온유와 겸손, 인내력, 분별력의 시험장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한 “지혜의 도(道)”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내적 일치가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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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내님과 함께>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뒤서려고
날마다
낮춥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따르려고
날마다
걷습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닮으려고
날마다
비웁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살리려고
날마다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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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어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게 됩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수난당한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사람의 아들은
구약 성경이 전하는 모습인데
그 모습은 화려한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화려함이 아니라 수난을 말씀하시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자신들의 스승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생각은 더 나아가
자신들도 수난의 고통이 아니라
화려한 영광만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더 나아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잘 것 없는 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십니다.
부활의 화려함보다는
수난의 고통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표현하시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왕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화려함에 머무는 사람이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조건 없이 그 모두를 껴안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지 따지지 않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가 높은지 낮은지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
오늘 하루도 우리를 충만하게 감싸주시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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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4&id=2102903&menu=4770
이기승 [bona24] 2024-09-21 ㅣNo.17612
- 하느님의 뜻과 결혼하기 -
여러분의 모든 시련,
압박 그리고 불운을
하느님의 가장 거룩한 뜻에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시련을 인간으로부터,
도둑으로부터,
동물로부터,
나쁜 날씨로부터,
농작물 실패로부터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직접 하느님의 사랑스런 손길로부터
받아들이십시오.
믿음과 희망의 반지를 끼고
하느님의 뜻에
여러분 스스로를 결혼시키십시오.
[기도]
저는 모든 걱정을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주님,
그러면 당신 아드님의 수난이 부활로 이어졌듯이
사랑스런 결과로 이끄시겠지요.
당신의 뜻에 믿음으로 결혼하도록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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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해 백색 순교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동
박윤식 [big-llight] 2024-09-21 ㅣNo.176143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특히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 받아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였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하는 다른 나라의 교회와는 매우 특이하다. 또한 당시 우리는 전통중시의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어 그리스도교와는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제사 등에 대한 교회의 반대로 천주교는 박해를 받아 거의 만여 명이 순교를 당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한국 천주교는 9월 20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낸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에 싸여 올 때에는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게다.”’
무릇 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는데, 그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죽음일 게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킨다는 것도 안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가야 하리라.
그렇지만 인생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여겨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순교란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앙 때문에 목숨 바치는 거다. 죽음 다음에도 분명 내세가 있다고 믿기에. 그들은 그런 믿음을 지녔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 그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인내할 수가 있었다. 그 믿음은 불굴의 힘을 안긴다. 또한 순교는 주님의 은총도 분명 함께 했으리라.
우리도 저 십자가를 지고 선뜻 나설까? 우리의 순교자들은 다 그렇게 하였단다. 그러기에 그분들의 삶을 본받게 해 주십사고 기도드리자.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려면 잃을 것이고,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이는 목숨을 구할 것이란다. 사실 교회는 저 피 흘리는 순교보다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백색 순교’를 요구한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되기도.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해 평신도 신분이나 마치 수도자처럼 사시는 분들도 종종 만난다. 그 삶이야말로 백색 순교, 곧 순교자의 길을 걷는 것이리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기억하는 날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순교의 기회가 거의 없단다. 그래서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진다나.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은 없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목숨까지 내어 놓는 큰 순교에 이르게 하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작은 순교이다. 성경 한 줄 읽으며 주님 뜻 찾는 것도 순교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더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는 그것이 순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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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은 자주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으면,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관대한 자비와도 거리가 멀고, 평화 속에 심어진 의로움의 열매도 아닙니다(3,17-18 참조).
싸움과 다툼, 분쟁은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기는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바라는 바를 얻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였을 때, 그들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욕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그림들에서 어린이들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능력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박해자들 앞에서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박해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임까지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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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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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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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갈 것이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도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여 스승의 수난을 거부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자들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듣고 같은 태도를 보인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오늘 복음을 보면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다른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 여정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길은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넘어가다, paradidotai”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께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암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승리가 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이렇게 승리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사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32절). 메시아의 고통은 그들에게 터무니없고 부활의 영광도 체험해 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32절).
복음은 메시아의 수난 앞에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지를 다투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데 반해, 사도들은 걸레 조각 같은 명예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만일에 그렇다면 교회의 참모습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이것은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나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다만, 첫 자리의 의미와 권위의 의미를 뒤집어놓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첫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획득하셨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봉사와 사랑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적대감이나 천박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는 고사하고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를 안으시며 그들의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같이 ‘꼴찌’가 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과 동일시했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된 증표가 되려면 어린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그때 첫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어린아이는 무한한 가치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신다. 즉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등 그들 가운데 항상 현존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바로 그들의 품위와 가치를 존중해주시고 그들의 나약함을 감싸주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 사랑의 성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어린아이의 미소와 사랑스러움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야고 3,17)는 겸손되이 항구히 원함으로써만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에 올 때 “평화로운”(야고 3,17) 그 지혜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야기하는 부패의 면모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통한 세상의 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변화이며 기적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와 사랑(꼴찌)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첫째)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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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려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게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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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ㄴ-26).”
1) 신앙생활은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동시에 그 믿음을 생활로(온 삶으로)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신앙을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는 신앙의 완성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완성이기도 하고, 증언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고, 믿음이 없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음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믿음의 방향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가 믿음을 뒤로 밀어내는 이가 있는데, 신앙인의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순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음 없이 사랑만으로 죽는 일이 더러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그 죽음을 고귀한 희생이라고 부르더라도, 우리 교회가 말하는 순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순교는 신앙인이 신앙을 증언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지만, 순교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고,
순교는 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박해자들이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도 죽기를 자청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사실 순교는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은총이며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 순교한 분들도 많지만,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 속 같은 곳으로 가서 교우촌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계속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인데,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사람마다 그 성격과 내용과 크기가 다릅니다.
박해와 순교가 십자가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육신의 목숨에만 집착하는 사람”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만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온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은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항상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주님을 버리고 떠난 양은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이고, 그가 받게 되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주님의 사랑’만 믿고 방심하고 자만하는 것은,
그 사랑을 배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지금’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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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여인이 끌려오니 관장이 “너는 왜 왔느냐?”하고 모욕적으로 묻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 또한 천주님을 믿는 사람이니 국법대로 다스림을 받으러 왔습니다.” 관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믿는 천주가 도대체 어느 책에 적혀 있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관장은 글도 모르는 게 와서 국법 운운하니까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는 “글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천주를 믿느냐, 너는 천주를 본 적이 있느냐?”하며 다그칩니다. 그러자 여인은 “저는 본 적이 없습 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봐라! 글로 아는 게 있느냐,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하고 관장이 무시하자 여인이 답합니다. “나리,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나리님을 보내셔서 오셨기에 저는 임금님이 계신 줄 믿나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온갖 거짓 정보들이 가득하여 무엇이 진실인지를 제대로 구별해내기 어렵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유혹거리들이 넘쳐나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기가 어려워진 요즘 세상에서, 순교 성인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되새기는 것은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식별하는데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하느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용기와 힘을 얻지요.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명예와 성공, 그밖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 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랬기에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그들에게는 그 신앙이 전부였기에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신앙을 내 삶을 멋져보이게 꾸며주는 ‘악세서리’정도로 생각했다면, 시간이 남고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여가활동 정도로 여겼다면, 순교는 엄두도 못냈겠지요. 자연스럽게 ‘구원’도 나와는 먼 ‘남의 일’이 되었을테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생활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그치십니다. 당신을 제대로 믿고 따르려면, 그래서 세상 종말의 날에 당신 뒤를 따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대충대충, 눈치보며 적당히 할 생각말고 최선을 다해 구원의 길을 걸으라는 겁니다. 그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먼저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쓸모 없는 것을 버리는게 아니라, 주님과 그분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며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중요할 지 모르지만 구원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그것들이 내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어 주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만 하려고 드는 나의 취향, 바람, 계획 등 자기 중심적인 요소들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주님과 그분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채워가라는 뜻입니다. 이는 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입니다. 여름에 감나무가 덜 익은 열매들을 털어내듯이, 가을에 활엽수들이 그 많던 나뭇잎들을 떨구듯이…. 셋째,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하느님께,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치라는 뜻입니다. 물론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그러하듯 하느님께 딱히 내어드릴 것은 없고 받기만 하는게 어쩔 수 없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이지만, 그래도 사랑과 정성 그리고 희생을 바치려는 마음을 갖는게 중요한 겁니다.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신부님께 드릴 것이 없어 감자라도 쪄 드리는 그 마음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두 번하고 마는게 아니라 꾸준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꾸준함을 ‘날마다’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나의 작은 노력이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큰 변화로 나타나지 않아 실망스러워도, 매일매일 ‘제 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아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나선형 계단’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제 자리를 도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주님께 가까워지는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의 일부라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뒤에 설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의 겸손을 닮으려고 애써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나의 욕심과 집착들을 비워 나가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날마다 조금씩 신앙을 실천해야지요.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양보하고 희생하는 연습을 해야지요.]
매일 이루어지는 그 노력은 십자가를 지는 행동으로 구체화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에 동반되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쉽고 편한 길을 놔두고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려고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쓸 데 없는 고생을 사서하는 비효율적,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높은 산도 만나고 깊은 강도 만나게 되는데, 그걸 넘고 건너는게 힘들다고 천국으로 가는 걸 포기할 수는 없으니 힘을 내어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겁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점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어깨에 짊어진 크고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질질 끌고 가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어안고 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때로는 나를 아프게 찌를지라도, 때로는 그것 때문에 손해를 입고 희생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사랑과 순명으로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 그렇게 하셨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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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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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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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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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 연중 제25주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삶
<2024.9.22>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0:18~36절)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삶❞
❚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을 아시며 온전히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 버려야 할 영적 우상은 무엇입니까?
➲ 온전한 예배를 위하여 영적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18~27절).
예후는 아합 가문과 이세벨을 제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바알 숭배자들을 근절하기 위한 계책을 세웁니다. 예후는 아합보다 바알을 더 많이 섬기겠다고 거짓 선전을 합니다. 예후는 바알을 위해 큰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면서 성대한 대회를 공포합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빠짐없이 참석할 것을 명령합니다(18~22절). 예후는 바알의 신당에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후가 바알 신자들을 몰살하는 것을 여호나답에게 보여주고자 함께 동행하였습니다(23절). 예후는 비밀스럽고 정확하게 계획을 진행하여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죽이고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습니다(24~27절). 바알 신당을 변소로 만듦으로써 바알 숭배를 분뇨보다 못한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무엇보다도 온전한 예배 회복을 위해 집중하며 영적 바알을 제거하는 일에 거룩한 열심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전쟁을 벌였던 엘리야처럼 그리고 바알 종교를 없애기 위해 열심을 보여주었던 예후처럼 오늘 이 시대에 만연한 맘몬과 탐욕과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스펙에 대한 보이지 않는 영적 우상 숭배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써 뿌리 뽑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게 하는 것들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은밀한 영적 바알과 아세라를 말씀의 검으로 찍어 버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단을 쌓아가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온전한 헌신을 위하여 영적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28~31절).
예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공존합니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일은 예후가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이스라엘에 만연해 있던 바알 종교를 뿌리채 뽑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 가문을 진멸한 것입니다(28,30절). 반면에 부정적인 평가는 받는 것은 예후가 바알은 제거하였지만 여로보암의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29절). 또한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였습니다(31절).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나라를 내 자신의 이익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의 특권과 욕심을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죄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더욱 심판받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그리고 온전한 헌신을 위하여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온전한 순종을 위하여 영적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32~36절).
호전적인 아람 왕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요단 동편 지역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사엘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온 땅을 탈취했는데, 그곳은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거주했던 지역이었습니다. 하사엘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사해 동편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갈릴리 호수 동북부 지역인 바산까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32~33절). 이는 예후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단과 벧엘의 금송아지를 섬기도록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잘라 내어 이방인에게 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예후는 사마리아에서 이십팔 년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후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반의 순종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후처럼 아합 세력과 바알 우상을 제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상을 남겨 두는 죄악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두 가지 우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서 온전한 순종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는 영적 아합과 영적 바알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서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길로 행하여 칭찬을 받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0:18~3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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