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응시한 사법고시 2차시험은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1차시험 합격후 첫 번째 2차시험에서 낙방했기 때문에 만일 그해 두번째 도전에서도 또 실패한다면 다음에는 1차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이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이상 고시에 매달릴 만한 처지도 못되었다. 합격자 발표 예정일을 앞두고 이런저런 번민으로 마음만 초조해져 잠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해 2차시험에서 민사소송법 1과목을 제외하고 다른 과목들은 모두 자신있게 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합격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내 절박한 처지와 어려운 환경을 하느님께서 아신다면 설마 이번에도 외면하시지는 않겠지 하는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법학을 전공한 법대출신이 아닌 문과대학 출신이었고 재학중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학부를 7년만에 졸업한 만학도였다. 그래서 나의 대학생활은 남들처럼 낭만과 추억이 아니라 자학(自虐)과 울분속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부모나 친지 등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나는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활은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매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이란 실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7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결과는 또 불합격이었다. 그저 허탈하고 참담할 뿐이었다. 절망과 실의속에서 더이상 아무런 삶에 대한 의욕도, 심지어는 식욕마저도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몇해 전부터 생긴 위장병이 또 다시 재발해 음식을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곧 탈이 나고 자주 속이 쓰리고 아팠다.
나는 모든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태어나서 성장해 온 가정사적인 얘기를 여기서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나는 나를 이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원망하고 증오했다.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반항의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자학 등으로 나는 몸도 마음도 더이상 추스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져 갔다.
내가 문과출신이면서도 재학 때부터 그토록 사법고시에 뜻을 두고 집착했던 것은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기죽고 상처받으면서 자란 나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출세와 명예, 그리고 금력 그것이 당시 나에게 존재한 유일한 화두였던 것이다.
고시 준비중 사 모은 서적들을 박스에 담아 청계천 5가 헌 책방에 내다 팔아 버리고 자질구레한 일상용품 등은 후배 자취방에 넘겨주고 배낭을 꾸려 서울역에 가서 남원행 기차표를 샀다. 지리산 달궁계곡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2년전 여름, 고시원 동료들과 함께 피서여행을 다녀온 곳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서가 아니라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그 장소를 달궁 골짜기로 택한 것이다. 내가 결심한 자살방법은 단식이었다. 음독자살이나 목을 매어 죽는 것은 추한 육신을 남긴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만성위장병 때문에 평소에도 식사를 거르거나 굶는데는 자신이 있었고, 깊은 산속에서 굶어 죽으면 남들에게 발견되지 않아 굶어죽는 것이 나에게 가장 적합한 자살방법으로 생각되었다.
계곡을 오르면서 쓰레기 소각장에 들러 배낭과 수첩, 주민등록증 등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불에 태워버렸다. 만에 하나 시신이 썩기전에 누군가에게 발견된다 하더라도 신원이 확인될만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등산로가 아닌 계곡 깊은 곳으로 발길을 옮겨 전혀 인적이 없는 숲속 바위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누워버렸다.
이제 이대로 가만히 누워있다보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몇 날은 그때까지 살아오며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고 또 스쳐 지나갔다. 나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또 때로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며 그 인연의 기억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며칠이 지나자 몸이 축 쳐지면서 의식이 혼미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눈앞에서 아른거림만 느낄 뿐이었다. 나른한 봄날 오후, 먼 산에 가물가물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듯 그렇게 무엇인가가 뿌옇게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윤곽이 나타나는 것은 낯선 노인의 얼굴이었다. 그 노인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소리쳤다.
“이보게 청년, 내가 보이나? 그래, 이젠 됐어, 이 사람아”
차츰 의식이 들어 그 노인을 쳐다보니 삭발한 스님이었다.
벽봉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수가 칠순 가까이 되는 노스님으로 달궁계곡 서편 깊숙한 곳에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토굴을 짓고 혼자 수행하고 계셨다. 잡목으로 얼기설기 벽을 세워 흙을 발라 만든, 말 그대로 토굴이었다.
근 한 달만에 아랫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자살장소로 택한 바위 뒤편이 바로 스님이 거처하시는 토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오랜 세월을 깊은 산속에서 사셨던 분인지라 소리에 민감해 죽어가면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나의 신음소리를 감지하셨던 모양이었다. 스님은 나를 들쳐업고 자기 토굴방에 데려다 눕힌 후 차갑게 식어가는 내 전신을 주무르고 입을 벌려 물을 먹이는 등 응급처치를 해 내 목숨을 살려 놓은 것이다. 미음과 이상한 나무뿌리 삶은 물을 때마다 사발에 담아와 먹기를 권했다. 벽봉 노스님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나를 자살여행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찾게 만들어 주었다.
스님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않으셨다. 그저 아무 생각 말고 몸만 회복하면 된다 하시면서 자애로운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노스님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나는 스님에게 발견된 지 일주일도 안돼 토굴 주위를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기력 회복과 함께 내가 그때까지 수년동안이나 그토록 고통스럽게 시달려온 위장병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나아버린 것이다.
내가 스님께 이런 상황을 말씀드리자, 스님께서는 “한 번 죽고나서 새 몸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위장병은 무슨 놈의 위장병”하고 껄껄 웃으셨다.
나는 스님께 그때까지 내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살아온 과정과 왜 죽음을 작정하고 결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후 스님께서는 가만히 나의 손을 잡고 나직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자네 마음속의 증오심과 분노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 가를 깨달아야 하네. 부모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면 거기엔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와 사정이 있었을 걸세. 그리고 자네가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반항심은 스스로 만든 것이지 누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니야.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바닥에 내려놓듯이 모든 걸 탁 놓아버리게. 그러면 자학이니 절망이니 그런 말 할 필요도 없네. 그런 연휴에 일체를 자기 안의 주인공에게 맡겨 버리는 게야.”하시면서 인과와 업보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인생사(人生事)는 물론 세상 만물의 이치가 인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기가 행한대로 거두고 지은대로 받는 것일세.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은 모두 바른 지견(知見)을 갖지못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게야. 불교에는 삼독(三毒)심이라는 말이 있네.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 그러니까 무엇을 분수이상으로 탐하는 마음, 분노하고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세 가지를 두고 이르는 말일세. 사람은 이 삼독심을 늘 경계하고 그런 마음이 일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지켜 나가야하는 거야.”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그때까지 종교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때 불교에 대한 내 이해의 수준은 불교가 관념적 성격을 띤 철학 정도의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스님 말씀을 듣고 스님이 권해주신 몇 권의 경전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난 뒤 당시 불교에 대한 나의 이해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또 점점 무상심심(無上甚深)하고 미묘(微妙)한 불법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법구경> 같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불서를 읽으며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진리에 대한 구도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읽으면서 그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얼마나 깊고 오묘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불교를 접하고 난 뒤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는 세계와 인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이 화해와 공존으로, 원망과 미움으로 자학하고 괴로워 했던 인생의 문제는 참회와 용서,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긍정적인 인생관으로 바뀐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가졌던 가정과 부모에 대한 원망, 사회에 대한 반항의식,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자학의 감정 등이 모두 무명(無明)과 어리석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 그토록 치열하게 집착했던 출세나 명예, 재물따위가 또한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입산하여 불제자로 살고 싶다는 뜻을 벽봉 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부처님 재가불자로서 수승(殊勝)한 생을 살다간 유마거사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이 시대의 유마거사가 되게. 반드시 출가해 스님이 되어야만 불제자가 되는 건 아니야.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부처님 법을 따르고 행(行)으로써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보시행을 펼친다면 그 사람이 진실로 참불자일세.”
스님과의 6개월 가까운 토굴생활을 끝으로 나는 하산했다. 얼마 후 공채시험을 거쳐 한 정부투자기관의 직원으로 임용돼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도 하여 가정도 이루었다. 첫 월급을 타던날 내복 한벌과 차(茶) 한통을 스님께 우송해 드렸을 때 좋아하시던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직장과 사회, 그리고 가정에서 갈등과 시련을 겪을 때나 의롭지 못한 유혹이나 번뇌에 빠졌을때 나를 지켜주고 이끌어 준 것은 한량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어떤 이들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이며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또 어떤 이들은 불교는 미신적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까지 매도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불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말이거나 타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의 일방적인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데 불교처럼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명쾌한 논리로 밝히고 이상적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가 또 어디 있을까 반문해 본다. 그리고 불법은 일체의 철학이나 사상 등과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우리가 부처님의 자비와 평등사상을 지금 이 땅에서 실천하기만 한다면,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국가나 종교 및 사회 계층간의 대립과 투쟁 등은 쉽게 해결되고 화합과 상생으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진정한 불국토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정년을 앞당겨 명예퇴직을 한 후 자연을 벗삼아 살고있는 현재의 내게 있어서 남은 생애동안 내가 할 일은 여래께서 밝혀주신 진리를 깨닫기 위한 끊임없는 정진과 이웃과 사회를 위한 이타행이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젊은 날의 좌절과 절망에서 나를 살리시고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벽봉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