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384) - 광복 70주년, 새로 산 태극기를 게양하며
8월 15일, 제70주년 광복절 기념일이다. 몇 년 전부터 광복 70년이 될 때쯤에는 남북통일과 동북아평화에 큰 전환점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이날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남북은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동북아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미로에 빠져 있다.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은 100년의 기적을 바라보며 남북과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 대응을 제안하였는데 더 긴 안목으로 지금까지 이루어 온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기념식의 캐치프레이즈)을 다짐하여야 할는지.
아침에 일어나 새로 산 태극기를 게양하고 평소대로 테니스를 치러 나갔다. 테니스 코트는 인근에 있는 중고등학교, 한 게임을 마친 후 휴식시간에 쓰레기통을 비우러 가서 운동장에 널려 있는 쓰레기를 치웠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하는 일, 나이 들어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건강이 고맙다. 백범이 살았다면 독립된 조국에서 청소부를 해도 여한이 없겠다고 염원한 일 아니던가!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경비실에서 태극기를 달자는 안내방송을 한다. 얼마나 달았는지 건너편 아파트를 살펴보니 90세대 중 15가구에서 나부낀다. TV에서도 권유자막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무심한 듯.
태극기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2002 한일 월드컵 직후 북유럽을 여행할 때 대형버스에 태극기를 달았다. 이를 알아본 현지인들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노르웨이의 중학생은 휴식장소로 찾아와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몰린 군중사진이 든 잡지기사를 펴 보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2005년 발칸반도를 여행할 때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선교사가 정부에서 재외동포에게 배포한 태극기를 승용차 옆에 부착하고 10여 개 나라를 순회하였다. 이를 보고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마케도니아 소년들이 환성을 지르는 등 여러 곳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2009년 여름, 영국에 체류할 때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를 버스 편으로 두 번 왕래하였는데 작은 도시 인근 도로변에서 펄럭이는 대형태극기를 발견하고 놀랐다. 나중에 케임브리지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그 도시 거주 교민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모르는 일이라 답하여서 의아하였다. 지금도 나부끼고 있는지.
광주에 고려인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는 어제 고려인동포 자녀들에게 광복 70주년기념 나라사랑 태극기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였다. 이 행사는 늘푸른도서관 자원봉사자들이 고려인마을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헌신의 상징인 태극기를 만들어 줌으로써 한민족의 자랑스런 후손이라는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경축행사가 열리는 동안 시민회관과 광화문 일대, 독도경비대와 순양함선상에 태극기의 물결이 넘치는 화면을 지켜보며 10년 넘게 사용한 태극기를 새것으로 바꾸기 잘 하였다는 생각이다
태극기 만들기에 참여한 고려인마을 어린이들
9시 반부터 KBS방송을 통하여 중계되는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고령의 독립지사는 만세삼창을 선창하며 대한독립만세, 대한민국만세, 남북통일만세를 힘차게 부르자고 말한다. 그의 말을 새기며 아내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 2004년 8월, 광복절에 즈음하여 백범사상실천연합회가 주관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장정순례단에 합류하여 일제식민지배에 항거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살핀 적이 있다. 그때 중경에서 학생들에게 쓴 글을 통하여 광복에 힘을 쏟은 선열들의 행적과 우리의 다짐을 되새겨본다.
'힘주어 부른 대한민국 만세, 통일한국 만만세
8월 12일 오전, 이번 순례단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 중의 하나인 중경으로 출발하였다. 중경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근거지로서 해방 전 광복군의 활동과 임시정부의 보루였던 곳이다. 11시경 중경 시내에 들어와 먼저 찾은 곳은 임시정부 요원들의 숙소가 있었다는 언덕 위의 강철 공장 구내, 중경집강관 유한책임공사(重慶集綱管 有限責任公司)라는 현판이 붙은 공장경내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니 풀이 무성하게 자란 비탈길을 걸어 올라간 숙소 자리는 잡풀만 우거진 폐허가 되어 있다.1943년 이곳에 태어나 1946년 귀국하였다는 독립운동가 이진영 선생의 아들 이규중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뛰놀던 정경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며 감회에 젖었고 일행 모두 길도 없이 잡초 우거진 선열들의 집터 위에서 말을 잊었다.
오후에는 시 외곽 공동묘지에 묻혀있다는 임정 요원과 그 가족들의 묘소를 찾아갔다. 이곳에 묻힌 이들 중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큰아들, 차이석선생 등은 1947년에 이장하여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갔으나 1949년 모택동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교가 단절되어 더 이상 묘지이장이나 참배가 불가능한 채 수 십년이 지난 그곳은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보토작업을 하는지 트랙터가 먼지를 날리면서 공사 중인 현장을 살펴보며 모두들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더러 이름이 알려진 분들도 이곳에 그대로 묻힌 채 그 장소와 유해도 찾을 길 없고 이름 없이 묻힌 이들 모두에게 부족한 후손들은 긴 시간 묵념하는 것으로 구천에 떠돌지도 모를 넋을 위로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이국 땅에 흔적도 없이 묻힌 선열들이여, 용서하소서.'
나는 결혼하는 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무명용사 묘역에 향나무 두 그루를 기념식수하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산화한 호국의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분들이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고 겨레를 보호하였기에 후손들이 번영과 안정을 누리고 행복을 기약하는 결혼식도 올릴 수 있게 된 것을 마냥 즐거워할 수만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8월 13일, 오전 9시에 이번 대장정 순례단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명무명 항일영령 진혼제’가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진열관에서 거행되었다. 이윤구 단장은 기념사에서 ‘오늘 겨레와 나라의 실존 현장에서 잊힌 상해에서 중경에 이르는 장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있습니다.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김구선생과 수많은 애국선열들, 특히 이곳에 육신을 묻고 그 넋이 맴돌고 있는 유명․무명 선열들 앞에 죄인 된 마음으로 자격 없는 후손인 것을 사죄하고 사과드립니다. 1932년에 순국한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비롯하여 강물처럼 흐르는 유명․무명 선열들의 땀과 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제 1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장정 순례단은 이 시간 ‘애국선열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하는 작은 정성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열들의 위대한 뜻을 받들고 전하여 파당과 분열, 갈등의 연속선상에 있는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분단, 남북대립 등 미해결의 국난극복에 심혈을 기울여 7000만이 해야 할 사명, 곧 독립․자주․통일된 조국건설과 세계평화에 우리의 의지와 사명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는 요지의 추모인사를 드렸다.
중경 임시정부청사에서 진혼행사 후 기념촬영
중국 대사관의 석동연 공사는 정부를 대표하여 ‘오늘 각계 대표들이 드린 기원과 다짐을 뜻깊게 바로 새겨 민족의 염원과 사명을 담당하는데 진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복을 깨끗이 차려입은 최충묵 독립운동가 후손의 만세삼창은 외양도 경건하였거니와 내용도 훌륭하였고 헌화하는 순례단 모두의 표정과 태도가 엄숙하고 진지하여서 조촐하지만 뜻깊은 진혼제가 되었다. 순례단본부와 순례단원이 각출한 모금액을 전달받은 임시정부 기념관장(중국인)은 답례인사말에서 ‘이곳은 60년 전 한국 친구들이 있던 집으로 폐허화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중국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한국친구들이 찾아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1992년 3월 19일에 공표한 규정에 따라 중경시 중구 인민정부가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는 중경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중경을 찾는 많은 한국인이 즐겨 찾는 명소로서 상해 임시정부청사의 왜소함에 비하여 훨씬 크고 넓은 공간에 격조 있게 꾸며져 있다. 저녁 식사는 임시정부 기념관 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초청한 만찬이었는데 초청자 대표로 관장은 인사말에서 ‘60년 전 한국 애국지사의 독립 운동을 중국이 지원하면서 한국으로부터 항일 투쟁의 지원을 받기도 하는 등 한․중 양국은 일본에 공동으로 투쟁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를 많이 도운 나의 아버지도 그 때 투사였으며 한국사병도 같은 부대에 있었다. 이와 같이 양국의 친선은 피로 맺어졌다. 그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자’고 말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를 기리는 뜻으로 초청된 유순주 씨는 아버지(유진동)를 따라 중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곳에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자란 차영조 씨와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단상에 올라가 손을 마주잡고 좌중에게 큰절을 하여 만찬장을 따뜻하면서도 숙연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증인이며 주인공이다. 나는 이번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장정 순례단에 참여하여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현장에 서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순례에 아내와 동행하였다. 1997년 시베리아 열차 여행 때도 소련에 살고 있던 동포들의 처절한 삶의 현장을 살펴보았던 역사의 증인으로 참여한 바 있어서 역사적인 두 가지 행사에 동시에 참여한 유일한 가족으로 남을 수 있음을 뜻 깊게 생각한다. 여러분도 스스로 역사의 증인이요, 주인공인 것을 깨닫고 아름답고 소중한 역사를 이루어 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