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날
우린 그 어느때보다 슬픈 별아래 살아야 했다
절망의 황혼 우린 허수아비였다 슬픈 앵무새였다
광란의 전쟁앞에 바쳐진 슬픈 제물이었다
정거장마다 목이 메여 미친듯 남의 군가를 부르며
남의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충혈한 눈동자가
그 절망의 황혼을 보고 있었다
산에 올라 소나무 껍질을 벗기는 근로보국대의 하룻날
어린 소년들은 점심을 굶었고 고갯마루를 오르는 목탄차는
일제의 마지막 숨결인양 허덕였지
까까머리에 국민복 을씨년스런 몸빼차림으로
한톨의 배급쌀을 타려고 왼종일 이른바 나라비를 섰고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 갈까봐 시집을 서둘렀지
못견디게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산천은 그렇게 아름다웠는데
우린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는데...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2)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찔레꽃』(작사 김영일, 작곡 김교성)은
일제(日帝) 강점기인
1942년에 발표된 곡입니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김교성(작곡가)'과 「백난아」가 만주 공연을 다녀온 뒤,
만주 독립군들이 고향을 바라보는 심정을 담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음 「백난아」가 이 노래를 발표했을 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과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향수(鄕愁)를 자극하는 가사가
시대적 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꾸준한 인기를 얻어 많이 애창 되었습니다.
"KBS 가요 무대"가 2005년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를 조사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찔레꽃』은 그 조사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 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많이 애창 되었습니다.
「백난아」가 부르는 『찔레꽃』은
그녀의 개성 있는 창법과 애절한 가사가 잘 어우러져
망향(望鄕)의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2007년 「백난아」의 고향인 제주도에는
"찔레꽃 노래비 공원"과 "국민 가수 백난아 노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백난아」(1923~1992)는
1940년 "태평 레코드"와 "조선 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콩쿠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였습니다.
원래 본명은 '오금숙'인데,
1940년 선배 가수 '백년설'에게 「백난아」라는
예명(藝名)을 받고 가수 활동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직전까지 "태평 레코드"에
전속으로 있으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대한민국 전국 순회 공연을 다녔습니다.
본격적인 TV 시대가 열리면서,
그녀는 원로가수로서 KBS 가요 무대에
자주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대표 곡은 "아리랑 낭낭", "찔레꽃",
"낭랑 18세"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