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원사(奉元寺) 입문 (만월전, 명부전, 미륵전)
▲ 봉원사 서울연꽃문화축제의 중심인 대웅전 뜨락 |
서울 도심에서 북쪽으로 뻗어가는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
산(仁王山)과 마주하고 있는 안산<鞍山, 295.9m> 서남쪽 자락에
서울 장안에 이름난 고찰(古
刹)로 꼽히는 봉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의 총본산으로 신라가 한참 망해가던 889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지금의 연세대<연희궁(延禧宮)터>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명
쾌히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그나마 조선 초기에 정도전(鄭道傳)이 썼
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것으로 여겨져 도선의 창건설은 거의 신빙성
이 없다.
어쨌든 창건 이후 적당한 내력이 없다가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 시절에 보우대사<普
愚大師, 원증국사(圓證國師)>가 크게 중창하면서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 중생들로부
터 크게 찬양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때 보우가 창건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대사(원증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
스로 그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니 그 이름이 봉원사에 기록되어 있다. 허나 이색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숨으며 조선과 담을 쌓았던 삼은(三隱)의 하나인데, 왜 나라를 뒤엎은 이성계
의 명을
받아
보우대사의 비문을 썼는지가 의심스럽다. 아마도 잘못된 기록인 듯 싶다.
1396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3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했고, 태조가 붕어(崩御)한 이
후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해 왕실의 원찰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렸다.
임진왜란 때 절이 소실된 것을 1651년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했으며, 이후 동,서 요사채가 불
타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이 중건했다. 1748년 영조(英祖)가 현재 절 자리를 하사하며 절
을 옮길 것을 명하자 찬즙(贊汁)과 증암(增岩)이 절을 이전했는데, 이에 영조가 친히 '봉원사
' 친필 현판을 내렸다. (그 현판은 6.25때 사라짐)
봉원사가 떠난 자리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映嬪)이씨의 묘
역인 수경원(綏慶園)이 1764년에 닦여졌는데,
이 수경원은 20세기 후반,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전되어 지금은 정자각과 약간의 석물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봉원사를 흔히 '새절'이라 부르는데, 이는 영조 때 터를 옮기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지은
절이란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수경원의 원찰(願刹) 역할까지 자연스럽게 맡게 되면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게 되었다. |
|
|
1788년 전국 승려의 풍기를 단속하고자 8도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가 봉원사에 설치되었으며
, 1856년에는 은봉(銀峯),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잠시
머물며
여러 현판을 써주기도 했다. (대방에 2개의 현판이 남아있음)
고종(高宗) 초기에는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開化派)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동인(
李東仁)이
5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던
김옥균(金玉均)과 박영
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이 찾아와 그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에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세웠으나 곧 불에 탔으며, 1908년 8월에는 한글학회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이 중수했고, 땅을 더 확보하여 경내를
넓혔으며, 1945년에는
해방을 기념하고자 주지 기월(起月)이 광복기념관을 세웠다.
1950년 천하의 비극인 6.25가 터졌다. 초반에는
절이 무탈했으나 한참 서울 수복을 벌이던 그
해 9월 말, 무심한 총탄의 세례로 광복기념관이 소실되고 영조의 현판과 이동인 등 개화파 인
물의 유물이 화마(火魔)의 덧없는 먹이가 되는 큰 비운을 겪는다.
6.25이후 주지 영월(映月)이 1966년 염불당을 중건했는데, 그 목재는 1962년에 공덕동(孔德洞
) 동도공고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 본채를 구입하여 충당했
다. 당시 친일 식민사학 패거리의 두목이던 이병도와 친일패거리들이 대원군의 유적을
부시고
자 봉원사에
판
것이다.
1991년 젊은 주지승인 김성월이 삼천불전을 짓는다고 난리를 피우다가 누전으로 이곳의 유일
한
지정문화재였던 대웅전을 홀랑 태워먹었다. (당시 뉴스에 요란하게 나왔음) 이후 새로 부
임한
주지 혜경이 신도들과 함께 쓰러진 대웅전을 1994년에 복원하고 삼천불전까지 같이 완성
을 보았다.
2009년에는 봉원사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을 시키는 영산재(靈山齋)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
정되었으며, 2011년 전통사찰의 지위를 받았다. |
|
|
넓직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삼천불전과 명부전, 염불당, 극락전, 만월전, 미륵
전,
칠성각, 운수각, 전씨영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
도와 범종, 약사불회도, 산신도, 독성도, 시왕도 및 사자/장군도, 도량장엄용 불화(오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십이지신도), 도량장엄용 불화(칠여래도, 사보살도, 팔금강도), 의소제
각 편액, 용암사(龍巖寺) 감로왕도, 반야암(般若庵) 목조관음보살좌상, 반야암 목조석가여래
좌상, 반야암 석조보살좌상
등 지방문화재 20점 정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모두 2014년 이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용암사와 반야암은 봉원사의 부속 사찰임)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48호인
단청장(丹靑匠) 기능 보유자 만봉이 주석하고 있고, 국가무형문
화재 50호인 영산재(靈山齋)를
지키는 영산재보존회가 이곳에서 후학을 기르고 있다.
그 외에 명부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의 현판,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탱화가 여
럿 전하며, 오래된 보호수 5그루가 경내 외곽에서 사이 좋게 그늘을 드리워 절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속삭인다.
봉원사는 2003년부터 매년 한여름에 연꽃축제를 선보인다. 서울 최초의 연꽃축제로 '서울연꽃
문화축제'를 칭하고 있는데, 봉원사 연꽃축제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이 다른 연꽃
축제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연못이나 논두렁에
연꽃밭을 닦지 않고 커다란 수조(水槽)를 동원해
연꽃을 심어 경내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축제날에는 연꽃의 향연 외에 전통차와 떡 제공, 국수 공양, 산사음악회, 영산재 등이 열리며
연꽃은
축제가 끝난 이후에도 8월 중/하순까지 경내에 선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절로 숲이 무성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선사하며
접근성 또한 착해 언제든지 안길 수 있다.
* 봉원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26 (봉원사길 120 ☎ 02-392-3007~8)
* 봉원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
▲ 붉은 연꽃의 요염한 자태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만월전(滿月殿) |
안산자락길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집 일색의 봉원사 뒷통수가 보인다. 그 뒷통수가 점점 커
지면서 제일 먼저 만월전이 마중을 나오는데, 안산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봉원사 경내를 거쳐
가기
때문에 자연히 산꾼의 왕래도 잦아 늦은 시간에도 길을 열어둔다.
만월전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외진 곳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이곳에는 1894년에 조성된 약사불회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와
1904년에 그려진 독성도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6호), 1905년에 조성된 산신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5호)가 봉안되
어 있는데, 이 건물은 무슨 사연을 숨기고 있는지 늘 굳게 잠겨져 있어 봉원사를 여러 번
왔
음에도 단 1번도 그 속살을 구경한 적이 없다. (산신도와 독성도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
◀ 극락전(極樂殿)과 자애수(慈愛樹)
만월전 앞에는 극락전이 명부전의 뒷통수를 바
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아미타
불(阿彌陀佛)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자
애수'란 어여쁜 이름을 지닌 아름드리 느티나
무가 그늘을 베풀고 있다. 나이는 100~1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왜 자애수라 불리는지는
모르겠다. |
▲ 명부전(冥府殿) |
삼천불전과 극락전 사이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두툼한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시왕) 등 명부(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 삼봉 정도전이 썼다고 전하는 명부전 현판의 위엄
왼쪽 구석 위쪽에 '정도전 필' 4자가 쓰여 있다. |
명부전 현판은 조선 태조
때
삼봉(三峯)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한다. 하지만 내 눈이 안경이
라고 내 침침한 두 눈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다. 비록
현판
구석에 '정도전 필(鄭道
傳 筆)' 4글자가 아주 작게 쓰여있긴 하나 옛 사람들은 이름보다 '호'나 '자'를 우선적으로
썼기 때문에 역시 의구심이 든다.
허나 봉원사가 태조 이성계의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고, 그의 어진까지 봉안했던 절이니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열었던 정도전도 봉원사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온 기념으
로
한
글자 남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현판이 세월을 너무 타자 필사(筆寫)를 해 새 것으
로 교체했는데, 그가 쓴 것을 강조하고자 실수로 이름만 덩그러니 썼을 수도 있다.
또한 원래 봉원사 것이 아닌 태조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 정릉(貞陵)
에 설치된 명부전의 현판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정릉을 서울 외곽으로 추방하면서 명부
전을 때려부셨고, 그 현판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봉원사로 흘러들어와 이곳 명부전의 현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부전은 정도전의 글씨로도 빛이 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꼭 있다고 기둥에 달
린 주련 4개는 친일매국노로 악명이 높은 이완용(李完用)이 쓴 것이다. 조선을 세우고 명나라
(요동)를 정벌하여 보다 큰 나라를 꿈꾸었던 나라의 창업 공신과 그 조선을 말아먹고 왜정에
빌붙은 작자의 흔적이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광복 이후 친일파를 제
대로 단죄하지 못한 휴유증으로 점점 기형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땅의 더러운 현실이 매국
노의 고약한 흔적을 남겨두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봉원사도 생각이 있다면 이완용이 쓴 주련을 싹 뜯어내 장작으로 쓰거나 내버리기 바란다. |
▲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 |
녹색 승려 머리에 금동
피부를 지닌 지장보살상은 지장전의 주인장으로 좌우로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거느리고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왕(十王)과 판관(判
官), 사자(使者), 인왕상, 동자 12위 등이 자리해 명부전 식구들은 총 33기이다.
2019년 7월 말에 지방문화재 지정 신청을 위해 그들을 조사했는데, 지장보살상 몸속에서 조성
발원문 2점과 후령통 2점, 묘법연화경 일부가 나왔고, 도명존자 몸속에서는 명주저고리와 명
주천, 무독귀왕에서는 조성발원문과 후령통, 다라니가 나왔다. 그리고 좌측 판관상에서 후령
통 3점과 1546년에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3
호), 성종 시절에 쓰여진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2호), 묘법법화경(일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 당시 발원문(發願文)은 3개가 나왔는데, 제작시기와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정보를 담
고 있으나 처음 봉안되었던 절 이름은 없다. 또한 대좌(臺座) 상면에 쓰인 조성기를 통해 수
조각승 색난(色難)을 비롯한 18명이 1704년 6월 30일에 완성했음을 고맙게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네모난 지물 밑면에 숨겨진 묵서명(墨書名)을 통해 1858년에 봉
원사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여 비록 그들의 제자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58년을 전후로 봉
원사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을 알려주는 발원문과 글씨를 남겨둔 제작자의 작은 배려 덕에 여
러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봉원사 목조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71호로
지정됨)
그리고 지장보살 뒤에 든든히 걸린 지장시왕도(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9호)는 목재로 딴 패널
형태로 관리 소홀로 화기(畵記) 부분이 사라져 자세한 정보는 알 도리가 없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위왕, 시왕상, 보살상, 공양천녀상, 동자상, 시방불상이 빙 둘러싸
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불화에 많이 쓰인 바림기법으로 옷주름 표현을 하고 있으며, 연화문(蓮花紋)
과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모란화문, 운문(雲紋), 동심원문(同心圓文), 나비문, 칠보문 등
이 장식되어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 황색 등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채도
가 낮고 탁한 색조를 보인다. 특히 상/하단에는 얼룩이 심하며 피부색도 많이 변색되었고 곳
곳에 보채(補彩)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의복 문양, 무독귀왕상과 시왕상이 쓴 관, 손에 들고
있는 지물, 지장보살상의 광배 등은 금니(金泥) 기법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지장시왕도과 비교하여 19세기 후반 불화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 지
장시왕도의 일반적인 도상 형식과 다르게 간략화되어 집중도 있는 화면과 공간 구성이 돋보인
다. |
|
|
▲ 명부전 옆구리에 자리를 닦은 연꽃들 |
▲ 한글학회 창립 기념비 |
봉원사는 우리 글 지킴이인 한글학회 창립 총회가 열렸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1908년 8
월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한글학회
(국어연구학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개화파 선구자였던 이동인이 머물던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
를 열어 봉원사를 근거지로
삼았다.
2008년 8월 한글학회 창립 100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창립 100돌 기념사업회'와
봉원사가 표석
을 세워 그날의 높은 뜻을 기린다. |
▲ 미륵전(彌勒殿)과 7층석탑 |
칠성각 뒷쪽에 자리한 미륵전은 기와집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마치 강당이나 체육관 같은 모
습이다. 그 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하얀 피부의 미륵불(彌勒佛)이 있는데, 건물도 그를 닮아
죄다 하얀색이라 조촐하게 순백(純白)의 세계를 자아낸다. 미륵불 주위에는 기름을
먹고사는
인등(引燈)이 가득 자리해
건물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데, 그 인등으로 인해
인등각이
라 불리기도 한다.
미륵전 앞에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7층석탑이 서 있는데, 그는 왜정(倭政) 이후에 많이 나타
나는 석탑 양식으로 20세기 중~후기에 마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
첫댓글 1. 10월 12일부로 마애불지기에서 풍경물고기로 닉네임을 변경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2. 9월 30일부로 다음카카오에 의해 본인의 다음블로그가 강제 폭파되었습니다. 하여 다음블로그는 나오지 않으며 지금은 사진은 뜨지만 다음블로그 폭파로 인해 1~2년 이후 본글의 사진이 맥박이 뜰 수 있습니다.
풍경물고기님, 개명한 이름 불러봅니다. 닉네임이 예쁘십니다.
블로그는 그 전에 티스토리로 이전하라고 해서 저는 비공개블로그였지만 제 자료들이 많은 곳이라 클릭 한 번으로 다행히 무탈히 이전이 됐습니다.
몰라서 못 옮긴 분들도 많을 거 같은데 그새 폭파는 좀 부당한듯 여겨집니다.
@演菩提(연보리) 티스토리에 강제 통합되면서 전환을 속히 원하는 사람들은 미리 신청을 하고 그 외에는 9월30일에 전환되는 것으로 공지에서 봤습니다. 하여 어차피 강제 전환되는거 마지막 날에 하는 것이 맞다고 여겨 평소대로 다음블로그를 굴렸고, 30일 당일에도 글을 올렸는데, 그날 저녁부터 완전히 사라졌더군요. 10여년을 애지중지 굴렸고 방문자 160만을 지녔던 블로그인데 다음카카오에 개어이없는 작태에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티스토리로 복구를 계속 요구하고 있으나 다음 넘들은 백업이나 받고 꺼지라는 씩으로 무시하고 있네요 ㅠㅠ()
봉원사는 연꽃축제 할 만 하군요.
온 도량에 연향이 그윽했겠어요.
덕분에 봉원사 구경 잘 합니다. 풍경물고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