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는 구글 이미지 검색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냥 재미로만 보시구 틀린 부분 있으면 알려주세요!!!초 ㅑ!!!!!)
전편에서 인수대비는 며느리가 점점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함.
(이 종이에 적힌 내용은 투서랑 상관이 없습니다.)
윤 숙의가 원자 융을 출산하고 4개월 정도가 흐른 성종8년 3월에 궁궐에는 윤 숙의를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짐.
사후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후궁이었던 숙의 권씨의 처소에 감찰상궁의 집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정체불명의 한글 투서를 전하게 된 것임. 투서의 내용은
"정 귀인과 엄 귀인이 원자와 왕비를 해하여 죽이려고
한다."
는 것이었음. 하나뿐인 원자와 국모를 후궁이 모의하여 해치려고 한다는 투서의 내용에 궁궐은
발칵 뒤집어졌고,
범인이 누구인지 대대적인 탐색이 벌어졌음. 투서에서 윤 숙의와 원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범인으로 지목된
정 귀인과 엄 귀인을 이때 비호하고 나선 것은 바로 인수대비였음. 성종 역시 처음에는
노발대발 하며 정 귀인을 의심했지만,
정 귀인이 그때 임신중이었고 인수대비가 편을 들고 나서는 통에 정 귀인이 출산한 후에 다시
조사에 들어가기로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넘어가게 됨.
그러나 이 사건은 순식간에 분위기가 반전되는데, 한창 조사가 진행중일 무렵 중궁전을 찾은
성종이
윤 숙의가 세수를 하러 간 사이에 방에서 맹독인 비상이 들어있는 주머니와 독을 바른 곶감을
찾아내게 된 것임.
실록에는 윤 숙의가 거하는 중궁전에서 비상이 든 주머니와 함께 사람을 해칠때 쓰는 비술을
적은 책과 함께
투서를 적은 종이와 빛깔이 똑같은 종이가 나왔다고 적혀 있음.
궁중에서 비상 같은 맹독을 갖고 있는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왕이나 다른 왕실 인물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음. 그와 더불어 사람을 해치려는 비방을 적은 책이 발견되었기에
이 투서 사건은 엄 귀인과 정 귀인이
윤 숙의를 모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윤 숙의가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정 귀인을
투기한 나머지
두 후궁을 모함하려고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것으로 판명이 나게 된 것이었음!
사실 이 투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함.
원자를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에 뒤를 받쳐줄 친정세력도 별로 없었던 윤 숙의가 성종의
총애가
자신을 떠나 정 귀인에게 옮겨간 것도 모자라 정 귀인이 임신까지 하게되자 극도로 불안해진
나머지 패닉상태에서
벌인 일이라는 시각도 있고 정말 질투가 심했기 때문에 벌인 일이라는 시각도 있음.
그러나 어쨌든 이 투서 사건으로 윤 숙의의 궁궐 내 입지는 크게 좁아졌고 왕비로서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음.
투서 사건이 자작극으로 판명나자 격노한 정희왕후는 폐비를 얘기했으나, 임사홍과 정창손,
노사신을 비롯한
신하들이 하나 뿐인 원자의 어머니에게 허물이 있다고 하여 당장 내쫓을 수는 없다고 극간을
하는 통에 폐비까지는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음.
그러나 투서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것에 누구보다 부아가 치민 성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윤
숙의를 중전에서 다시 빈으로 강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얘기를 하며 빈으로 강등시키면 붙일이름을 생각해 오라고까지 하였으나, 이 일
역시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
성종8년 3월 30일 실록에는 신하들이 성종에게 중전인 윤 숙의를 빈으로 강등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논하며 노사신이
"원자가 후일 어른이 되어 이 일을 듣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다른 재상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성종에게 마음을 돌리라 간언했다고 적혀있음.
이쯤 되자 성종도 마음이 퍽 누그러졌는지 윤 숙의를 빈으로 강등시키겠다는 말은 거두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기에
윤 숙의의 어머니에게 내렸던 작호를 거둬들이고 윤 숙의에게 비상을 전했다고 밝혀진
삼월이라는 여종을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
일단 일을 마무리 지었음. 윤 숙의 입장에서는 벼랑 끝에서 구사일생을 한 격이었음.
투서 사건이 마무리되고 궁내는 다시 평탄해졌지만 성종과 윤 숙의의 사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웠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음.
윤 숙의는 가까스로 중전의 자리는 지킬 수 있었지만 비상을 숨기고 있었다가 들킨 이후로
남편 성종이 수저를 드는 어선 근처에는 오지도 못하게 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보아 정말
운신의 폭이 많이
좁아진 채 거의 근신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궁중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임.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한때 윤 숙의를 중전에서 빈으로 강등시키겠다고 분노했던 성종은 예전
윤 숙의를
열렬하게 사랑했던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윤 숙의에 대한 사랑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 차차
윤 숙의와
그럭저럭 좋은 사이를 유지하게 되었음. 그랬기 때문인지 투서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2년이
지난 성종 10년에
윤 숙의는 두 번째 왕자를 출산하게 됨.
왕비가 낳은 적통 대군이 탄생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이때 성종에게는 이미 많은 후궁들이
있었고
그 후궁들도 회임을 하여 성종 슬하에는 많은 수의 자녀들이 있었을 때였음. 게다가 윤
숙의가 근신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처지에서 태어난 왕자라 적통왕자의 탄생이었지만 원자 융이 태어났을 때보다
사람들의 관심은 적었던 듯 함.
윤 숙의가 두번째 왕자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인 성종 10년 6월 1일.
이날은 윤 숙의의 생일이었음. 성종은 얼마 전 아이를 낳은 윤 숙의를 위해 나름 신경을
써서 제법 크게
잔치를 열어주고자 하였음. 그러나 아직 며느리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던 인수대비는
근신중인 왕비의 생일잔치에
군왕이 참석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성종을 연회자리에서 불러내버렸고, 그 덕분에 화기애애
해야 했을 잔치는
썰렁하게 파해버림. 원래 중전의 탄일에는 내명부와 문무백관이 하례를 올리는 것이
예법이었음. 그러나 성종 10년 6월1일 실록에는
"중전의 탄일(생일)이었으나 하례를 정지하고 표리(옷감)만
올렸다."
라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음. 잔치가 진행되다가 성종이 소환되면서 중간에 그냥 끝나버렸던 것
같음.
아무리 근신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윤 숙의라고 해도 명색이 중전인데 생일잔치가 중간에
파토난 것은
완전 대 굴욕이었음. 거기다 성종이 그날 밤 중궁전이 아닌 다른 여인의 처소에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윤 숙의는
까마귀한테 칼빵을 놔주려고 작은 떡갈나무를 기어올라가는 작은 하마 만큼이나 빡이
쳤음.
이긴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기에 실록의 기록이 윤 숙의에게 악의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걸
차지하더라도
윤 숙의는 당차고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성격의 여인이었던 것 같음. 윤 숙의는 이날 밤
성종과 여태까지 쌓아뒀던
응어리와 맺힌 것들을 다 터트려버리겠다는 기세로 다퉜으리라 짐작됨.
물론 성종 역시 할 말 참는 성격의 임금은 아니었으니 윤 숙의가 퍼붓는 것을 그냥 참고
듣고 있지만은 않았음.
성종은 할머니가 섭정을 하던 어린시절에 대신들이 세조의 묘호를 자기가 명한대로 지어 올리지
않자 대신들에게
"지금 나 어리다고 무시함?"
이라고 대놓고 따졌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은 남자였음.
다음날인 6월2일 성종실록에 성종이 대신들을 향해
"시첩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이 방에 있는데 중궁이 아무런 연고도 없이
들어왔었다."
하고 털어놓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3일 후인 6월5일 기록에는 윤 숙의가 친정집에
"주상(성종)이 나의 뺨을 때리니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가 여생을 편히 살겠다."
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고 남아있음. 말하자면 윤 숙의는 여자를 좋아하는 성종의
행동에 분통이 터져서
다른 여자의 방에 있는 성종에게 뛰어들기도 하고 성종은 부부싸움을 하다가 윤 숙의의 뺨을
때리기도 했을 만큼,
두 사람은 금슬이 좋을 때는 좋았지만 싸울때는 그 정도로 물불을 안 가리고 미친듯이 싸웠던
것임.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는데 윤 숙의가 들이닥친 것이 생일날 밤인지 언제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윤 숙의와 성종은
생일잔치가 파토난 이날 밤 불과 얼음이 부딪혀서 푸화ㅏㅏㅏ아
ㅏ촤하하아아아하하ㅏㅏ!!!!!!!
하고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세로 성대하게 다퉜으리라 짐작이 됨......그러던 와중에
그만.....
윤 숙의는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버림!
사실 윤 숙의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것은 야사이고 실록에는 손톱자국에 관한
기록이 없음.
아마 이 야사는 그날 밤 두 사람이 그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는 것을 나타내는 반증일
것임.
이날 밤 성종과 윤 숙의는 그동안 서로의 가슴에 쌓여있던 것을 다 폭발시키면서 밑바닥까지
볼 정도로 싸웠고
윤 숙의에 대한 성종의 마지막 미련과 애증도 박살나버림.
성종은 다음날 새벽이 되자마자 승지를 불러들여 윤 숙의를 폐서인으로 만든다는 교지를 내리고
사가로 쫓아냈음.
이번에도 대신들은 원자의 모후를 갑자기 폐하여 서인으로 삼으면 후일 문제가 커질 것이니
단지 중궁의
자리만 빼앗아 별궁에 두시라 간언했으나, 이미 마지막 마음까지 떠나버린 성종은 끄떡도 하지
않았음.
남편과 다툰 것으로 모자라 손톱자국까지 냈다는 소식에 격분한 인수대비 역시
"내가 항상 주상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내 마음이
편안하다."
라고 말하며 성종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음. 윤 숙의가 폐비되어 쫓겨날때 그녀를 유일하게
감싸줬던 궁중 어른은
정희왕후나 인수대비에 비해 거의 아무런 정치적인 힘도 갖고 있지 못했던 예종비, 안순왕후
한 명 뿐이었음.
윤 숙의가 폐비되어 사가로 쫓겨났을 때 원자 융은 이제 겨우 4살이었음.
융이 장성하여 장차 보위에 오르면 윤 숙의는 어쩌면 대비가 되어 다시 궁궐로 돌 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름.
그러나......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