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난 게 아니라니까, 뜬 총무는 못 알아 듣고 ‘산행기 마무리까지 완벽을 다해 고맙단다’.
김해횟집에서 석별의 시간을 가졌다. 아톰 형은 함덕 해수욕장을 떠나 제주시에 가까워질 무렵에야 비로소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아니 형은 “교훈을 깨달았다”고 에둘러 얘기하는 것이었다.
렌트카는 두 대이고, 한 대는 셋이 제주를 떠나기 전 반납해야 하고 다른 한 대는 다시 숙소를 잡은 함덕으로 돌아와야 하니, 맛있는 횟감 안주를 놓고 바보멍충이가 돼야 할 인간이 적어도 둘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장이 정리했다.
다같이 술 마시자, 그러려면 횟집 가서 넷은 자리 잡고 마시고, 둘이 함께 렌트카 반납하러 가서 반납하고 돌아와 술 마시고 제주에 남는 둘은 대리 불러라. 옙,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런데 숨은 1인치가 있었다. 뭘한들 느리고 빈틈을 보이는 아톰과 뜬 총무는 렌트카 반납하고 돌아오는 간단한 일정을 소화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젠장
오후 5시 조금 넘어 김해횟집 들어가 앉으니 제주공항 활주로에 다가가는 여객기를 5분마다 일견하며 여느 집보다 두툼한 횟감과 맛있는 젓갈, 김치를 김에 싸서 목에 우적거리며 술잔을 주워 넘기는데 제기랄, 이 인간들이 도대체 얼굴을 보여야 말이지.
뭐 이렇게 많이 걸린대, 누가 가게에 들어오는 인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눈동자 여덟 개가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그러길 30분 정도 계속하니 술맛 달아났다, 고 하면 과장이 지나친 것일테고, 그쯤 됐다.
그나마 6시 조금 넘어 도착해 40분쯤 폭풍 흡입-뜬 총무는 입이 짧아 많이 들지도 못했다-하고 7시 조금 안돼 셋은 택시 타고 떠나고, 9시 넘어 비행기를 타는 희망과용기 형과 둘은 조금 더 술잔을 입에 대다 대리 기사 불러 공항 내려주고 숙소로 향했다.
오는 내내 기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말인즉슨 이렇다. 15년 전 처음 제주 내려왔을 때보다 여러 모로 사정이 좋지 않다, 원희룡 지사 2기가 되면서 더 나빠졌다, 하나 위안이라면 10개월 일하고, 2개월 정도 벹남 북쪽 오지, 뭍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곳에 가서 지낸다, 뭐하냐고, 암 것두 안한다, 잠도 멋대로 자고, 식사도 멋대로, 그냥 누가 뭐라 하는 이도 없으니 내 맘대로 산다, 왜 좋냐고, 한국 사람 안 만나서 좋다, 두달 정도 머물다 심심해지면 한국이나 동남아 떠돌던 비슷한 아이들 불러 며칠이고 술 빤다,
캄캄한 제주의 밤을 달려 함덕으로 가는 내내 불나방처럼 달려들거나 멀어져가는 자동차 불빛 바라보며 멍해졌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망과 허망의 나락으로 내다꽂는 걸까, 참 착해 보이는데, 결혼했다가 실패한 듯 보였다. 여기 대리 기사들, 다 저랑 비슷해요, 실패하고 희망 따위는 없는,
다소 비싼 듯한 대리 기사 비용으로 2만 8000원을 건네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살폈는데 나랑 비슷했다. 멀거니 키도 크고 심심하게 생긴 게.
명색이 호텔이다.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고 숙박업소를 짓는 듯한 공사 현장, 그 앞에 함덕해수욕장 백사장이 펼쳐진다.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 사다 조금 들이키고 잤다. 피곤이 몰려온다.
마지막날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아톰 형은 조금 둔할 듯 싶어 로비로 도피하지 않고 컴을 켰다. 두 시간쯤 두들기니 기척을 한다. 갑시다. 로비 가서 뜨거운 물 보온병에 담고 보니 너무 이른 시간이다. 하릴없이 시간 죽이다 6시 조금 넘어 호텔 나와 걸었다. 놀라운 것이 델문도였다. 밤새 영업을 하는 것 같았다. 백사장에 음악 소리가 창창하다.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두른 카페는 낮보다 밤이 더 화려했다. 아톰 형은 “그냥 저기에서 커피 마시며 밤 새우는 것도 방법이겠다” 했다.
휘적휘적 올라가니 서우봉 정상 아래 일출 명소 벤치에 금세 앉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 둘이 벌써 내려오던 참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역시나 날씨가 별로다. 그 아주머니들 일출 틀렸다는 걸 직감하고 서둘러 내려갔네, 깨달음이 뒤늦게 왔다.
보온병 물로 커피 타 마시며 내가 감춰둔 단팥빵과 고로케빵을 맛나게 나눠 먹었다. 틀렸다. 사진 몇 장 건성으로 찍고 터덜터덜 내려와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오전 7시 45분쯤, 아침 식사 시간 전이다. 난 볼일 해결하고 형은 씻고 정확히 8시 내려왔더니 기척이 없다. 여전히, 냉장고 열어보니 빵이나 햄 등을 꺼내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엄두가 안 났다.
짐 챙겨 어디 가서 해장국이라도 한술 뜨자, 형이 말하길래 짐 챙겨 내려왔더니 제법 현숙한 아주머니가 주방에 들어가 뭔가 준비하는 눈치였다. 그럼 여기서, 빵을 토스터에 넣고 내린 커피 잔에 따르고 버터와 잼을 발라 먹었다. 분명 별 맛이 없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담백하게 먹어서인지, 아니면 빵이 맛있는지 먹을 만했다. 다른 투숙객은 열쇠만 놔두고 사라지고 우리 둘과 웬 중년 아저씨 혼자 이렇게 셋 뿐이었다. 4만 1000원에 하룻밤 묵고 아침 챙겨 먹었으니 이만하면 좋지 않은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또 오시라고 인사하는 여주인을 보고, 조금 안됐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내 비행기가 11시 50분이라 어디 가기도 뭐하다. 그냥 제주시로 곧장 가다 사라봉이란 곳에 가보기로 했다. 내비 보고 달리다 주차장에 들어가니, 웬걸 사람이 제법 많다. 10분쯤 올라가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주항 여객터미널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제주공항에 여객기가 착륙하러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삼양 검은모래 해수욕장 바로 다음이고 예전에 오하마나 호가 마음 급한 한라산 산행객 토해내던 그 부두를 굽어보며 한라산 자락은 물론 제주시, 공항 활주로를 모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발길이 북적인다.
물론 서우봉 오른 이들은 굳이 오를 일 없지만 만약에 비행기 시간이 애매하게 남을 때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3분의 1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란 얘기다.
여튼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보내고 조금 더 공항 쪽으로 달리니 희망과용기 형이 일러준 제주목사 관아 등이 있다. 입장료가 1500원으로 볼것에 견줘 형편없이 비쌌다. 희망과용기 형 말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관아는 담 너머로 일람하고, 관덕정의 활달하게 큰 글씨 편액만 보면 되는 거였는데 실수가 있었다. 입춘 날 밤에 소 형상의 틀에 불을 놓고 떠들썩하게 논다니 나중에 참고들 하셨으면 좋겠다.
이러구러 시간이 다 돼 형 보고 공항 데려가달라고 해 들어갔는데 넉넉한 줄 알았던 시간이 이른 점심 먹고 하니 빠듯해졌다. 집사람이 부탁한 면세품 찾고 딸에게 줄 감귤 타르트 선물 사고 했더니 탑승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잰걸음 놀렸더니 연발이란다. 아무튼 나의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한 시간여 쯤 뒤 형의 여정도 막을 내리며 우리의 모든 여행이 마무리됐다.
총평. 애초에 7인승 렌트를 하고 다음날 영실에서 택시 타고 오는 두 형의 비용을 공동 부담했더라면 훨씬 여행의 집중도와 만족도를 높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애초에 그렇게 일찍 제주에 도착하는 여행객들이 렌트카를 이용하기 어려운 점을 간파하지 못한 실책이었다. 아예 9시쯤 렌트카 찾아 어리목으로 올라오게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아톰 형도 많이 반성하고 깨달았을 것으로 믿는다.
사흘째 아침에 감히 희망과용기 형에게 짜증을 부린 점 사과드린다. 결산 술자리에서 해야지, 했는데 또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 정중히 사과드린다. 아톰 형도 느긋하기 망정이지, 아마 내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를지 모를 일이다. 용렬한 성정을 이기지 못해 그랬거니 여기시고 혜량해 주셨으면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희망과용기 형의 시산제 고유문은 즉석에서 떠올린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나 문장 구성으로나 완벽했다. 애초에 바람 소리 너무 거세 녹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안타깝다. 그 말들은 한라부터 지리를 걸쳐 설악까지 산행하는 우리 주위를 늘 감쌀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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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3월 정기산행은 16일 컴불형 아드님 결혼식 때문에 17일로 하루 미룬다. 마음 속으로는 서울 관악산으로 정해졌고 일부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미세먼지 예보 등을 종합해 15일쯤 집결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도록 하겠다. 만에 하나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예보되면 다른 대체 프로그램을 찾을 것이고, 낮술을 마시자는 과감한 제안도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 드린다.
첫댓글 기획부터 산행기까지 애 많이 썼네. 깊이 감사하네.
제주목 관아 입장료 1500원 너무 아까워하지 말게나. 우리 인생에서 1천500원 넘는 돈을 아무 의미 없이 허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안 들어가봤으면 두고두고 궁금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1천500원은 호기심 해소 비용이라고 생각하게나. 그동안 술집에서 먹다 남기고 온 안주나 술 값만 해도 1천500만 원은 넘을 걸세.
말 나온 김에 사찰 문화재관람료를 비롯해 입장료가 가성비, 혹은 가심비와 불일치하는 곳이 많은 듯합니다. 사설 박물관이나 사유지는 그렇다 쳐도-조계종은 전통사찰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하지만 저는 국민, 혹은 인류 전체의 공공재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7개 산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고요-국공립은 입장료를 낮추거나 없애야 합니다. 특히 제주도에 가심비 불일치 지역이 많습니다. 산굼부리나 성산일출봉도 그렇고, 제주목관아나 삼성혈도 대표적이죠. 반대로 제주국립박물관이나 4.3평화공원 전시관은 입장료를 안 받으니 더 비싸다는 느낌을 줍니다. 제주 언론들이 공론화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미쳤나 보네요. 남경필이라고 썼으니. 어리목 쪽에도 절이 있나요. 암튼 이따 바로잡겠습니다
미처 못읽었던 거네. 수고했다. 다시 읽으니 여행 기분이 다시 올라오네~~ 담엔 렌트카 첨부터 두 대 빌리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