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랫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전격적인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평화협상 재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29일 랫클리프 국장이 세르게이 나리시킨 대외정보국(SVR) 국장과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만나 트럼프 미국-푸틴 러시아-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3자 정상회의 갖고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하면서다.
FSB와 SVR은 옛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으로 각각 국내 정보와 해외 정보 업무를 담당한다.
악시오스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랫클리프 국장의 행보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종전협상 재개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해석했다. 대(對)러 강경 기조의 월스트리트저널(WSJ)과는 다른 각도에서 CIA 국장의 방문을 본 것이다.
랫클리프 미 CIA 국장/사진출처:페이스북
윌리엄 번스 전 CIA 국장이 2021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파트루셰프 당시 국가안보회의 서기(현 해양협회 회장)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사진출처:scrf.gov.ru 러시아안보회의
미 CIA 국장이 러-우크라 간 종전 협상 중재에 직접 관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인 2021년 11월에는 윌리엄 번스 당시 CIA 국장이 전쟁을 막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었다. 번스 전 국장은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나눈 대화의 주제가 모스크바의 전쟁 준비에 관한 정보 공유와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포기 설득 작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크렘린도 당시 번스 전 국장에게 나토(NATO)의 동진 포기(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포기)라는 긴장 해결 조건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랫클리프 국장의 모스크바 방문 목적이 평화협상 재개가 맞다면, 미 CIA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막기 위해, 또 끝내기 위해 직접 나선 모양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도 이틀전(27일) 랫클리프 국장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을 만나 러시아의 군사·경제적 상황이 더 악화하기 전에 종전 합의를 체결하는 것이 낫다고 권고했다고 보도했다. 미-러-우크라 3국 대통령 간 정상회의든, 기존의 3자 협상 재개든 우크라이나전 종식 방안을 러시아 측에 제안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사실 3자 정상회담은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꾸준히 제기했으나 러시아측이 계속 거부했다. 지난 1월, 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미국 관리들이 푸틴-젤렌스키 대통령간의 양자 회담, 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대통령 간의 3자 회담이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악시오스 보도 이튿날(30일),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은 가능하지만, 합의 사항을 공식화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가능하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합의는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수많은 세부 사항을 포함하는 매우 복잡한 조율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모스크바가 협상에 열려 있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강조하며, 키예프(키이우)가 해결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비판했다.
미-러-우크라 제네바 3자 평화협상의 모습/사진출처:페이스북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31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새로운 협상 라운드?' (Новый раунд переговоров?)라는 코너에서 악시오스 보도의 행간을 분석했다. 이 매체는 푸틴-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은 평화 협상의 핵심 조건(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 철군/편집자)에 대한 합의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CIA 국장이 이미 러시아 측에서 거부한 평화안을 직접 모스크바에 가져갈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랫클리프 국장이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고 이를 3국 대통령이 만나 담판을 짓는 방식이라면 논리적"이라고 짚었다.
물론, 그 내용은 겉으로 나타난 건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흐름으로 볼 때 랫클리프 국장이 제안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모스크바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푸틴 대통령의 31일 발언이다. 그는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만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쟁 종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이날 스콧 버센트 미 재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안에 관해 논의할 계획이라고 미 CNBS가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날 미국측 평화협상 대표인 휘트코프 대통령 특사와 쿠슈너와 통화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대화는 상세하고 건설적이었다"며 "우크라이나 방문 날짜를 논의 중인데, 이번 방문은 평화 달성을 위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미-러-우크라 3자 평화협상에서 키예프 측 협상 대표를 이끌었던 부다노프 대통령 실장도 27, 28일 협상 재개 가능성을 알렸다. 그는 9월 초 협상 재개 계획을 언급한 뒤 "협상은 주로 기술적인 측면에서, 또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에 관한 것이 될 것"이라고 28일 밝혔다.
인터뷰에 응하는 부다노프 우크라 대통령실장/영상 캡처
분명한 것은 3자 평화협상이 중단된 뒤 수많은 유사한 성명과 협상 소식이 있었지만, 랫클리프 국장의 모스크바 방문으로 외교적 노력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핵심 쟁점을 둘러싼 러-우크라 양측의 입장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키예프는 현전선에서의 전쟁 중단을, 모스크바는 미-러 정상 간의 소위 '앵커리지 정신(합의)'에 따라 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 철수를 고집하고 있다.
협상의 난관은 러-우크라 간의 이견에만 그치지 않는다. 모스크바, 워싱턴, 유럽에서 소위 '전쟁 강경파'는 신속한 전쟁 종식을 은밀히 방해하고 있다. 이들은 크렘린이 전쟁 종식에 동의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러시아와 푸틴 개인의 패배"라는 프레임을 구축한 상태다.
영국 경제 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의 31일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 잡지는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 전역을 장악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썼다. 또 "러시아 체제가 폭력에는 매우 관대하지만,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며 "푸틴 대통령은 돈바스 전체를 장악하는 최소한의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을 끝내면 자신의 신변에 곧바로 위험이 다가올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잡지는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푸틴 대통령은 전쟁 중 어느 시점에 측근들에게 (중간에 군사작전을 끝내면) '그들이 나를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도 했다.
러시아 진영을 향해 포를 쏘아대는 우크라이나군/사진출처:페북@GeneralStaff.ua 우크라 총참모부
진격하는 러시아 보병/사진출처:러시아 국방부
반면, 전쟁 조기 종식론자들은 현전선에서의 휴전이 러시아의 승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모스크바는 자국 영토를 잃지 않고 이웃 국가(우크라이나)의 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이 키예프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고 비난한 전쟁 첫해(2022년) 3월의 이스탄불 평화협정 초안(서명후 러시아군 철수, 돈바스 독립, 크림반도 외교적 해결 /편집자)을 보나, 전쟁 직전 모스크바를 방문한 번스 전 미 CIA 국장과의 협상 내용(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철회 등)을 보나 현전선에서의 휴전도 러시아 측에게 큰 이득이다.
주목할 것은 번스 전 CIA 국장의 모스크바 방문 이후 진행 상황이다. 러시아는 특수군사작전(2022년 2월 24일) 개시 전 미국과 나토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철회 등을 포함한 새로운 유럽 안보 체제를 제안했다. 워싱턴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준비에 대한 경고를 받은 뒤 미국 측에 우크라이나 공격 계획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러시아의 새 조건들은 그다지 가혹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주요 나토 회원국들은 현재 러시아와의 전쟁 위험을 우려해 더 이상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고집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안에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대신 나토 규약 5조를 원용한 미국의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안이 담겼다.
하지만 2021년 말~2022년 초 미국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요구 조건을 거부했다. 일각에서는 그 이유로 바이든 당시 미 행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사전에 막아야 할 사안이 아니라, 또다른 기회로 여겼기 때문으로 본다. 러시아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유럽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나토를 유럽 중립국(스웨덴, 핀란드)으로 확장하고,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에 '전략적 패배'를 안겨주거나, 전쟁 부담을 지워 러시아를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다. 실제로 서방 외신들은 전쟁 초기 이같은 성과를 크게 기사화했다.
독일 정치학자 한나 노테는 지난 7월 미 뉴욕타임스(NYT)에 '푸틴의 도박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칼럼을 썼다/캡처
스트라나.ua는 푸틴 대통령이 전쟁 종식 결정을 내린다면, 러시아의 많은 사람들은 최악의 상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 그의 지지율이 급등할 것으로 예상했다. 러시아 사회와 집권 엘리트층이 신속한 종식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이 종식되면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동원령에 대한 걱정도, 핵전쟁 공포도, 주유대란도, 공습 사이렌도, 추가 사망자 발생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크림반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포함한 영토를 상당히 확장한 채 러시아는 전쟁을 끝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일부 강경 텔레그램은 "푸틴이 모든 것을 망쳤고, 러시아는 패배하고 항복했다"라고 쓸 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전쟁의 결과가 그만큼 희생할 가치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러시아 제국의 황제(짜르)들은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면 전쟁에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스트라나.ua는 31일 '차르의 길: 전선에서의 전쟁 종식은 푸틴에게 위험한 것일까?' (Путь царя. Опасно ли для Путина завершение войны по линии фронта"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처음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적을 완전히 항복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며 "러시아 역사에서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늘 전쟁 승리로 여겨졌다"고 짚었다.
예로 든 것이 1654년 러시아 제국이 독립하려는 코사크족을 도우려고 참전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의 전쟁이다. 참전 명분도 돈바스 국가(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민공화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넘은 2022년 2월과 유사하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많은 영토를 장악했지만, 폴란드군의 반격으로 점령했던 대부분의 영토에서 후퇴했다. 그나마 키예프 등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을 지켜냈고, 1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안드루소보 휴전 협정으로 끝났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누구도 이를 패배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수 세기 동안 러시아 역사학계는 이 사건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로의 재통일"로 의미를 부여해 왔다.
물론 일부 코사크족은 모스크바가 배신했다며 봉기를 일으켰으나 결국엔 진압됐다. 현 전선에서 푸틴 대통령이 휴전을 명령해도, 반란을 일으킬 만한 '코사크족'은 현재 없다. 돈바스 주민들이 도네츠크주(州)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가 함락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라고 시위를 벌일 가능성은 낮다.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어느 쪽도 전쟁 종식이 다른 모든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피단 튀르키예·터키 외무장관)는 사실이다. 현전선에서의 휴전을 거부하는 모스크바도, 유럽도 그만한 동기를 찾지 못했다.
만약 유럽연합(EU)이 휴전 후 러시아에 대한 모든 제재를 해제하고 2013년 말 수준으로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메시지를 크렘린에 전달한다면, 푸틴 대통령의 종전 동의를 받아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여전히 러시아의 전략적 패배를 겨냥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후 유럽을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판단이 종전의 최대 관건이 된다. 그가 아직 굽히지 않는 것은 '시간이 나의 편이며, 조만간 앵커리지 합의의 틀안에서 휴전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