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 이난영
출생 : 1916년 6월 6일
삶 : 1916년~1965년
출신지 : 목포
직업 : 국내가수
가족사항 : 1남 2녀 중 막내
경력 : KPK악극단 창단
목포는 항구다 발표
수상 : 1986년 목포시 교육문화부분 시민의 상
-이난영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수로서 대성공을 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유명세에 비해서 삶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인간 이난영의 모습을 중심으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가요사에 남긴 이난영의 업적과 예술세계에 대한 내용은 이 글에서는 가능한 생략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1.목포와 이난영 관련성
목포를 ‘예향’으로 내세우면서, 목포를 빛낸 예술인으로 흔히 서양화가 김환기, 한국화가 허건, 극장가 차범석, 소설가 박화성을 이야기한다. 모두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으로 등재되어있는데, 타지역보다 많은 예술원 회원을 를 배출했다는 점을 목포시민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목포를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지금까지 목포를 대중들의 기억할 수 있게 만든 공로자는 유행가를 부른 대중가수 ‘이난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목포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먼저 이난영의 주요 약력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수 이난영 주요연보
1916년 6월 6일 목포 양동72번지 출생.
1923년 현 북교초등학교 입학,
1929년 4학년 때 가정형편으로 중퇴.
1933년 9월 태양극단 시절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꿈>녹음.
1933년 10월 오케이레코드사 <향수(鄕愁)>, 11월 <불사조>취입 가수 데뷔.
1934년 2월 <봄맞이>로 인기를 얻기 시작 가수.
1934년 일본 동경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 한국인 대표 출연.
1935년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
1936년 7월 오까 랑꼬(岡蘭子)라는 예명으로 일본가요계 진출.
1937년 11월 김해송(金海松)과 결혼.
1937년 12월 <해조곡> 대히트 기록.
1939년 1월 문일석 작사, 이봉룡작곡, <목포의 추억> 발표.
1939년 남편 김해송의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꿈>으로 전성기를 맞음.
1942년 오빠 이봉룡 작곡 <목포는 항구다> 대히트.
1946년 12월 남편 김해송과 뮤지컬 전문쇼단 KPK악극단 창단 활동.
1958년 “목포의 눈물” 같은 제목의 영화제작, 하한수 감독, 전옥 주연, 십만관중.
1959년 “김시스터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시작.
1962년 자녀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년 정도 생활하다 귀국.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장례식.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
1986년 10월 1일 사후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 수상.
2003년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 조성.
1)목포를 노래하다.
이난영은 목포에서 태어났고, 목포에 관한 노래를 불러 유명해 졌다. 자신만 유명해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인 ‘목포’를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목포의 눈물” 가사는 ‘문일석(文一石)’이라는 목포출신의 문인이 지은 것이다.1934년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향토찬가” 공모에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이 가사에 손목인의 작곡이 더해져서 “목포의 눈물”이 탄생하였다. 목포와 관련된 노래를 목포의 작사가가 노랫말을 짓고, 목포출신 가수가 노래를 불러서 더 큰 인기를 얻은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한국 대중가요사상 최고의 히트곡으로 등장했고, 7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변함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대해서는 이전 연구사례(목포의 대중가요에서 나타난 생명력과 예술성, 1998년 목포예총 심포지엄)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으므로 본 고에서는 생략한다.
이난영이 목포를 노래한 또 다른 대표곡으로는 1942년에 발표한 “목포는 항구다”를 들 수 있다. 친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더 의미가 있다. ‘목포’라는 지명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지만 최전성기 때 히트곡인 ‘해조곡(1937년 발표)’ 역시 목포와 관련된 곡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외에도 목포를 염두에 두고 “항구, 바다” 등을 소재로 숱한 많은 곡을 발표하였다.
이외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39년에 발표된 “목포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포의 추억(1939년 1월 오케레코드)
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편곡
이난영 노래
고하도 등대불이 깜빡이는 선창에서
목놓아 몸부림쳐 자즈러질 때
륜선(輪船)은 칼섬으로 돌아 나갔소
이것이 악착한 사랑의 판결이라 아-
그대로 순종하고 내 고향 땅을 버렸소
어차피 가서본들 별수 없는 고장이나
눈물의 타국에서 내 울 때마다
갑바우 뜨는 달이 뒤께 지면은
굴 캐는 아가씨 노래에 잠이 드는
남쪽의 저 하늘가 고향 목포에 가고파
“목포의 눈물” 외에는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다고 알려졌던 ‘문일석’의 가사로 되어 있는 점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작곡자 또한 오빠인 ‘이봉룡’이다. 이 곡이야말로 목포사람이 작사, 작곡, 노래를 함께 한 진짜 목포의 노래인 것이다. 가사 중에는 우리 귀에 친숙한 ‘고하도’, ‘갓바위’ 등의 지명이 등장하며, 마지막 소절 “남쪽의 저 하늘가 고향 목포에 가고파”라는 이난영의 애잔한 목소리가 더욱 구슬프게 들려온다.
2)이별의 눈물도 없이 세상을 떠나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난영은 1965년 4월 11일 새벽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5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에는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도 없이 홀로 누운 침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망 당시 음료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이난영의 시신 주변에는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 후 이난영이 자살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술을 마신 것이 쇼크사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만큼 이난영 최후의 모습은 매우 불행했다.
장례는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 있는 자녀들은 장례식장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번 한국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비자 발급이 어려운 여건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이난영의 묘소를 방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어머니를 대하는 후손들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김시스터스’는 이난영 사후 5년이 지난 1970년에 귀국 공연을 한 후 비로소 묘소를 찾아갔다.
3)경기도 파주에 묻히다.
현재 이난영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07에 자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묘는 ‘무연고’로 관리자가 없는 것으로 그쪽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 등록되어 있다. 최근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후손들이 어느 관리인에게 약간의 품삯을 주고 묘소관리를 부탁했었는데, 관리인이 사망해서 연락이 되지 않아 지금처럼 방치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난영의 묘를 목포로 옮겨오자는 논의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아직도 원활하게 추진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4)노래비가 세워지고, 소공원이 만들어다.
1969년 유달산 중턱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졌다. 대중가요 노래비로는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목포시민(박오주)의 기금을 토대로 국민의 아픔을 노래한 “목포의 눈물”과 가수 이난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정면 상단부에 “목포의 눈물”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고, 하단부에는 “살아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심습니다. 이난영의 노래가 문일석 가사 손목인 작곡으로 여기 청호의 넋처럼 빛나고 있습니다.”라는 추모의 글귀가 적어져 있다. 그런데 당초에는 이 비문에 “손목인 작곡”이라는 글이 빠져 있었다. 1987년 5월에 목포를 방문한 작곡가 길옥윤이 이를 확인하고, 한국창작분과 위원회에 이 문제를 건의하자 신문지상에 보도되면서 작곡가 이름을 누락시킨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포시에서는 이 아래비문을 떼어내고 똑같은 글씨체로 “손목인작곡”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고 다시 만들어 붙여 놓았다.8)
그러한 한차례의 해프닝이 있었던 이 노래비가 30여 년이 흐른 뒤에 다시 노래비에 적힌 가사를 두고 원본과 다르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노래비 가사의 수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 작사를 한 문일석이 1934년 조선일보향토노래가사 공모에 제출했던 원래 가사, 둘째 일제의 검열을 피해 부분적으로 가사가 수정되어 음반으로 처음발표 되었던 당시의 노래가사, 그리고 세째는 발표된 후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국문표기상의 변화를 거쳐 현재 대중들에 현재 대중들에게 공식적으로 불려 지는 내용의 가사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달산에 세워져 있는 노래비 가사가 이러한 세가지 기준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표기법상의 차이가 생기는 부분을 제외하고도 의미적으로 다른 부분이 나타난다. 그래서 결국 목포시는 또다시 노래비의 전면에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다시 부착시켰다. 시민의 손으로 건립된 노래비의 원형이 손상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 것이다. 가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별도의 안내문을 인근에 세워놓으면 될 일이었는데, 원래 모습이 너무 어수선하게 변한 듯 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노래비가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지 28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난 2003년 목포시 양동 이난영의 생가터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초 생가를 복원하여 공원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좁은 장소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이난영의 흉상을 세운 소공원으로 변경 조성되었다. 작지만 생가터에 이난영의 공원이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임에도, 목포시에서는 이를 외부에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포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는 안내원들 조차도 이난영 소공원이 목포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난영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노래를 통해 온 국민을 위로하고, 목포라는 도시를 전국민에게 알리는 공을 세웠다. 요즘 각 지자체에서 역사적 인물들을 활용하여 자기 고장 알리기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알고 기억한다는 것은 지자체 발전에 굉장히 유리한 조건이다. 목포의 경우, 어떤 인물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난영’만 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현재 북한 동포들도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알고 있을 정도니까, 과거의 흘러간 인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존재하는 이난영의 문화적 상징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시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고, 글의 전거도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점 양해를 바란다. 추후 재정리를 통해 지면으로 발표할 기회가 갖도록 노력하겠다. 끝으로 이난영이 가수로 데뷔한 6년째인 1939년 어느 잡지사에서 했던 인터뷰의 첫머리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나의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던지 그렇지마는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겨하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하늘을 우르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나의 노래를 실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항구, 저항구에서 또다른 항구, 이렇게 전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
|
첫댓글 오~~~ 그 세로로 일자 옛날 글쓰는 방식의 글자 모양이.. 이렇게 변했네?ㅋ 너 재주 좋다!
큭큭 다시 복사해서 2005에서좋게해서 다시 붙여넣었더니 이렇게 잘 될더라,,,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