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고,
과연 그 믿음대로 되었다.
회당장인 야이로의 죽은 딸도 아버지의 간곡한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신다.
믿음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복음).
“탈리타 쿰!”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스승님의 말씀을 ‘소리 나는 그대로’ 적어 놓았던 것입니다.
“탈리타 쿰!” 이 한마디에 죽었던 소녀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듯 위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음성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이 담긴 성경을 자주 접해야 합니다.
말은 곧 힘입니다.
애정이 담긴 말은 죽음까지도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지만 독이 담긴 말은 칼이 되어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했던 일입니다.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음도 ‘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습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면 바꿀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에서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쁜 인간관계도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진지하게 주님의 말씀을 청해야 할는지요?
삶이 힘들고 우울할 때 감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십사고 청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탈리타 쿰!” 하시며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인의 치유 장면에서
두 종류의 접촉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밀쳐 대는’(31절) 모습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27-28절) 모습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밀쳐 댔습니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은 손을 댔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밀쳐 대는’ 접촉으로 일어난 기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손을 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아픈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밀쳐 댔기’ 때문에 예수님과 상응되지 않았습니다.
상응은 ‘손을 댄’ 사람에서만 드러났습니다.
반면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밀쳐 대는’ 것이 아닌 ‘손을 대는’ 것입니다.
밀쳐 대는 것이 호기심과 욕심의 발로라면, 손을 대는 것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밀쳐 대는 것이 자기는 그대로 있으면서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손을 대는 것은 나에게서 그에게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밀쳐 대는 것은 상대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보는 것이지만,
손을 대는 것은 상대를 ‘그것’이 아닌 ‘너’로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손을 대는 것은 마음을 담은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많은 군중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둘러쌌고, 예수님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상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상응하고자 그분께 ‘손을 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