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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선교의 성경적 기초
1. 선교의 성경적 기초에 대해 논의할 이유
기독선교의 기초는 성경에 근거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 딤후3:15
를 얻을 수 있으며, 기독교 선교의 동기, 방법론, 목적 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 어떠한 선교사역도 그 의미를 인정받을 수 없다.
오늘날 선교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기독교 신학에 대한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는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상이한 문화권을 대상으로 하여 전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그 필요성이 커진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성서에 대한 보수적인 해석에 입각하여 그들이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즉 전통적인 기준을 대신하여 “새로운 신학,” “새로운 복음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인 경향은 기독교 선교의 역동적인 추진력을 변질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고 있다. 즉 인류학과 사회학이 급속하게 신학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수직적인 차원이 상실되고 수평적인 차원만이 남게되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하늘에 계신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심지어 히틀러 같은 사람들까지라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간은 결코 영원히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에 의해 최후의 승리를 거두실 것이며, 이에 의해 모든 인간이 구원받게될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 결과, 모든 인간은 자신의 태도나 이해에 관계없이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의할 경우 오늘날의 선교적 사명은 단순히 비기독교 세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리는 일에 국한된다. 즉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나 그를 영접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따라서 그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인류공동체의 지체라는 것이다.
이에 의해 구원의 개념은 전면적으로 왜곡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며, 구속(救贖;redemption)이 아니라 인간화(人間化;humanization)가 그 목표로 되고 있다. 또한 인간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은 죄악의 형벌과 세력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진정한 인간성을 파괴하고 그를 이웃으로부터 소외시킨 악마적인 세력구조로부터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해방신학 등이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선교사, 목회자, 그밖에 세계 복음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기독교 선교의 성서적인 기초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J.HERBERT KANE. CHRISTIAN MISSION IN BIBLICAL PERSPECTIVE.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이재범 옮김.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1) pp.16-17
2. 구약성경과 선교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는 선교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도 선교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구약에서 선교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선교라는 단어가 기록 되 있지 않다고 선교가 없는 것이 아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유일신론과 보편주의를 창세기의 첫 머리에서 있다고 주장한다.
1)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교사상의 기초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교사상의 기초가 되는 근거를 요하네스 바빙크(Jo-hannes Bavick)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성경은 땅에 거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언급하고 있다.
(2)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통치자이심을 시사한다.
(3)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강력히 금하신다.
(4) 이스라엘의 구별이 만민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5) 이스라엘 종교에 독특한 계약구조가 있다.
(6)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표본적인 역사이다.
(7) 이스라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체험했다.
(8)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도록 열방에게 호소하는 시편의 많은 표현들이 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시 99:1).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47:1).. 장훈태; 초대교회 선교,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6, pp. 216-217.
2)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적 역할
구약성경는 선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선교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태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영적. 물질적 행복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ibid; pp.18-19.
(1) 물리적 우주의 창조주이며 보존자이신 하나님
구약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되는 바, 이 구절 하나 만으로로도 선교의 성서적인 기초가 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우주는 일정한 계획이나 목적 없이 스스로 작용하는 전기의 충격이나 기계적인 힘의 소산이 아니다. 우리가 원자핵의 구조를 조사해 보거나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해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물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손길인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므로 그것을 소유하고 계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닷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시95:4-5). 또한 그는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그것을 통제하고 보존하신다.(사40:28) 그는 자신의 손을 펴서 인간이든 짐승이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신다.(시145:16). 인간은 특히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창1:26, 약3:9)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그 자신이나, 그의 환경이나,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에서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찾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마22:37).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시100:3).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17:28). 그의 인자하심은 생명보다 나으며(시63:3), 그는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시145:9). 또한 그의 선하심은 모든 피조물에 차별 없이 나타난다(마5:45).
우주 전체는 그가 창조주이신 것을 선포한다(시19:1-4). 만물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신성이 나타나 있다(롬1:20).. ibid; pp.20-21.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하나님이 아니고는 세상만물이 하나도 제대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도덕적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재판관이신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을 도덕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두드러진 특성은 거룩함이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렘19:2). 그는 자신의 백성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시며(벧전1:16),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히12:14).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역시 도덕적인 존재이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성, 자유의지, 도덕적인 성품을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엄청난 권한을 주셨고(창1:28), 그를 에덴동산에 두어 다스려 지키게 하셨으며(창2:15),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명하셨다(창1:28). 이렇게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려 나아가셨다.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하여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으며 단 하나님의 금령이 부과되었으나 그는 그 금령을 범함으로써 파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지고(엡4:18), 그의 정서는 약화되었으며(요3:19), 그의 의지는 노예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롬7:19-21). 한마디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사탄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인간을 유혹했던 것이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고, 인간은 도덕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이 물리적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마찬가지로 냉혹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즉 아무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모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서 자유의지에 따라 범죄 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범죄 했을 경우 징벌을 면할 수 없다. 범죄에는 반드시 징벌이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경고했으며,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 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법이 아니며 일개 종족의 법은 더욱 아니다. 이는 우주의 도덕적 체계를 형성하는 우주적인 법으로서 우주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다(롬5:12).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물론 도시나 국가 또는 민족에게도 적용되는 법칙으로서, 이들 역시 하나님에게 속해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이다. 아모리인의 죄가 관영 했을 때 심판이 내렸고(창15:16), 소돔과 고모라의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떨어져 멸망되었으며(창19장), 애굽의 첫 태생들은 파괴하는 천사들의 칼날아래 쓰러졌다(출12장). 다니엘은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5:23)라는 말로 벨사살에게 하늘의 주님을 거스리는 교만을 책망했으며, 이어서 그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에 시대를 세어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단5:26)고 하면서 벨사살의 왕국이 멸망할 것을 선포했다. 또한 요라서 3장에는 니느웨성이 회개하지 아니할 경우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모든 행사에 은혜로운 분이므로(시145:17) 편애가 없으시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편애하지 않으신다.
한편 하나님은 징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며(겔18:23), 심판이 그에게는 “기이한”일이다(사28:21).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입하시기 보다는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는 분이며, 심판을 내리실 때에도 언제나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신다. 따라서 심판은 징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니느웨의 경우를 들 수가 있다. 그 악하고 거대한 도시의 왕과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심판을 거두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며(합3:2), 될 수 있는 대로 피할 길을 예비해 주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롬1:18).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로부터 선교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우리 인간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복음에 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족속들을 어떻게 대하셨던가를 구약성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4) 열국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었으므로 지금도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는 모든 나라의 창조주일 뿐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창조주이므로 장차 자신을 창조주로, 특히 온 세상의 구속 주로 나타낼 것이다.
노아 홍수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이 널리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흩어졌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거짓 신을 섬기고 여호와를 떠났다 하여도 그들은 자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관계없이 여호와께 속한 존재로서 그에게 책임을 져야할 존재였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계에 미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 하시며”(시47:8)
우리는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열방이 자기에 속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며,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 지어다”(사19:25)
더욱 충격적인 표현은 고레스에 대한 언급이다. 이교적인 나라의 왕으로서 고레스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사45:4)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데 있어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레스는 하나님의 “목자”(사44:28),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사45:1)로 불리 우고 있는 것이다.. ibid. pp.26-27.
5) 이스라엘의 아버지이며 구속 주이신 하나님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소명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있어 일대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세상의 구원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너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 이라는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두 번 주어졌다(창28:14).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으나, 하나님의 전반적인 구속계획에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로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구속의 역사는 아담이나 노아나 모세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예수께서도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요4:22).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은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물론 선택에는 특권도 다르기 마련이지만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특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의 목적은 봉사이며, 봉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 선택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실패를 면할 수 없게 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탈출한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애굽만이 관계된 것이었으나. 이는 하나님께서 전 세계적인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 계획한 것이었다. “내가 손을 펴서 온역으로 너와 네 백성에게 쳤다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음이라”(출9:15-16). 바울은 이와 동일한 주제를 로마서 9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ibid. pp.30-31.
6) 포로 이전 이스라엘의 선교적 역할
(1)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회중에 드는 것을 허용하였다.
출애굽 당시 중다한 잡족들이 출애굽 행렬에 동참하였다(출12:38). 솔로몬 시대에도 이방인들의 수가 153,000명에 달하고 있었으며(대하2:17), 이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솔로몬이 고용한 자들이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회중에 가담하여 유월절을 지키고(민9:14), 안식일(출20:10)을 지키고, 제사도 지낼 수 있었다(레17:8). 그러나 그들은 왕이 될 수가 없었다(신17:15).
구약성서에서 이방인들의 영적인 고통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가 가장 분명하게 표현해 주는 내용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 대하여도 저희가 주의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이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컷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대하6:32-33)
(2)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로 불려오다.
예언자들 가운데서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고 주님의 말씀듣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2:2-3; 렘3:17)
(3) 모든 나라들이 주님을 알고 주님께 경배한다.
이스라엘의 선교적 역할에 있어 마지막이자 세 번째 단계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계에 편만한 단계이다. 하박국은 물이 바다 덮음같이 주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될 것을 예언했다(합2:14).
이와 관련하여 “땅 끝”이라는 새로운 표현이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필요가 없게 된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보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시22:27)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사45:22)
7) 포로시대 이스라엘의 선교적 역할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은 이들의 계속적인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출애굽 다음가는 가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느브갓네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으며, 유대인들은 B.C 600년경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70년 간의 포로 생활 후에 42,000명이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길고도 고독했던 포로생활을 통해 유대인들은 우상숭배 적인 경향을 뿌리뽑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결코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바로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의 선교적 역할은 원심적(centrifugal)인 성격으로 완전히 변모하게 되었다. 즉 열방들이 하나님의 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대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은 문자 그대로 세상 끝까지 전하게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생활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은 직접적으로 개종자들을 얻는데 기여했고, 간접적으로는 후에 기독교의 전파에 기여했다.. ibid. pp. 38-39.
(1) 회당제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종교적인 생활에 있어 회당의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소수의 유대인에 국한되었으며, 그것도 절기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회당이 없었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자신들의 종교적인 유산을 보존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 열 명의 남자 지도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유대교 공동체는 회당을 세웠고, 이 회당은 유대인의 생활에 있어 종교적, 사회적 생활의 중심이 되곤 했다. 이들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으며, 예배순서에는 쉐마(신6:4-5)낭송, 기도, 성경낭독, 권면, 축도 등이었다. 그러나 회당이 성전의 대용 물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회당은 일차적으로 교육기관이었으므로 제사장이 아니라 랍비가 그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다. 또한 회당에서는 제사도 드릴 수가 없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여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출입할 수 없었으나(행21:29) 회당에는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 신앙에 과한 교훈을 회당에서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회당은 개종자들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ibid, pp. 39-40.
모든 족속에게까지 선교하라 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회당을 중심으로 열려 있었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통하여 이방인들과 쉽게 교제가 되었고 이방인들도 유대교의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회당은 선교센터였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여러 회당에서 설교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디아스포라의 회당은 선교센터이었으며, 신앙교육기관이었다.
(2) 안식일 준수
안식일 제도는 모세와 아브라함을 거슬러 올라가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신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이것이 십계명에 명시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유대인들은 제 4계명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그들이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할례에 국한되었다(요7:22-23). 유대인이라면 안식일에 전쟁하기보다는 차라리 수천 명씩이라도 살해당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의식을 지키는 일은 외부인들에 대하여 오래도록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대중 앞에서 그것을 두려움 없이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3) 성서의 헬라어 번역
유대인들은 수세기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는 가운데 구약성서가 쓰여진 히브리어를 점점 잊어버리고, 대신 지중해 세계의 혼성국제언어인 헬라어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이 B. C. 3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때 번역된 구약성서를 70인역(LXX)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약 70명의 학 이 일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70인역 구약성서는 곧 강력한 선교도구가 되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이 70인역 구약성서를 읽었던 것이며, 희랍, 로마, 세계 전역에 걸쳐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이 책이 읽혀졌다(행15:21). 만일 회당에서 헬라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고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다면 그토록 많은 헬라인들이 회당에 출입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보여진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 솔로몬의 지혜서, 기타 외경들은 유대교를 철학적인 성향이 짙은 헬라인들이 지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전념했던 필로(Philo of Alexandria) 등의 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4) 유일신교 개념
희랍. 로마세계는 그야말로 다신교의 소굴이었다. 헬라인들은 30,000여에 달하는 신들을 섬겼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정욕 적인 신이었다. 사실 신들을 섬기는 인간들보다는 신들이 더 부도덕했다. 플라톤 시대에는 유일한 지고의 신에 관한 개념이 철학자들 간에 논의되었으나, 일반대중은 우상숭배에 계속 빠져들어 있었다. 올림피아 신들의 부도덕에 넌덜미가 나고 이교적인 철학자들의 사변에 환멸을 느낀 탐구적인 헬라인들은 유대교가 제시하는 도덕적인 유일신교로 돌아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유일신교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인 하나님, 권능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죄를 벌하시고 덕을 상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전파했다. 이처럼 고상한 교리를 가진 종교는 당시로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개종자들을 만드는 데 커다란 자극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5) 도덕생활
당시 이교세계에서 가장 큰 죄악은 부도덕과 우상숭배였다. 그 대도시들은 죄악의 웅덩이 같았다. 이혼이 만연되어 있었고 유아 살해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 그려놓은 이교 적인 사상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도덕적인 부패를 그대로 정확히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건전한 가정생활은 이러한 부패상과는 엄청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되었으므로 가정생활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가장들은 가족에게 율법을 가르쳤고 남자아이들은 13세에 “율법의 아이들”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업을 위한 기술을 가르쳤다. 부도덕에 대하여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간음죄는 죽음으로 다스렸다. 이교사회의 도덕적인 부패를 혐오하고 있던 이교 가정들은 유대교의 고상한 도덕생활에서 따뜻하고 반가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 또한 개종에로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ibid, pp.40-43.
(6) 오실 구세주에 대한 약속
기독교 세계가 찾아오기 수세기 전에 희랍. 로마세계에는 보편적인 구원자에 대한 대망이 있었다. 헬라인들은 위대한 정치가들을 배출하였으나, 철인들의 명상이나 정치가들의 책략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플라톤은 <공화국(The Republic)>에서 철인이 왕이 되고 왕은 철인이 되어야 한다고 제의했으나 이러한 처방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인으로서 좋은 왕이 되는 것이나, 왕으로서 좋은 철인이 된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왕도정치를 주장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철인들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고상한 기준에 따라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철인과 정치가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현재와 미래에 풍성한 삶을 약속하고 실현시켜 줄 그 누구인가를 찾았으나 허사였다. 이러한 공백지대에 유대인들이 수세기 동안 대망 해온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발을 들여놓았다. 이 메시야는 결코 공허하거나 모호한 인물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그의 계획이 히브리 성서에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분이었다. 그는 예언자이자 제사장이자 왕으로 오실 분이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이 패배하는 곳에서도 승리하실 분이었다. 그는 신적인 능력과 지식을 겸비한 분으로서 절대적인 정의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의 왕국-세상이 꿈꿔왔으나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왕국-을 세우실 분이었다.
희랍. 로마 세계는 말씀을 경청했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는 선교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기독교를 위한 길을 예비해주었던 것이다.
8) 구약성경과 선교
구약이 없는. 장훈태; 초대교회 선교(서울 솔로몬,1996) p.216
신약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에 있어서도 선교의 대 사명은 구약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의미에서 선교활동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온 세계 민족 중에서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신다는 사상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구원의 범위의 세계성(Universalism)이 곧 구약 선교의 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지해주는 구약 선교 이념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이사야 49장 6절에 의하면, “......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표현은 단지 선교의 이념적인 표현이지 신약 성경 선교의 개념에서 볼 때 동일한 선교의 명령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구약성경 전체에는 모든 지상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인 선교사상의 기초가 구약 전체에 일관해서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 전호진, 선교학 op. cit, pp.36-37
의 뜻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의 고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J.H. Bavinck, 선교학 개론, 전호진 역(서울:성광문화사, 1980), pp.32-37.
3. 신약성경과 선교
구약성서의 마지막 선지자와 예수의 탄생 때까지의 수세기의 이스라엘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변하지 아니했으며 그의 성별은 계속 타당성을 유지하였다.. 장훈태; op.cit. pp. 217-219.
이스라엘은 열방제국들의 손아귀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처해 있었던 실제적 환경은 성별의 성격을 변화시켰으므로 선교활동을 준비케 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을 이해하려면, 이 현상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J.H. Bavinck;선교학 개론. 전호진 역(서울:성광문화사, 1980), p.45.
신약성경에는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선교의 책이다. 선교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또한 이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명령을 하신 후 승천을 하셨다. 승천 후 제자들이 요엘서의 예언. 요엘서 2:28-32. “그 후에 내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서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대로 성령에 충만하였으며, 이 성령은 선교의 영으로서 제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전호진, op. cit, p.57.
신약의 선교는 교회를 세우셨다고 믿으며 선교의 사상과 명령을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 비평주의는 선교의 대 사명(the great commission)에 관한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의 본래 사상이 아니라고 말하며, 본문(Text)보다는 상황(Context)을 더 중요시하는 현대 급진주의적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은 종교적 의미에서 개인 구원보다 사회구원을 위한 행동을 선교로 간주하여 선교의 선교사상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성경의 명령은 사랑의 대계명과 선교의 대 사명이다. 구원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독생자를 구세주(선교사)로 세상에 보내셨으며, 그의 성령이 선교의 영으로 사람을 회개케 하고 온전한 신자로 양육한다.. 전호진;성경에서 본 선교원리와 전략 (서울:한국복음주의 선교학회 논문집 제1권 복음선교, 1985), p.89.
선교에 대한 복음서의 요약을 첨가해서 본다면, 예수의 교훈에 나타나는 선교 개념 자체는 구원에 대한 메시야적 기대로부터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파생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구약예언은 메시야적 구원을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새롭게 함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이방인이 자발적으로 나아옴과 세계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로 생각하였다. 이 메시야적 구원은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Bavinck, op. cit, p.55
사도행전은 선교적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성령을 부어주시는 기적 중에 초대 기독교 교회 안에 거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는 선교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전호진; op. cit, p.p.57-60.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선교 활동은 종말을 향하고 있다.
주된 요점은 선교 활동이다. 즉 선교는 종말을 지향한다. 이 종말의 절정은 오직 미래의 시대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며, 세계사의 지평선 너머에서 되어질 것이다.. Bavinck, op. cit, p.68을 보라. “Johannes Reingard의 Wandlungen in Missionsdenken der Letztem 50 Jahre”, in Evangelische Missionzeitchrift. 4th year에서 증명되었다.
어쨌든 신약성서에서의 선교는, 선교의 하나님의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28:16-20)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예수께서 이러한 대 사명을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거니와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께서 분명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서 앉으려니와”(마 8:11)라고 하셨는데, 이미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사건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온 것<(요 4: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은 이방인이 자발적으로 예수께 나오리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 전호진; 성경에서 본 선교원리와 전략, op. cit,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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