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lam 9-수니파,시아파】
서기 632년 6월 8일.
무함마드는 아들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누가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되는가 였다.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뒷날 칼리프로 명칭이 바뀌어 이슬람의 최고 정치,종교 지도자가 된다.
무함마드의 뒤를 이을 지도자 후보는 아부 바크르,우마르,우스만 ,알리 이렇게 4명으로 압축됐는데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가장 친한 친구로 무함마드의 아내 하디자에 이어 두 번째 무슬림이었다.
그는 메카를 지배하던 쿠라사이족의 부유한 상인출신으로 아내를 잃은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딸 아이샤를 아내로 보냈는데 뒷날 아이샤가 전해준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이 쿠란과 더불어 중요한 경전인 하디스가 됐다.
핏줄로 따지면 첫 칼리프로서의 정통성을 지닌 것은 알리였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으로 무함마드와 하디자 사이에서 태어난 파티마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높은 도덕과 인품을 갖춘 아부 바크르는 모든 무슬림의 존경을 받았기에 알리의 양보로 아부 바크르가 첫 칼리프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부 바크르는 겸손하지만 단호한 성격으로 칼리프에 오른 지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나지만 그 2년 동안 동로마제국과 사산조페르시아를 물리쳐 거대한 이슬람제국의 기초를 닦았고 놀라울 만큼 높은 도덕과 인품으로 모든 무슬림을 감동시켰다.
아부 바크르는 숨을 거두면서 우마르를 2대 칼리프로 지명했는데 우마르는 불같은 성격의 강인한 사람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포교를 위한 전쟁에 나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첫 이슬람지도자가 됐고 638년에는 팔레스타인지방까지 점령한다.
우마르는 용맹한 지도자였지만 그가 정복한 지역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에게는 이슬람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믿는 신도 우리의 신과 같다.그냥 믿도록 두어라.다만 믿는 방법이 잘못되었느니라"
642년 드디어 페르시아를 점령해 이슬람국가로 만들고 서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해 지중해연안의 패권을 장악한다.
그러난 그는 적도 많이 생겨서 기독교도인 페르시아계노예의 손에 암살되고 만다.
이때가 644년.제 3대 칼리프는 당연히 알리에게 돌아올 것 같았는데 이슬람지도자들은 부유한 원로 우스만을 칼리프로 추대한다
우스만은 부드러운 성격의 상인출신으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다.
그의 통치시대 이슬람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과 서쪽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이슬람제국으로 발전한다.
우스만은 쿠란을 정비해 이슬람교의 교리를 체계화했지만 자신의 가문인 옴미아드가에 지나치게 의존해 다른 가문들의 불만을 산다.
656년,우스만은 불만을 품은 다른 민족폭도들에게 암살당한다.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이슬람교는 크게 분열된다.
알리도 이미 칼리프에 올랐던 사람들 처럼 높은 도덕성과 청빈한 성격을 지녀 칼리프에 오를 충분한 자격이 되지만 그가 20년간 칼리프에 오르지 못해 불만에 차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우스만 암살의 배후에 알리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받는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당연히 알리가 칼리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반대파들은 혈통이나 정통성보다는 인품과 능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통성을 중시하고 원리,원칙주의을 주장하는 것이 알리를 지지하는 시아파이고 이란이 대표적인 시아파 무슬림국가이다.
현실성을 중시하고 융통성있고 온화적이며 보편성을 중시하는 것이 알리 반대파인 수니파로 전세계 무슬림의 75%는 수니파에 속한다.
7세기에 반목을 보이기 시작한 수니파와 시아파간의 갈등은 지금까지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656년 제 3대 칼리프 우스만이 80세의 나이로 암살당하고 알리가 뒤를 잇자,그가 음모를 꾸몄다는 소문이 퍼졌고 우스만의 가문인 옴미아드가는 알리의 응징을 선언해서 이때 최초로 무슬림들끼리의 전쟁이 일어난다.
알리도 결국 5년만에 암살당하면서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최초의 무슬림들의 시대 ,이를 정통 칼리프의 시대라고 하는데,는 막을 내리고 무함마드를 직접 만나지 않은 칼리프가 통치하는 시대가 온다.
헤지라 이후 불과 30년 만에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높은 도덕성과 윤리를 갖춘 지도자와 모든 종족을 형제로 삼는 이슬람공동체의식으로 인한 단결때문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