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만물을 살리며 살아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경봉(鏡峰) 큰스님은 근세에 경남 양산의 통도사가 배출한 위대한 선사(禪師) 가운데 한분이었다. 스님은 1892년 4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어머니 안동 권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16세의 나이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하고 양산 통도사 성해 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다. 이후 경학(經學)이나 사찰소임에는 뜻이 없고 오직 참선수행에만 마음을 두었다. 그러나 사찰에서는 그에게 종무소 사무를 계속 맡기는지라 스님은 통도사를 탈출, 비장한 각오로 참선 수행을 시작했다. 1927년 ‘이 뭣꼬’ 화두를 들고 참구하다 마침내 개오하여 ‘대자유’를 얻었다. 그 후 경봉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중생교화와 중창불사에 헌신하셨고 통도사 산내 암자인 극락선원에 조실로 머무시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제접하셨다. 1982년 7월 17일,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드셨다. “나 죽은 뒤 내 모습이 보고 싶다면…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이 유명한 마지막 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남긴 채 세상과 인연을 접은 것이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법문 해방전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민도(民度)는 부끄러울 만큼 낮은 수준이었다. 특히 1960년대까지는 전체 국민의 반 이상이 문맹자로 여겨질 정도로 문화 교육수준이 밑바닥을 맴돌고 있었고 겨우겨우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는 백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 그렇지 않아도 한문으로만 되어있던 불경, 한문으로만 독송하는 의식, 어려운 한문용어로만 전해지던 스님들의 설법 때문에 불교는 그야말로 불교가 아닌 채 ‘불공이나 올리고’, ‘소원성취나 비는’ 기복종교에 머물고 있었다. 이 당시 절에 가보아야 보통 백성들은 스님의 설법이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머나먼 말씀’일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당시, 경봉 스님은 누구나 재미있고 쉽게 부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설법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던 불교신자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제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닌기라.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생각을 가리켜서 육근(六根)이라고 하는긴데, 알고 보면 이 여섯 가지가 사람을 망치는 도둑놈들인기라. 그래서 부처님이 이 여섯 가지 도둑놈들을 제대로 잘 단속하라고 이르신게야. 눈도 도둑이요, 귀도 도둑이요, 코도 도둑이다. 이 도둑놈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면 그 사람은 신세를 망치게 되는기라. 그러니 여러분들은 지가 갖고 있는 몸속의 여섯 도둑놈들을 잘 다스려야 하는기라. 내 말을 알아 듣겠는가?” 이토록 쉽고 시원한 법문 덕분에 통도사 극락암에는 늘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물처럼 살면 후회없으리 경상남도는 물론, 인근의 부산에 살고 있는 불교신도. 멀리는 서울에 살고 있는 불교신도들까지 기를 쓰고 저 멀고 먼 양산 통도사 극락암까지 찾아간 이들은 바로 그 깊은 산속 암자에 영축산의 대선사 경봉 스님이 앉아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봉 스님을 만나 뵙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면 이 세상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봉 스님은 영축산 약수터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돌에 새겨두고 신도들로 하여금 약수를 마시면서 그 글귀를 음미토록 하였고, 이 유명한 글귀가 자살하려던 수많은 중생들을 살려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을 만들어냈다. 영축산 약수터에 경봉 스님이 새겨둔 글은 다음과 같다. “이 약수는 영축산의 산 정기로 된 약수이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먹어야 모든 병이 낫는다. 물에서 배울 일이 있으니,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이 물이다. 넓고 짙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나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영축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가 차갑고 낙동강 물이 넓으니 물빛이 푸르도다.” 얼음물고 참선하다 치아 상해 영축산을 오르던 고해중생들이 이 약수터에 이르러 감로수로 목을 축이고 나서 경봉 스님이 써놓으신 이 글귀를 보고도 새로운 인생의 길을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영축산 약수터의 ‘물 법문’ 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마음속에 새겨 맛있는 인생을 살도록 생각을 바로잡게 해주고 있다. 물처럼 사노라면 결코 후회 없으리! 오직 참선수행에만 평생을 매달렸고 한겨울에도 끝없이 밀려오는 졸음을 막으려고 개울에 얼어붙은 얼음덩이를 깨어다가 입에 물고 수행을 강행, 젊었을 때 치아를 거의 다 버린 상태였다. 스님이 노인이 되셨을 때 스님의 치아가 너무 부실하여 음식을 제대로 잡숫지 못하자 제자와 신도들이 돈을 모아 의치를 해드리려고 했더니 스님은 한사코 손을 내저으셨다. “늙은 중이 갈비를 뜯어먹을 일도 없는데 틀니를 해 박아서 무엇하노. 그 돈 따로 쓸데가 있으니 차라리 나한테 현찰로 다고.” 그리고 스님은 틀니를 해 넣으시라고 신도가 놓고 간 돈을 가난한 신도를 위해 찔러 넣어 주었다. “집에 갈 때 양식이라도 좀 사가지고 들어가거라.” 경봉 스님은 평소 당신께서 불자들에게 당부하신 그대로 ‘물처럼’ 사시면서 우주만물을 이롭게 하고 계셨던 셈이었다.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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