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나주부대해남 민간인학살 지역 목각원혼비 표식및 위령제봉행
-일시:2023년 6월24일~ (토)2시~3시 30분 -장소:해남읍 해리 노인회관(해남읍 북부 순환로 57)오후 1시30분 -진행:박종래 상임대표(010-6806-1098) -내용:해남 나주부대 민간인학살지 획인및 표식 거치행사 -주최: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주관: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 해남 유족회 -후원: 행정안전부.아시아 1인극 협회 |
진행하는 박종래 행사단장
[인사말]
안녕하세요
민족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3주기를 맞이하여 한반도 남쪽끝자락 아곳 해남에서 나주경찰부대의 천인공로할 학살만행에 목숨을 잃은 원혼들과 유가족을 위로하는 행사를 해남유족회 유족님들과 공동주최 하는것을 뜻깊게생각합니다
그러나 제2기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였지만 역사왜곡을일삼는 김광동이가 진실을 외면하고 유족을 우롱하는 발언을 매일쏱아내고있어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행사를 모두 마치고 상경하여 감광동을 쫒아내는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할것입니다
오늘행사에 참여해주신 해남유족들의 그동안 의고통을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둘것아며 관련단체와 모든분들께 감사와 더불어 위로의 말씀 올립니다.감사합니다
고유문 낭송(김선희유족)
[해남 나주경찰부대 학살지 고유문]
유세차 계묘년 유월 스무 나흩날
해남 피학살 영가여!
삼가 고하나이다
푸른바다 남녁 끝자락 충절의고장 해남
약무호남시무국가
무호남 무국가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애국 충정의 호령소리
삼천리강산에 메아리쳐오네
민족의 명운을 갈랐던 통한의 6,25전쟁에
아름다웠던 해남고을에 피바람이 불어닦쳤네
한국전쟁피학살유족회는 삼가 목각원혼비를 거치하고
영령들의 억을한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기위해
무릎 조아리고 제를 올리나이다.
요마귀축의 친일군경에게 말한디못하고 푸른청춘을
도륙당한 천추의한 반드시 역사는 증명하리다.
오늘따라 사무친 그리움은 더해가고 망극할따름입니다.
백만 영령들이시여!
우리 후손들은 74년동안 한순간도 님들의영혼 잊은적이 없나이다.
억장이 무너진 구슬픈 눈물방울은 강이되어 바다로 흘러갔고
명량의 거친바다 파도소리 구슬피 울고있습니다.
오호 영령들이시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게 죄가되어 백주 대낮에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대한민국 경찰 나부부대의 총칼에 목련꽃같은 젊은청춘들이 쓰러져버렸나이다.
님들의 죽음헛되지 않기위해 후손들 몸부림치고 진실과 싸우고있지만
74년이 지나가도 미궁속을 헤매고있나이다.육신도 못찿은 불효의죄 용서해주소서
해남 피학살 영가여!
국가는 원혼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부인하지만 조국강산과 산천은
저달과 태양은 그날의 참혹하였던 죽음의 현장을 알고있나이다.
이제 고귀한 님들의 미래였던 조국통일의꿈 이루어 부활하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데 영령들께서는 사무친 원한 플어버리시고
정성스레 준비한 향초를 피워 제물로 제를 올리나니 흠향하옵소서
계묘년 유월 스무 나흩날
해원무공연(아시아 1인극 윤혜경이사)
목각원혼비거치후 참석자들 기념촬영
『 2023년 6월24일 한국전쟁73주기를 맞이하여 천인이 공노할 나주경찰부대의 만행을 다시한번 고발하기위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유족회와 해남유족회가 공동으로 인근학살현장 부근에 목각 원혼비거치및 해원무공연 행사를 엄묵한 분위기속에서 원혼들을 위무하는 행사를 개최하였습니다. 학살지는 아파트가 건설돠었고 우물은 콩크리트로 포장돠어 학살장소는 은폐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김선희 유족이고유문을 낭송할떄 사무친 그리움과 분노에차있던 해남유족들이 흐느낌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숙연지게하였습니다..전통의식으로 치루어진 제레에는 초헌관에 해남유족대표.아헌관에 송운학 촛불계승백만연대 상임대표 종헌관에 유족중앙회 좌융수고문이 헌화 재배하였으며 이어 해남유족들과 참여해주신 모든분들이 분행 재배하였습니다.특히 해님해리 이장님께서 당시상황을 목격한 생생한 증언을 해주시고 현장행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6월24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의장 윤호상
[인민군복 위장 나주부대 민행의 증언기록]
"막둥아, 엄마 있냐?" "예."
1950년 7월 25일. 이웃집에 사는 해남경찰서 고 형사가 식전에 찾아와 김경예의 어머니 김문신을 찾았다. 무슨 얘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김문신은 딸 김경예(당시 17세)에게 "막둥아, 느그 오빠 데려온나"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김경예는 해남읍 해리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고 있던 오빠 김재수(당시 35세로 추정)에게 달려가 평동리 본가로 데려왔다. 집에서 기다리던 고 형사는 김재수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 속닥였다. 그날 오후였다.
"막둥아, 느그 오빠 점심 차려라." 김경예가 고봉밥과 김치를 개다리소반에 얹는 찰라에 나주경찰부대원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군화를 신은 채 무턱대고 안방에 들어갔다. "가자!" 어머니 김문순과 오빠 김재수가 엉겹결에 떠밀려 나왔다. 김경예가 뒤쫓아 가자 김문순은 "막둥아, 느그 오빠 신이나 갖고 온나"라고 했다. 김재수는 경찰의 총구에 떠밀리느라 신발도 신지 못했다.
차마 변소통에는 못 들어가겠더마
김경예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신발을 챙겨 몸을 돌리는 순간, "탕"하는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설마!'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김경예는 어머니가 있던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엔 오빠가 없었다. 다만 오빠가 서있던 자리에는 핏자국만이 보였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진 김문순이 입을 떼려는 순간 "탕" 소리가 이어졌다. 김문순이 총을 맞고 고꾸라진 게 먼저인지, 김경예가 정신이 나가 쓰러진 게 먼저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잠시 후 김경예가 눈을 뜨니 "우리는 아무 죄가 없어라"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탕 탕." 금속 파열음 소리는 귀를 찢는 듯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김경예는 가까운 집으로 무작정 뛰었다. 고 형사 집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아궁이에 머리를 집어 넣었는데 몸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를 빼니 검댕이가 떨어졌다. 뒤꼍으로 갔다. 장작더미가 있어 그 사이로 들어가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금속 파열음은 계속됐다. "탕 탕 탕." 동네 사람들이 쓰러지며 피를 토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어디로 숨어야 안전할까, 합수통(변소의 방언)에 들어갈까.' 김경예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합수통에는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고 형사 집 담을 넘어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갔다. 헛간으로 가서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성님!"하며 이웃집 할머니가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뛰어들었다. "어따 어따, 우리 아군이라 안하요." 총을 쏜 이가 아군(나주경찰부대)이라는 말이었다.
한바탕 총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김경예도 거리로 나왔다. 일부 사람들도 태극기를 머리 위로 들고 고양이 발걸음을 하고 나왔다.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김경예는 어머니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친구 덕예네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거기에 염라대왕 같은 나주경찰부대원이 있는 게 아닌가. 덕예 아버지가 작은소리로 뭐라뭐라 중얼거리자 총을 든 경찰이 "더 크게!"라고 외쳤다. 덕예 아버지의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와 "탕"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덕예 아버지는 해남 읍내에서 상을 팔고 고치 가게를 하던 이였다.
해남경찰이 부산으로 후퇴한 지 이틀 만인 1950년 7월 25일의 일이었다.
나주경찰부대원의 고향은 화를 면해
이날 해남읍에 진주한 나주경찰부대는 외관상으로 인민군인지 대한민국 군·경인지가 불분명했다. 소속을 알 수 있는 견장, 버클, 군모, 복장 등 주요 부분을 가리고 북한 말투를 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나주경찰부대원 100여명은 쓰리쿼터와 트럭 10대에 나누어 타고 해남읍내 곳곳을 다니며 '피의 살육제'를 벌였다. 하루 동안 90여 명이 학살됐다.
해남 주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몇몇 사람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주민들은 무차별 사격의 대상이 되었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성인 남성이 주 타깃이었다.
당시 나주경찰부대원은 소부대로 나뉘어 해남군 소재 각 면으로 이동했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에서는 주민 2명이 사살되었다. 나주경찰부대 트럭이 마을로 진주하자, 이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주민 30~40명이 환영을 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6명이 해남경찰서로 연행됐고 이중 2명이 학살됐다.
나주경찰부대가 완도로 이동하면서 해남군 현산면 일평리를 지날 때였다. 경찰부대를 도로에서 마주친 주민 3명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길가 개울에 머리를 쳐박았다. 나주경찰부대가 총을 쏘아 그들을 벌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다. 경찰은 주민들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총질을 했다. 사냥꾼이 지나가는 짐승에게 총질한 격이다.
이 와중에도 놀랍게도 피해를 전혀 보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바로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였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인민군을 환영한다며 주민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까? 이날 진주한 나주경찰부대원 중에 남창리가 고향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찰은 "아재들요, 언능 들어가씨오"라며 등을 떠밀었고 경찰 지휘자에게는 "여기 무식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잉께 용서해 주이소"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눈감아 주어 남창리에서는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나오지 않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공포의식'의 내면화
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해남지역 주민을 학살했을까? 일제 강점기 해남군에는 '해남소작인회' 등 농민조직이 결성, 1930년대에는 소작쟁의 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또 1930년대 전라남도 최대의 조직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군 북평면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해방 후에는 '해남군 인민위원회'와 '농민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 군정도 진주 초기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장 김정수를 초대 해남군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1946년 11월 11일 일어난 '해남추수봉기'를 기점으로 미 군정은 좌익진영과 농민운동세력을 탄압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해남의 농민운동 세력과 진보진영을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남경찰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독립운동가와 농민운동 세력을 1차 싹쓸이를 했다. 이후 나주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해 2차 싹쓸이를 했다.
싹쓸이를 하면서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이나 그렇지 않은 주민도 '빨갱이'로 몰아붙여 죽였다. 두 번의 광풍을 겪은 해남 주민들은 '빨갱이'라는 말 앞에는 입도 뻥끗 못했다. 공포의식이 내면화돼 이후 반백 년 동안 피해의식에 젖어 살게 되었다.
손녀에게 젖을 물린 할아버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김경예가 구정물을 얻어 와 돼지우리에 쏟아부었을 때였다. 방문 창호지에 조카를 안은 아버지의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김경예가 방문을 여는데 아버지가 조카(죽은 김재수의 딸)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게 아닌가.
집 나이 세 살짜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젖을 물린 것이다. 젖은 나오지 않았지만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애기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 모습에 김경예는 눈물이 핑 돌았다. 3개월 전 오빠가 총에 맞은 날이 또 떠올랐다. 총에 맞은 오빠 김재수를 아버지 김영두와 이웃집 아저씨가 업어와 마루에 눕혔다.
오빠의 배에서는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김경예는 마루 닦는 걸레로 오빠의 가슴과 배를 닦았다. 걸레는 금세 피로 얼룩졌다. 냇가에 가 피 묻은 걸레를 빠는데, 냇물에 오빠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김경예는 울음이 터졌다.
김경예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갔는데 특히 걸레로 오빠의 몸을 닦을 때 났던 피 냄새는 무척 오래 갔다. 나중에 시집을 간 그녀가 마루를 닦는데 갑자기 피 냄새가 '확' 났다. 그만 김경예는 정신줄을 놓았다.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오빠 김재수가 학살된 지 얼마 후였다. 올케 언니가 개가를 했다. 7세, 5세, 3세가 된 조카가 3명이나 있었다. 김영두는 며느리에게 "그래 가거라. 다만 경찰한테만은 시집 가지 말거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며느리는 개가했다. 7세 아들은 해남고아원에 맡겨졌고,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은 김영두의 차남이 맡아 키웠다. 둘째 자식에게 손녀를 맡기기 전 김영두는 손녀가 칭얼대면 나오지 않는 자신의 젖을 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