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 중국 통일
진은 기원 전 231년에 전국 7웅 중에 제일 약한 나라인 소한부터 공격해서 점령했다. 기원전 230년에는 한나라 왕 한안까지 포로로 잡아 한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
기원전 229년에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같은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한다. 다음해인 기원전 228년에는 한단을 점령한다.
기원전 227년 연나라에서 형가를 자객으로 진나라 함양으로 보냈다. 진왕 영정은 연나라의 암살시도에 분노하며 즉시 연나라를 공격한다. 기원전 226년 10월에는 수도 계를 함락하고 연나라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가 저항하지만 기원전 222년 연나라도 멸망한다.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의 수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으나, 서진(西晋) 때의 학자 황보밀이 자신의 저서 《제왕세기》에서 추정한 내용에 따르면 “인구의 3분의 2가 죽거나 다쳤다”고 나온다. 진시황은 진나라 전통으로 군공을 '잘린 목'의 수로 정했다. 유래된 말이 수급(首級)이다.
시황제는 국왕(國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여러 안 중에서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다.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현대 중국어에서 짐(朕)은 옛 중국어에서 황제의 전용 명사가 아닌 1인칭 대명사였으나 단지 천자의 자칭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민가를 뜻하던 '궁(宮)' 역시 황제의 거처인 궁궐의 의미로 한정되었다.
첫댓글 진시황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