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59
5월16일[부활 제7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gmkMd4MoF4
[서울대교구 유한동 크리스토퍼(시흥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계시니!>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그 혹독하고 끔찍한 수난 여정이 시작됩니다. 무죄하신 분이 죄투성이인 인간들 앞에 죄인으로 서십니다. 헤로데와 빌라도 앞에, 그리고 유다 산헤드린 앞에 서십니다.
그런데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체포된 바오로 사도 역시 천인대장과 유다 최고 의회 앞에 서셨습니다.
당신에게 맡겨진 지상에서의 사명 수행을 거의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거듭된 질문앞에서 시종일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달릴 길이 남아있던 바오로 사도는 용감하고도 담대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의 체포와 사형 판결을 위해 당시 유다 사회를 주름잡던 잘 나가던 두 단체가 일시적 동맹 관계를 맺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 문제로 견해를 달리하던 두 부류였지만,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는 합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촌철살인 같은 바오로 사도의 한마디 발언이 둘 사이의 관계를 깨어지게 만듭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바오로 사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아킬레스 끈을 여지없이 끊어버린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전략에 휘말린 두 부류는 즉시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회중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재판 마당은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바리사이 쪽의 지지로 바오로 사도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 앞에 서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그날 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오로 사도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계시니,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적극적인 동반과 지원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적대자들의 혹독한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담대하고 기쁜 얼굴로 자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모아 복음 선포에 쏟아붓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ndxjg3aofE
++++++++++++++++++
<행복해지려면 나의 영광을 죽이는 영광을 추구하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관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서 엄마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행복의 핵심이 됩니다. 반대로 관계가 깨질 때 분리불안과 같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관계는 먹고 생존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과 고통을 줍니다.
그렇다면 관계는 어떻게 이뤄질까요? 일단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일반적으로 같은 목적을 전제합니다. 같은 목적이 없다면 만남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대학의 같은 학과를 생각해보면 쉽니다. 같은 것을 공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목적으로 모이면 관계가 좋을까요? 막가파와 같은 집단은 부자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모인 조직입니다. 그런 조직은 조직원 간의 관계에서 행복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마귀들도 사탄과 같은 목적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관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목적이 같아서 모이기는 했지만,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피를 보고 모여드는 것을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모기 집단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흩어집니다.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2001)에서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 만든 이 반지는 다른 모든 힘의 고리를 통제하고 중간계를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하는 엄청난 위협을 깨달은 마법사 간달프는 프로도에게 집을 떠나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위험한 여행을 떠나라고 조언합니다. 반프로도는 겸손하여 그 반지를 끼지 않으면서도 그 반지를 파괴하러 가는 여정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정 내내 원정대는 위험한 풍경, 괴물 같은 생물, 사우론의 어둠의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추격 등 수많은 도전과 위험에 직면합니다. 인종, 문화,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지 원정대대원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단결과 협력은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보다 더 소중한 하나 된 팀이 되었습니다.
모든 우리가 선택하는 일에는 항상 ‘영광’이 있습니다. 다만 모기와 같은 존재는 자기 영광을 추구함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2001) 같은 경우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기 영광을 희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영광을 못 박고 아버지 영광을 위하셨습니다. 이것이 결국 부활과 승천 영광의 계기가 됩니다.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 결국 가장 완전한 관계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목숨을 주고받을 정도이며 영원합니다.
저도 ‘어떻게 본당 신자들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일치가 있어야 구성원이 행복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같은 목표를 주시되 그 목표가 자기 영광을 죽여야만 하는 목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보며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반지 원정대와 같은 자아를 버린 교회 공동체가 구성됩니다. 정말 관계로 행복해지려면 같은 영광을 추구하되 그 영광을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는 그런 영광을 얻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감동적으로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의좋은 형제’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형은 이제 막 혼인한 동생을 생각했습니다. 동생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로 생각한 형은 늦은 밤에 추수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동생도 형은 아이들이 많으니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추수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둥근 달이 바라보는 가운데 형과 동생은 추수한 벼를 지게에 지고 만났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았습니다. 제가 이 동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더 차지하려고 형제들이 법정에서 다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아픈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형제들이 핑계를 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내 것을 나누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난’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들끼리도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합니다. 재물을 위해서라면 형제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성당에 일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장례미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구역미사와 본당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분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구역미사를 마치고 식사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분과 모임의 방이 겹치는 것입니다. 그 방에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두 단체 모두 그날 영상을 이용해서 모임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전례분과는 꾸르실료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꾸르실료에서 영상을 이용한 교육을 하기 때문입니다. 꾸르실료는 전례분과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임이 겹치면 본당전체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양보하려 하니 문제 해결은 쉽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볼 수 있는 다른 방을 알아보았고, 꾸르실료 모임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감정이 들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욱하는 마음에 말이 거칠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내가 먼저라는 이유를 찾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부활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부활이 있다고 하였고, 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가이는 부활이 없다고 하였고, 천사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이 있다고 하면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게 하였습니다. 천인대장은 바오로 사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안전한 곳으로 바오로 사도를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지혜롭게 처신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의좋은 형제처럼 자신의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입니다. 집에서 새지 않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도 기쁨으로 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증거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7,20-26: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21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리도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신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며, 같은 뜻으로 일치를 이루어 가야 한다. 하나가 된 모습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이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22절)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은 세상에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반되는 성향과 욕망과 죄로 인해 스스로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의 불길에 의해 한마음이 된다. 하나가 된 그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주님과 함께 살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당신을 통해 아버지와 일치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아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아들과 같이 되어 그분을 닮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25절) 아들이 아버지를 아셨듯이,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말씀을 따랐고 그분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아들을 알고 또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아드님을 모시며, 아드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한 몸을 이룬 우리 지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머리와 지체가 모두 포함된 한 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6절) 하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하나가 되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될 때 우리는 모두 한 몸 그리스도가 되어 하느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 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0-21)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4-26)
1) 여기서 ‘이들’은 사도들과 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사도들과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으로 신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받은 마지막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ㄱ)
따라서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은 ‘지금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이들’을 모두 포함하고, 사실상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지금 안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아무도 구원 사업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즉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기도입니다.
2)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씀은,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인간들의 일치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인간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것은 일치가 아니라 죄입니다. 진정한 일치는 하느님 안에서만, 또 하느님과 함께할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하느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단합해서 비극으로 끝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창세 11,8) 라는 말이 있는데, 인류가 분열되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서 죄를 짓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참된 일치’의 모범은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3)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일치가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가 되려고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합니다. 또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 ‘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알다.’ 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과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 있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말씀을 실천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진짜 뜻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기혐오, 자기 비하, 자포자기 같은 것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남의 생명을 살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만 남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남과 한마음이 되려고 노력해야만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4) 26절의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 활동’은, 부활과 승천 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은 아니고, 종말의 날이 될 때까지입니다. 그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구원받기를 끝끝내 거부한 사람들은 소멸될 것이고, 믿고 회개하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당연히 예수님의 구원 활동은 종료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전부 다 완성되었고, 모든 것이 전부 다 완전해졌기 때문입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요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의 정신을 가다듬는 기도입니다. 본디 구약의 대사제의 기도를 각색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대사제가 하느님과 백성이 화해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드렸던 기도를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기도입니다.
하나 됨의 기도의 본질은 ‘화해’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하느님을 저버리고 제 잇속과 욕망에 휩쓸려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본디 모습조차 잃어버린 시간들을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내어놓고, 오늘을 다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담아내는 기도가 하나 됨의 기도입니다.
요한 복음은 그 하나 됨의 원천을 ‘사랑’으로 제시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존중합니다(1코린 13장 참조). 규칙과 조건을 내건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께서 하나이시듯, 믿는 이들이 하나 되는 유일한 조건은 그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 껴안아 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것은 상대를 위한 행동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하느님과 하나 되어 있다는 방증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오로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이웃의 부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모습으로 정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들먹입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유로운 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세 차례에 걸친 험난한 전교 여정에 이어서 예루살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히 전한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이제 땅끝인 로마에 가서 당신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동시에 그에게 “용기를 내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 또한 아버지 안에 계시듯,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광을 함께 노래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염원은 “제 안에”, “아버지 안에”, “우리 안에”, “그들 안에”, “저와 함께”와 같은 반복되는 표현들에서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주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고, 오늘도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내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성체와 사랑의 삶은 우리를 하느님과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과 일치의 하느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깊이 체험한 이는 이 좋으신 분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흔히 “교회의 기도”, “대사제의 기도”, “일치기도”라 불리는 부분의 세 번째 부분으로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이는 당시의 믿는 이들이 “하나” 되어 있지 못했음을 반증해줍니다. 곧 분열 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대체, 무엇과 무엇이 “하나”를 이루며, 무엇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할까요?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를 이루되,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베드로2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것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믿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소서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래서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믿는 이들이 당신이 있는 곳에 있기를 바랄뿐만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기’를 곧 일치하여 “하나” 되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오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치하여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한편 이 세 번째 기도는 “의로우신 아버지”를 부르면서 시작됩니다. ‘알다’란 단어가 다섯 번이나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색을 통해서나 사랑하면서 애정을 통해서 아는 것(25절: γινωσκω)을 넘어서, 미래의 계시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알다’(26절: γινωριξω)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동성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곧 계시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일 때 사랑으로 인도되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은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참된 일치는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선물 위에 역사적 종말과 더불어 건설될 것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똑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17,21)
예수님은 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오늘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수도 생활해 오면서 제가 깨달은 점 하나는 우리는 세상의 어떤 배움보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게 우선하고 중요하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홀로 살 수 없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나와 다른 타인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함께 사는 법’을 먼저 터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안에 살고 당신과 하나 되어 가는 많은 삶의 양식 중에서 수도 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함께 살아가면서 다름 가운데서도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가를 보여 주고 싶으셨다고 봅니다. 수도 생활은, 하느님은 서로 위격이 다르면서도 한 몸으로 참된 친교와 일치를 이루신 것처럼, 세상 안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음’ 드러내는 증거요 실현이라고 느낍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려는 그 치열한 삶의 노력이 필요한 삶의 형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삶의 형태가 공동체 생활이며 많은 삶의 방식 중의 하나가 수도 생활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만이 아니라 많은 수도자가 공감하는 것은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원만하면 일단 수도 생활은 편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타고난 삶의 자리부터 성격과 외모, 생각과 감정, 말하는 태도며 행동 양식 등등. 모든 점이 다른 사람이 함께 모여 하나가 되는 길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요원하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분명 사람은 다 다르게 마련인데 어떤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지 몰라도 이 다름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비로소 인정하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엄청난 착각인 게지요. 하지만 착각은 대오각성을 위한 발판도 됩니다.
주님은 이렇듯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 공동체에서 살라고 불러 주셨으니 이 또한 신비입니다. 한 생을 함께 부부로 살아가도록 성사로 결합된 부부들마저 이혼이 늘어가는 세상에 한 성깔(?)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친형제 자매도 서로 떨어져 살다 보면 몸이야 그렇다고 해도 정신과 마음으로도 하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저는 제 가족 안에서 지금 겪고 있습니다. 하물며 여당과 야당, 남과 북, 영남과 호남, 강남과 강북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길은 어려운 일이며 신앙으로 모인 공동체에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수도 생활이 지향하는 목적은 함께 사는 형제와 자매들이 조화로운 방식으로 함께 사는 것이며 함께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정신에 있어서나 마음에 있어서나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히 혼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한다고 믿습니다. 함께 사는 형제 혹 자매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 안에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이 서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형제 혹 자매를 사랑으로 묶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 계신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저희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튼튼하게 묶어 주고 결합시켜 주어야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손도손 함께 모여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며 세상에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을 저희에게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17,21)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보여 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가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 안에 사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 안에서 언젠가 하나가 되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17,22)라고 기도하신 염원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저희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저희 또한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으로 숨 쉬며 살아간다면 언젠가 우리는 하나가 되리라 믿습니다. 모리스 뒤뤼불레의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노래를 보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시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하고 즐거워 합시다.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경외하고 사랑합시다. 신실한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육으로 성인이 되어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지식의 성장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영적 성장에는 외면하는 부모가 많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은 “지금은 공부 때문에 성당 다니기 힘들지만, 어렸을 때 복사도 했으니, 성인이 되면 열심히 나갈 것입니다.”, “자녀의 종교 자유도 존중해 줘야죠.”라고 하십니다. 좋은 것이라면 아이가 싫다고 해도 챙겨주는 것이 부모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앙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현대인이 죽음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숫자가 늘어나고,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많은 모습에서 죽음의 문화는 그 세력을 더 넓혔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복음을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죽음의 문화 속에서만 있으면 생명의 복음을 지루하고 오래된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학협회의 정식의학회지에 발표된 연구가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미국인의 경우 자살할 확률이 5배 이상 낮다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연구에서도 정기적으로 교회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살할 성향이 적다는 발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곧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 성장만 무조건 ‘OK’를 외쳤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대상은 바로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 믿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면, 아버지의 사랑을 매 순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영적 성장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히 훨씬 더 큰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데도,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합니다. 참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닌 겉으로만 보기 좋은 것만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에 응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고 영혼의 힘이며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히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 됨을 향하여>
요한 17,20-26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 됨을 향하여>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나
내 안에
그대 들이리니
그대
그대 안에
나 들이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그대 안으로
들어가리니
그대
내 안으로
들어오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그대 안에
있으리니
그대
내 안에
있으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나이며
그대이리니
그대
그대이며
나이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의 여정>
-사랑의 일치 공동체 예찬-
공동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공동체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늘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공동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요셉 수도공동체에 산처럼 정주하기 36년째, 날로 깊어지는 공동체와의 사랑입니다. 공동체와의 사랑은 주님과의 사랑을 뜻합니다. 저에게 참으로 위대한 스승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기에 매일 강론 쓰기도 가능합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얼굴들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시키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일치입니다. 사람이 흩어버리면 하느님은 모으십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공동체 일치의 비결을 말합니다. 역시 사랑의 일치입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다.”(성규 72,4-7)
이 또한 아가페적 순수한 사랑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형제들입니다. 서로 건들이지 않는 것, 그냥 놔두고 묵묵히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요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입니다.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라는 장시가 생각납니다.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
혼자서는 못산다
혼자꾸면 꿈이요 함께꾸면 현실이다
잘났든 못났든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안에 ‘홀로’여야 한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들이
그를 잡아주어야 한다
흙속에 묻힌 뿌리들처럼 좌우사방 보이지 않게 뿌리내려야 한다
뿌리내림의 관계다
단절고립된 혼자가 그대로 지옥인거다
땅을 보라
평화로운 공존의 사랑이 아닌가
보금자리 공동체는 땅과 같고
사람들은 땅의 품에 뿌리내린 초목들과 같다
뿌리내릴 너와 나의 공동체가 없다면
그 삶 얼마나 위태롭겠는가!
예전 철없을 때는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며 순수를 고집했지
참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껍데기없는 알맹이가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내가 껍데기라면 너는 알맹이고
네가 알맹이라면 나는 껍데기인거다
알맹이 있어 껍데기이고 껍데기 있어 알맹이다
네가 있어 나이고 내가 있어 너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우리는 서로 ‘짐’이 아니라
서로가 하느님의 ‘선물’인거다
평범하나 이보다 더 깊은 진리, 깊은 지혜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너와 내가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함께한다 하지 않으셨나
혼자서는 살지도 못하고
절대로 사람도 못된다
십중팔구 괴물이나 폐인이다
때때로 내 공동체의 땅을,
내 관계들의 뿌리를 점검해 볼 일이다
너무다 자명한 진리, 까맣게 잊고들 산다”-2005.5.
19년전 이때쯤의 장시의 깨달음의 글이지만 지금은 더욱 공감합니다. 공동체 예찬 같은 시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대변하는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도 그대로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간곡한 기도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고별기도의 내용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기 위하여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요 바로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치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내주의 사랑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삶과 사랑 따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체가 사랑입니다. 일치의 사랑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마음이 시선은 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매일의 사랑의 성체성사가, 공동체의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래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 찬미와 감사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달인으로 만드는 평생 사랑의 훈련입니다. 제가 볼 때, 사랑의 전사, 사랑의 달인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랑의 지혜로 위기를 돌파해가는 바오로의 시야에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공동체라는 의식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바오로의 증언이 결정적 해결의 열쇠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부활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과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천인대장의 기민한 개입으로 바오로는 구출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정말 하느님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뿐이 없고, 일단 이들의 격렬한 대립에서 탈출에 성공한 바오로입니다만, 여전히 무지한 이들은 하느님께 맡기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치의 선교 여정에 오르는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부활의 증언, 사랑의 증언, 일치의 여정에 항구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일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참 많이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공동체 자체가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전히 하나 되는 법>
오늘 제자들을 떠나시며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에 대해 자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생각으로 즉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도 사랑은 누구를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사랑은 누군가를 내 안에 품는 것이고, 주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듯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지 않으셔도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지 않고 우리도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 되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 또한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한때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그리도 열망하고 애도 썼지만 언제부턴가 하나 되는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왜 포기했을까요? 그것이 싫어서? 아닙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 하나 되기를 바랐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가 아닌 우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이 문제로 미워하고 괴로워하기 싫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가 되는 데 최대의 적은 ‘완전한 하나’에 대한 열망입니다. 다르게 얘기하면 ‘완전, Perfect’에 대한 열망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완전에 대한 열망이 욕망 또는 욕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특히 하나 됨에 있어서 많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완전한 하나에서 부족한 하나가 더 아쉽고 불만입니다.
100%의 하나에서 1%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고 불만이고, 숫제 10% 부족한 것보다 더 아쉽고 불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께서 완전히 하나 되기를 바라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무엇보다 바라시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적인 방법이고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서로 안에 머물기보다 하느님 안에 같이 머무는, 독탕에 들어가기보다 같이 욕탕에 들어가듯이 하느님 사랑 안으로 같이 들어가는 우리가 되는, 그런 꿈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한17,20)
<하나가 되는 길!>
오늘 복음(요한17,20-26)은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제자들과 그리고 믿는 이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아버지와 당신 사이의 일치 안으로 믿는 이들도 들어오게 해 달라고 간청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17,21)
'하나가 되는 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가 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안에 머물 때, 성령 안에도 머물게 됩니다.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려면, 지금 나의 모습과 공동체의 모습, 그리고 너와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나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마디를 듣거나 무엇인가를 빼앗기기만 하면 쉽게 흥분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자꾸만 자신을 드러내거나, 모든 덕과 구원의 가장 큰 걸림돌인 교만을 드러내는 모습은, 믿음의 약함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모습의 드러남입니다.
서로가 더 겸손하게 믿고, 더 겸손하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애쓰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가 되는 길'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hwDRPwKqHj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2)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과 하나되는
여정을 걸어갑니다.
영원한 하나로
존재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유로우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생명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가 되면
못 빠져 나갈
좁은 문도
없어집니다.
하나가 되기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가 되는 이 여정은
삶의 본질과
생명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오늘이
하나의 삶이며
하나의 삶이
하나의 생명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