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내가복음
여기서 말하는 내가복음은
어떤 경건하지 못한 목회자가 남을 비방하는 설교를 할 때 사용하는 말 그대로의 ‘내가복음이지?’하는 내가복음이 아닌 "내가(內家)복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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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권(內家拳)은 태극권, 형의권, 팔괘장 등을 가리키는 중국 무술 용어이다.
주로 강하고 빠른 속도로 수련하는 외가권과는 달리 내가권은 부드럽고 느린속도로 수련하며, 내적인 기(氣)를 중요시 한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B%82%B4%EA%B0%80%EA%B6%8C
내가(內家)
아버지 쪽 집안. [유사어] 친가(親家). [반대말] 외가(外家).
[네이버 지식백과] 내가 [內家]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외가권의 고수가 내가권사와 만났을 때 외가권의 고수는 내가권 시전자가 초보자가 아닌 이상 하, 중, 고수임을 막론하고 무조건 조심한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혔을 때 십중팔구 이긴다 해도 외가권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한 치명상을 면키 어렵고 운이 없는 경우 내력이 고강한 중, 고수를 만나 일회성 권격의 충격으로도 심한 경우 내상으로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 고무술의 경우 내가권과 외가권은 기 흐름의 중심이 안쪽이냐 바깥쪽이냐를 판단하는 지표였으나 현대시대로 내려올수록 외가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대가 끊기다 시피(내가권도 마찬가지겠지만) 많은 외공의 비전, 오의를 잃어버렸습니다.
- 이상은 판타지가 아닌 역사상 고무술에 관한 여러 가지 참고문헌을 참고하여 아는 바대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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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온몸이 흉하게 변한 자매의 간증을 기억합니다.
또 선천적으로 불구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다시 태어나도 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고 싶다.“는 형제의 간증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는 와중에 한가지 확실한건 “저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돌보신다. 분명 저들은 죽기까지 주님께 충성하리라”하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상황을 분명히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에는 세가지 믿음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첫째는(은혜) 자신이 말씀으로 만난 하나님과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경험한 경험을 통한 믿음일 것이고
둘째는(은혜) ‘말씀안에 거하며 살다가 보니 내 인생이 간증이었다’라고 시인하는 믿음일 것이고
셋째는(?) 찾으면 만나 주시리라는 말씀을 통해 간구하지는 않으면서 성경을 열심히 문자대로만 보며 교회는 나가는데 오랜 세월(40년 혹은 50년) 변함도 없고 증험도 없는 삶을 사는 성도의 믿음일 것입니다.
첫째 믿음은 다시 둘로 나뉩니다.
1. 말씀을 충실히 살아내고 말씀을 통하여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시행한 분들의 믿음입니다.
2. 세상길로 가다가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이루어진 구속사역에 이끌린 자의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은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께 바친 믿음입니다.
제가 보기엔 셋째 믿음이 제일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죄송하지만 정말 커뮤니티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믿음이겠습니다.
‘오직 말씀‘이라기 보다는 ’오직 모임‘이라 할 만 하겠습니다.
모임 또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임에 지나치게 치중해서는 않되며,
이런 분들을 나쁘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속히 정신을 차리시고 성장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장은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그것을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 것 하나를 실천하는 행위가 시초입니다.
마 25:45
이에 왕이 대답하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말씀‘은 신령한 젖입니다. 기초이자 기본이며 생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서 온실속의 화초마냥 성경에서만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을 과연 기뻐하실까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정신차리십시오. 성경을 보고 묵상을 하여 깨달았다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모든 것을 통해서도 직접 만나셔야합니다.
작은 잡초에서부터 하늘의 창공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을 통해서든 느끼시고 만나셔야 합니다.
고전 11: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악해보이는 사람이 있다 해도, 다소 잘못된 부분이 있는 사람 또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걸 기뻐하시고 두려워하십시오.
아는 것과 경험해본 것은 다릅니다.
마 7:21~2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 나라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은 경험하여 아는 그것이지 사람이 기준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는 것은 변할 수 있지만 경험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능을 행하라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권능없는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걸 온전히 주께 맡기시고 성령은 강한 역사하심으로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고전 12:9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하여짐이라” 하심으로, 내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기도와 간구함으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젖을 떼기 시작할 무렵 마치 도전하듯 밥에 집착을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보자면 아이들의 걷기와 말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젖을 뗄 무렵에 우리는 무엇을 간구해야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밥입니다.
성령님은 성경말씀을 뛰어넘어 천국복음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우리의 참스승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원하신다면 도전하십시오.
요 20:29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실로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신 이 구절에서 위에 밑줄 친 말씀을 유난히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초보의 때를 벗기지 못한 것입니다.
대부분 초신자 때 이 말씀을 좋아하며 본인 또한 한때 이 말씀을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래 가는 사람과 짧게 가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인은 전자인 경우이기에 더욱 권고합니다.
또 위 말씀처럼 스스로 믿는자라고 하면서 믿지 않는데 방언과 성령의 은사를 믿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면 솔직히 인정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신의 믿음을 확정지으십시오.
요 20:27
다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시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대표자 도마를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믿는 성도들이라고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성도나 형제라고 하지 않고 그냥 세상사람이라고 합니다. ※ 지금 이 글은 믿는 성도(형제)들에게 쓴 글임을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성장을 원하신다면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고전 3:10~15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세우기를 조심할지니
아무도 이 닦아 둔 것 외에 다른 터를 능히 닦을 수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그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 가운데서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지 시험할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을 것이나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는 것 같으리라.
구약에선 죄사함을 받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생명을 속죄제물로 바쳤습니다.
성도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얻은 간증을 통해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다면 이것이 아버지쪽 정통 집안의 내가(內家)복음입니다. 이것을 빼앗아갈 자가 결단코 없습니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말함이 아니며 은사주의도 아닙니다. 영의 성장을 말함입니다.
요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또 저희를 알고 저희는 또한 나를 따르느니라.
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저희가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한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신약은 대부분이 사도들의 경험과 함께 있는 서신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또한 간증서입니다.
성도들은 각개인이 스스로의 간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내가 가난하고 고단하고 핍박받고 굶주릴 때 예수님은 옆에 항상 함께 계셨고 다른 사람이 나처럼 그러할 때 옛날의 내 모습을 그리며 그들을 돕고 또는 격려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것은 내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예수님이 명하셨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날에 그 공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배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마 16:24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
한때는 본인의 마음속에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세상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만한 댓가가 따른다고...
하지만 자식이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히 12:8
그러나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만일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는 사생자요 아들이 아니니라.
반대로 사생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또 말합니다.
요1 4: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또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또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느니라.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만한 아버지께 성령으로 상속받은 내가권입니까?
아니면 말씀만을 통해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믿는 외가권입니까?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오해의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압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우리는 말씀뿐만 아니라 허락하신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합니다.
만나주시기를 간구해야합니다. 그렇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나타내길 원해야 합니다.
은사나 계시가 그 사람의 구원과 믿음의 확증일 순 없습니다.
불신자보다 악하게 그것을 남을 짓밟거나 실족케하는 무기로 사용해서는 절대로 않됩니다.
그리스도의 은은한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면 만나주시겠다는 약속의 증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야만합니다.
그 옛날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