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9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FACE BOOK에 올린
[서울대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 추진에 관한 담화]
를 보았습니다.
9월 9일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조선으로 임명 받은
193 주년이 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4년 전,
깊은 감동을 받았던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이야기를 [한국천주교사]
녹취하여 이 사랑방에 올렸던 글이 생각나서
오늘 다시 찾아 올려봅니다.
어느새 순교자 성월 9월이 되었습니다.
코비나 19 핑계로 신앙 생활이 무디어지고 편안함이 유혹으로 스며듭니다.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고...
예전에 김길수 교수님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카세트 테잎으로 들으며
감동이 너무 커서 테잎을 되 감아가며 녹취해서 써두었던 글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CD가 없던 시절이라
그 카셋 테잎은 다시 듣고 싶어도 이젠 구할 수도 없습니다. ㅠㅠ
어느 자매님이 테잎 1셋트 (10개 이상?) 를 주면서
"한 번 들어봐요. 꼭 전설의 고향 듣는 것 같아요. ㅎㅎㅎ"
그때 우리는 한국에서 오는 모든 신앙 테이프는 거의 다 돌려가며 듣던 시절이라
저도 그냥 쉽게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면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길수 교수님의 카리스마에 울다가 웃다가 밤을 꼬빡 새워서 끝까지 들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모두들 그렇게 며칠 밤을 새워가며 들었다는 후문!
특히 형제님들이 더 많이 눈물을 흘렸다고...
그 많은 순교 이야기들 중, 감동스러운 첫번째 편지는
주문모 신부님 마저 순교를 하시고 나니 교우들은 목자가 더더욱 간절하여
정하상님과 유진길님이 사제를 청원하며 교황님께 보낸 피맺힌 청원 편지였습니다.
[녹 취]
정하상님과 유진길님께서 레오12세 교황님께 보내는 이 편지에서는
한국 천주교회를 갓 태어난 어린 아기로 표현합니다
갓난 어린 것이 누워있나이다.
굶은 지 오래 되었나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나이다.
시급히 엄마(목자)가 와야 합니다.
하루라도 늦으면 아이는 죽을 것이고
죽은 다음엔 엄마(목자)가 백 명이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급하다고 해서 우유 한병(혼자) 들고는 오지 마십시오.
- 주문모 신부님이 혼자 계시다 돌아가시니 또 다시 목자가 없음을 체험 하였기에 -
그리고 시급히 온다 해서 혼자 오실 양이면 오지 마십시오.
한번의 우유를 먹고 하루를 더 살고 죽을 양이면,
지금 안 먹은 채로 죽겠습니다.
시급히, 그러나 항구히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이 편지를 받은 교황청에서는 도무지 사제들이 부족하여 보낼 형편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보내지 못할 이유로
ㅇ 조선이 어딘지 모른다.
ㅇ 돈이 없다.
ㅇ 보낼 신부가 모자란다.
이렇게 중간 보고서를 올려 놓고는...
그래도 애끓는 이 편지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불어로 번역한 이 편지를
각 나라에 나가있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주교님들에게 보냈습니다.
이 편지를 태국 샴에 계시는 보좌 주교 바르토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님이 보십니다.
신부님은 감동으로 잠을 못이루시며 교황님께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바르토로메오 브뤼기에르 신부님께서 교황님께 보낸 편지]
첫째, 돈이 없어 못 간다는 이유, 이유중에 가장 비열하고 더러운 이유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돈이 필요 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 났을 것이다.
예수님은 궁하게 태어나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를 본받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가 어떻게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묻노니..
그대들은 진짜로 돈이 없는가? 신앙이 없는가?
둘째. 보낼 신부가 없다?
말은 된다. 그러나 이것도 이유는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실 때 12명의 제자를 거느리셨다.
지금 주님의 사도로 일하는 사제들의 수가 12명은 더 되지 않느냐?
이해를 돕기 위해서 거듭 말한다.
50명이 필요한데 현재 6명 밖에 없다면 44명이 모자란다.
그 6명 중에 1명을 보낸다면 어차피 모자라는데
44명이 모자라나, 45명이 모자라나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조선에는 그 단 1명도 없지 않는가?
셋째. 조선이 어딘지 몰라서 못간다?
대단히 부끄러운 얘기다.
그들은 사제가 없는 곳에서 이미 순교를 하며 그들의 목자가 있는 곳을
그 어두운 곳에서 알아 내어 편지까지 보냈는데,
목자라는 사람들이
양떼들의 편지를 받고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네째. 조선은 이미 박해를 받고 있고,
신부는 귀한데 보내 봐야 갈 수 있을지도 문제이고,
가 봐야 붙잡혀 죽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자!
가야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조선에 사제가 가서 교회가 손해 볼 것 하나도 없다.
사제가 가서 양떼를 만난다면 사목을 해서 좋고,
가다가 못 간다면 교회는 순교자를 얻는데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 밤에 이 글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꿇어 앉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하상과 유진길의 그 피맺힌 한의 응답입니다 - (김교수님 말씀)
내 말이 내 생각에는 절대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 말이 백 번 안 맞아도 좋으니
실제로 조선에 사제가 한 사람 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런 이론을 전개하기 보다는
나의 이론이 맞다고 증거하기 위해서라도
단 한 사람도 갈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가겠습니다.
- 브뤼기에르 신부님은 이 편지를 보내고 3 일만에 마음을 진정하고
장상에 대해서 예의에 몹씨 어긋 났고 불손 했음을 돌아보고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이것이 사제의 겸손입니다 - (김교수님 말씀)
나는 조선의 평신도들의 너무나 절실한 요청에 너무 흥분해서
내가 가야한다는 이유를 보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나의 그 믿음에는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일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고 윗 분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장상들이 결정하는대로 순명하겠습니다.
가든 못가든 나는 모든 것을 장상에게 맡깁니다.
나는 나의 순명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면서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브뤼기에르 신부님은 이렇게 떠나라는 명령을 듣고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일하며
곧 떠날 것처럼 준비하고 있겠다던 약속대로
바로 3일 만에 즉시 떠났습니다.
태국에 계시던 신부님은 페낭에서 싱가포르,
그리고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갔습니다.
배를 타고 조선의 교우와 연락을 닿을 수 있는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중국 내지에 활동하는 선교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도중에 신학교를 중단한 중국 교우 왕요셉이라는 나쁜 사람을 만나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선으로 오는 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하였습니다.
때로는 음식때문에 , 때로는 풍토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섭씨 40도를 넘은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육로로 중국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년 후,
드디어 9월 22일에 만리장성 근처에 있는 서만자 교우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의 교우들과 연락이 되었고
다시 10월 19일 조선교우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머리를 다듬은 신부님은 갑자기 머리를 감싸고 쓰러지면서
"예수, 마리아, 요셉" 을 외치며 의식을 잃고 선종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난 2년 3개월 동안을 조선을 향해 힘들게 찾아 오시다가
도중 북만주 서만자에서 그만 뇌일혈로 쓰러져 선종하셨습니다.
1832년에 조선을 향해 떠난 신부님은 1835년에 43세로 선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한국땅은 밟아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적으로는 순교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교님을 한국교회가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해 시복을 청원하는 것은
죽을 줄 알면서 조선으로 향했던 그분은 삶으로 신앙을 증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