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산 트래킹
►트래킹 일자 : 2024. 02. 28. (수)
►트래킹 코스 :
꿩고개 공원→ 작은고개→치현산→
큰고개→개화산 정상→방화근린공원→
근린공원 산책로→꿩고개 공원
▷트래킹 시간 : 2시간 10분
►날씨 : 구름끼었으나 맑은 날씨
►참가자 : 단독
▶트래킹 스케치 :
아침부터 구름 낀 날씨지만
조망이 좋은 것으로 보아
맑은 날씨다. 한평생 운동과
산행 등 動적인 활동 탓일까???
세월이 흐를수록 좀 게으르다~~
싶으면 당장 몸에서 이상현상이
나타난다.
몸이 좀 피곤 하더라도 그랴~~~
알았다 이늠아~~~
벌써? 살기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나??
왠지 조금은 서글프다~~~~
그랴~~~
운동하자~~~
기왕이면 걷기를 하든
트레킹을 하든... 여행을 하든
계절적 자연현상과 발 닿는
지역의 역사 문화 전통 독특한
통속적 특징 등과 함께하면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날 점심 식사 후
평소처럼 개화산에 오른다
사각사각~~~~
산길에 두텁게 깔려있는 낙엽~~
꼭 양탄자 위를 걷는 것 처럼
느낌이 부드러우면서도 폭신한
감촉이 새삼스레 시몬의 목소리
까지는 기대하진 않지만
살금살금 봄이 오는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능선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왠지 따스한 봄 처녀가 살포시
안기는 듯 하여 두터운 겉옷을
벗게 한다
잉????
따스한 봄 바람은 분명한데???
나뭇가지에도.. 봄꽃 줄기에도..
아직은 새싹이 돋아나지 않다니??
니들 머하니???
귀 기울여 보니 봉오리 안에서
우다다다다~~~
겨우내 지켜준 두터운 갑옷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방화대교 건너
행주산성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
행주치마 아낙들의 구국의 투혼
나라사랑의 영혼들이 강바람에 실려
영롱하게 춤을 추는 것 같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
언덕아래 한강을 바라보며 길게
뻗은 참호 개화산 전투에서 산화한
1,100명 용감한 무명용사 호국영령
께서 이 나라를 영원히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깊이
감사를 드린다~~~
당신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화산 양지바른 곳 개화산
호국공원 개화산지구전투위령비..
나라위해 목숨 바친 구국의 충정
호국영령 명단에 내 고향 정읍사람
19전사도 여기에 잠들고
계시구나~~
감사한 마음에 잠시 묵념......
카메라를 소지하지 않았기에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선명 하지는 않지만
오늘 트래킹 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준 행주치마 영혼과 호국
영령들의 충정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는 것 같아 나름 행복하고
보람있는 트래킹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Build strength if you
want peace!!
(평화를 원하거든 힘을 길러라!!)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2024. 02. 28. (수) 저녁
최폴리..........
▼개화산 호국공원
개화산 호국공원은 6.25 남침 초기
개성에서 김포. 개화산 지역까지
후퇴하면서 수차례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사수하다
산화하신 육군 제1보병사단의
전사자 1,100여명과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부대 무명 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충혼위령비를 건립하여
조성하였으며, 2017년 12월
호국정신을 널리 선양하고자
명각비를 비롯하여 추모의 벽,
기념조형물을 제작하여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추모의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2017. 12.
[개화산전투전사자 추모사업회.
서울지방보훈청.
육군 제1보병사단 전진부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산지구전투위령비
한국전쟁 때 인민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전사한 무명용사
1,100명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호국충혼위령비이다.
서울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자락은
1950년 6월 26일~30일,
김포비행장 사수를 위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전투 결과
육군 전진부대 11·12·15연대의
대장, 준장 등 37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무명용사 전원이 사망하였다.
위령비는 1994년 3월에 건립됐으며,
개화공원 미타사(彌陀寺)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미타사는 해마다 6월이면
호국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김포반도 전투
1950년, 6.25 전쟁 개전 직후
개성을 점령한 조선인민군
제6사단은 곧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로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남하했는데 그들은 한강
하구의 김포를 장악해 국군의
한강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영등포.인천.수원까지 곧바로
나아가려고 했다.
당시 김포에는 개성에 있다
한강을 건너 퇴각한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일부 병력과 김포
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정보학교와
보병학교 병력만이 있었으며
육군본부는
기갑연대 제1장갑수색대대의 병력을
김포로 증파하는 한편 6월 26일,
김포의 부대들을 통합하여 3개 대대
규모 병력으로 김포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사령관은 남산학교장이었던
보병대령 계인주였다. 그 휘하에는
남산학교 기간병력과 제12연대
2대대, 제8연대 3대대가 있었고
또 조선인민군 육군이었으나 탈북한
인물들로 구성된 호국대대가 있었다.
제1장갑수색대대 제1중대와
제3도보수색대대가 속한
독립기갑연대는 기갑대령 유흥수가
연대장으로 이끌었고 부천의
제1공병단과 대구의 제22연대
2대대가 투입되었다.
북한은
26일부터 김포반도 북단 월곶면과
하성면 지역으로 한강을 건너
진출하려 했고 국군은 문수산 등
하안 고지에 참호와 진지를 만들어
이를 막으려 했다.
그날 새벽, 조선인민군 일부 부대가
강을 건너 김포반도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오후가 되어서는
강녕포 등을 통해 본격적인 도하가
이루어졌다.
국군은 포격으로 저항했지만
전력의 열세로 인해 27일 오전까지
조선인민군 제6사단 대부분이 도하에
성공하고 국군은 통진으로 물러나
운유산과 천마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김포읍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에게 패배해 김포읍과
양곡 방면으로 퇴각했고 김포지구
전투사령관 계인주는 부하들을
버리고 탈영했다.
계인주는 28일, 야간열차를 타고
가족과 함께 대구로 도주했고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 최복수
중령이 지휘를 하게 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증파가 이루어지지만 28일, 북한의
전차중대가 도하에 성공해 방어선을
뚫고 김포읍과 김포비행장을
점령했으며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변변한 저항 없이
김포비행장을 포기해 버린 최복수를
해임하고 3사단 참모장인 중령
우병옥에게 지휘하게 했다.
국군은 장릉산, 계양산, 개화산에
진지를 쌓고 저항하며 29일에는
김홍일의 명에 따라 김포비행장
탈환을 시도하지만 패했다.
이때 자진해 나선 최복수와
기갑연대 3대대장 강문헌 대위,
돌격을 이끈 김일록 중위가
순국했으며 우병옥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로인해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통합지휘능력을 잃었고 김홍일은
29일 아침, 김포나루로 도하해
철수한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지휘권을 넘겼으며 잔여 병력은
30일에도 김포비행장을 탈환하려
나서지만 또 다시 실패했다.
그날 김홍일은 오류동.소사 방향에서
위협을 느끼고 제5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해 철수 중인 5사단 병력을
수습하고 경인가도를 고수하게 했다.
최영희는 7월 1일, 미국 공군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했으며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박격포와 장갑차를 동원해 전날 잃은
138고지와 107고지를 공격해
탈환했다.
다음 날에 126고지에 대한 공격이
실시되었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경인가도를
고수할 이유가 없게 되자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는 7월 3일 오전 10시까지
북한을 막는 임무를 완수하고
영등포에서 퇴로가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철수했다.
철수한 국군 장병들은 수원과
안양으로 향했고 부대가 재편되어
안양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저항 덕분에
병력과 장비가 모두 열악함에도
제6사단의 진격을 상당히 지연시켰고
신속히 인천과 수원으로 진출해
국군의 배후를 노리려던 북한의 계
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 서부전선을 지키던 국군이
안전하게 한강을 건너 철수해 한강
방어전을 벌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 계인주의 도주와 사령관 대리
우병옥의 자결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장병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여
유기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했기에
당시 국군의 애국심을 알 수 있는
전투였다.
[출처] [역사] 1950년 김포반도 전투
카페 게시글
국내여행(등산)사진
개화산 트래킹(2024.02.28)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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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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