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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40여분 가량을 절약하면서 뛰어왔지만, 정류장에는 한 무더기의 학생들과 젊은 여선생님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기다리다 지친 듯 각자 싸온 짐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말고삐를 잡은 두메와 두레와 하나와 나리를 보자 손가락질을 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저게 말이야?” 남학생이 하명이 말했다. “너무 작은데?”
“손가락질은 하지 말아라.” 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저건 말이 아니고 조랑말이란다.”
하나는 한 달음에 그 선생님의 앞으로 뛰어가서는 말했다. “서울 사립학교의 채수아 선생님 되시죠?”
“아. 너희가 마중을 나온 거구나.” 채수아 선생님이 반가운 어조로 말했다. “농사 일이 바쁜데 누가 올
지 궁금했었거든.”
“늦어서 죄송해요.” 두메가 말했다.
“시골에서는 원래가 약속시간에 조금씩 늦을 수 밖에 없잖니. 게다가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
걸.” 그녀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학생들이 가시 돋은 눈빛으로 선생님을 노려보았다. “그럼. 너
희의 농장까지는 얼마나 걸리니?”
“3시간이면 되요.”
하나가 말을 마치자마자 학생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3시간?” 선생님도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탈 것은 조랑말 두 마리 뿐인데, 3시간을 걸어가라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학생이 따지듯이 말했
다. “우린 이미 여섯 시간동안 덜커덩거리는 짐짝처럼 버스에 실려 왔다고.”
“혜림아.” 선생님이 아이를 타일렀다.
“조랑말은 타지 않을 거야.” 혜림의 말을 잘못 이해한 하나가 말했다. “짐을 실으려고 데려왔는데.”
“그것 참 대단하다.” 혜림이라고 불린 아이가 선생님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조랑말
두 마리가 열세사람의 짐을 떠메고 간다는 말은 처음 듣는걸?”
“다섯이야.” 두레가 말했다.
“다섯이라니?” 몇몇 학생이 물었다.
“짐은 다섯 꾸러미만 실을 거라고.” 두레가 다시 말했다. “형들의 짐을 들어주지 않을 거거든.”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아이들이 펄펄 뛰었다. “3시간을 더 걸어가는 것도 모자라서 짐을 들고 가라
고?”
“왜? 못해?” 하나가 은근히 놀리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희들처럼 일만 죽어라 하는 깡촌 출신인줄 아냐?” 조랑말이 작네 마네 어쩌구 라고 했던 남
자아이가 하나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갑자기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채수아 선생님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범근아 그만해라. 우리 이
렇게 다툴게 아니라, 자기소개라도 하면서 천천히 가자꾸나. 날 저물기 전에는 도착해야 하니까. 설마
다들 산 속에서 노숙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나요. 선생님.” 범근이 빈정거렸다.
결국 대다수의 학생들은 툴툴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혜림이라고 했지? 네 짐은 내가 들게.” 하나가 말했다. “그리고 난 신하나야.”
“이혜림.” 혜림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짐을 건넸다.
두메는 여자 아이들의 짐을 전부 조랑말에게 실었고, 자신은 선생님의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산길을
걸으며 말했다. “난 두메. 그리고 얘는 내 동생 두레야. 이쪽은 히어리(원래이름은 나리야). 하나와는 자
매이고, 하나에게는 남동생이 둘이나 더 있어.”
“그런데 여긴 생각만큼 덥지 않구나.” 선생님이 말했다. “6월인데 아직도 이렇게 선선하다니.”
“솔티말의 봄은 느즈막히 찾아오거든요.” 하나가 싱긋 웃었다.
그러자 혜림이 콧방귀를 뀌며 친구에게 속삭였다. “30분만 걸어 보시라고요. 더위 먹은 개처럼 축 늘
어질 테니.”
그들은 맹렬히 달려드는 곤충들을 손으로 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맨 앞에는 두메가, 맨 뒤에는 하나
가, 두레와 나리는 조랑말들을 이끌며 (개들은 당연히 맨 뒤에서) 따라왔다.
“초이 강.” 맵시 있게 생긴 여자아이가 흑발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성은 부르지마. 이름하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정다정.” 이름과는 달리 다정한 기색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소녀가 말했다. 나리는 이 언니가
조금만 웃어준다면 ‘훨씬 덜 무서워 보일 텐데’라고 생각했다.
다정이와 팔짱을 끼고 있는 비쩍 마른 학생의 이름은 박지희 라고 했고, 몸가짐에서나 얼굴에서 거만
함이 묻어나는 아이였다.
“지희라고?”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허리를 조금만 더 구부리고 턱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게 어때? 그
렇게 얼굴을 치켜들고 다니다간 새똥이 철푸덕!하고 떨어지는 수가 있거든.”
“남 일에 신경 끄셔.” 지희가 톡 쏘아붙였다.
“다들 골이 나 있는 것 같아요.” 두메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당연하지!” 채수아 선생님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아이 하나가 소리쳤다.
“잠깐만. 어─ 네가 내게 이름을 말해줬던가?”
“곽범근.” 그가 말했다. “우린 원래 제주도엘 가기로 했었단 말이야. 이런 시골로 떨어지게 될 줄은 몰
랐다고. 그 망할 제비뽑기 때문에……”
“범근아!” 선생님이 재차 그를 꾸짖었다.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하자고 찬성했던 사람들 중에는 너도 있었잖아.” 다른 남학생이 말했다. “우리
는 단지 운이 없었던 것 뿐이라고(참고로 나는 유시찬).”
“그러면 언니 오빠들은 아무도 솔티말에 오고싶어서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적잖게 실망한 나리가 말
했다.
잠시 어정쩡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고 봐야지.” 아직 여유로운 기색을 보이고 있는 여자아이가 (이름은 양유정이라고 했다.) 침묵
을 깼다. “하지만 다 싫어하진 않아. 적어도 규리는 시골을 좋아하니까.” 유정이가 이렇게 말하자 여기
저기서 “맞아.”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찬은 약간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규리?” 하나가 말했다. “이름이 특이하네. 성이 뭐야?”
“원래 이름은 아이리 이시즈키지만, 한국이름은 규리야. 그냥 규리라고 부르면 되. 규리는 일본 혼혈
이거든.” 유정이가 조금 뒤쳐져서 걸어오는 (여지껏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은) 규리를 앞으로 끌어
내며 말했다. “규리는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나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 농장에는 동물이 무척 많아. 만져도 될 만큼 순하고.”
갑자기 유정이가 깔깔 웃었다. “규리는 동물을 돌보는 게 아니라 그리는 걸 좋아해. 일본에서 꽤 오래
살았거든. 하지만 한국어 실력은 유창하니까 걱정하지마.”
“그림을 그린다고?” 하나와 두메가 동시에 물었다.
“응.” 유정이가 대답했다. “규리의 배낭은 언제나 그림 그릴 종이와 필기도구로 가득하지. 규리가 가
장 그리길 즐기는 것은 풍경화야.”
규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주… 아주 잘 그리진 못해.” 그녀가 더듬었다.
다른 남자아이들의 이름은 윤근영, 김현승, 서정준, 그리고 배오석이라고 했다. 근영과 정준에게는 외
관상 별 특징이 없었지만 오석은 남자아이들 중 키가 가장 컸고, 현승은 가장 작았다. 그는 작은 키를 조
금이라도 커 보이게 하려고 머리카락을 위로 세워놓았는데, 잔가지가 잘 다듬어놓은 머리를 건드릴 때
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하나는 현승을 두고 잔디머리라고 마구 놀렸지만, 머리카락용 젤에 대해서
는 (그는 침을 튀겨가며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머리
를 다듬느라 하마터면 떠나는 버스를 놓칠뻔했다고 한다.)
지희는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하나에게 얼마만큼 왔냐고,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집요하게 물었고,
하나는 그녀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넘칠 때까지 끈질기게 대답해주었다.
“이제 절반정도 왔어. 그래 절반. 앞으로 두 시간은 더 가야 한다는 뜻이야. 두─시간!”
아이들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고갯길을 넘었고, 하나같이 불만과 불평이 섞인 목소리로 잘 닦여있지
않은 길을 탓했다. 두메는 귀를 닫아버린 듯 묵묵히 걸었다.
“거의 다 왔어.”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유정이가 신음했다. “발이 퉁퉁 부었어. 다리도 이렇게 까지 뻣뻣해지다니. 세상에 어린이 마
라톤 대회에서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여기까지 죽지않고 걸어온 게 더 놀라울 뿐이야.”
“적어도 마라톤 코스는 평평하지.” 초이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리고 그건 고작 4km짜리였다고.”
“육상부인 유정이도 힘들 다는데, 우리는 어련하겠냐.” 다정이가 숨을 씨근거리며 말했다. 다정이는
걷기 시작한 직후부터 옆구리가 결려왔기 때문에, 모두를 지체 시키는데 한몫 하였었다.
“우리는 짐을 떠메고 가는걸.” 정준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러면서 속마음으로는 내심 끄떡 않
는 시골아이들의 체력에 놀라고 있었다.)
아이들은 제각각 자기가 제일 힘들 다고 타령을 해댔다. 그러나 널찍하게 닦여진 마을 입구가 나타나
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이유야 어쨌든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던 모양이다.
“두 집밖에 살지 ‘마을’이라는 게 좀 이상하네.” 시찬이가 말했다.
“원래는 더 많았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빼고 전부 도시로 갔거든.” 두메가 대답했다.
“그래. 나도 그 중 하나이지.” 채수아 선생님이 말했다. “이 곳은 아니지만 다른 시골에서 살았었지.”
“시골에 사셨어요?” 아이들 몇몇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물었다.
“어렸을 때라서…… 기억 나는 것은 별로 없어.” 그녀가 쓸쓸하게 말했다. “솔티말에 오니까 예전이 더
그리워지는걸.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전경이었지.”
첫댓글 ★ 무플 방지 운동 -_V and 확인 코멘입니다 ♬ 건필하세요 !
고맙습니다. 리에님! 매번 수고하시네요~
호호호, 오랜만에 뵈요>_<;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정말 기대되는데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해 주시니 힘이 솟네요~^^ 계속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