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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光山金氏 文正公派 後孫이며 始祖公으로부터 40世孫으로 훌륭한 선조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나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후손의 한명으로 金萬重을 택하였다.
김만중의 정치적 생활도 또한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진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두 번이나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나, 숙종 13년에 언사의 죄로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하였고, 급기야는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 사건에 연루되어 남해의 외로운 섬에서 귀양살이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구운몽>의 저작 동기에 대하여 문인들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서포가 그의 어머니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배지에서 하룻밤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구운몽>의 저작 시기는 서포가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인데, 이 때는 이미 그의 형 김만기가 요절한 뒤다. 그러므로 하나 남은 자식까지 유배지로 떠나 보내고 나서 말년을 외롭게 지내던 노모를 위하여 평소에 어머니가 즐겨 읽던 패설류, 즉 소설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상당한 개연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극진한 효성으로조차 끝내 어머니의 임명종을 하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홀로 애통해 하다가 그 역시 외롭게 세상을 마치고 말았다.
우선 김만중은 그의 집안에서 숙부 김익희(金益熙)에게서 선진적인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주지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 후 우리 나라 사상문화 뿐에는 새로운 경향으로서 실학(失學)의 학풍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농민들의 해방 투쟁과 함께 대중의 각성된 자주적 정신과 국제적인 과학 문명의 접촉에 기초하여 봉건통치계급의 사대주의적 숭맹사상과 함께 관념론적인 성리학설과 형식적인 예의 범절의 공리공담에 직접 대립하여 출현하였다.
특히 거듭되는 전화 끝에 세습적 모순은 더욱 첨예화되고 양반토호들에 의한 토지 겸병의 급속한 진전과 함께 토지로부터 유리된 무장한 유민들이 횡행하였는데 이러한 절박한 민생문제는 일부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어 사회 개혁적 사상을 잉태시켰다.
또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유럽의 선진 과학 문명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지식인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는 바 북경에 갔던 사신들을 통하여 유럽의 지도, 천문, 역학 서책들과 망원경, 자명종, 신식대포, 화약 등을 입수하게 되고 또 우리 나라에 표착한 화란인들을 통하여 조총, 대포의 제작과 조련법 등이 전수되었다.
그리하여 실사구시를 표방한 실학적 학풍은 이상과 같은 당시 우리 나라의 사회 경제형편과 유럽의 선진 문명과의 접촉,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의 영향, 기타에 기초하여 선진적인 학자, 지식인들 속에서 대두하기 시작했다. 즉 지봉 이수광, 구암 한백겸, 잠곡 김육 등의 새로운 학풍을 거쳐서 <반계수록>의 저자인 반계 유형원에 이르러 실학의 개혁적 사상은 체계화되었다.
따라서 김만중의 문학도 이러한 그의 실학적인 측면과 분리할 수 없는 바 오히려 그의 실학 사상은 다름 아닌 그의 선진적 미학 사상과 사실주의적 창작에서 구현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김만중의 가문은 서인의 노론 계열에 속하여 그가 벼슬하는 동안에 남인과의 당파싸움이 어느 때 보다 격화되었는데, 김만중도 그 영향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687년에 김만중은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다시 두어 달 도 못되어 1689년 소위 『기사환국』으로 노론에 대한 대 탄압이 가하여졌을 때 송시열, 김수흥 등 80여명이 투옥, 처형, 유배되는 가운데 김만중도 투옥되었다가 다시 남해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1692년 7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소위 『기사환국』이란 숙종이 궁녀 장소의(장희빈) 에게서 난 왕자 균을 세자로 책립하여 들 때 서인들이 이를 반대한 데 대하여 가해진 대 탄압이다. 이를 계기로 장소의와 결탁한 남인들의 집권 시대가 6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배격하고 소론을 등용하였으나 소론은 장희빈의 사형을 동정하였다 하여 또 탄핵을 받게 되고 다시금 노론이 점차 등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당파싸움에 대해 김만중은 선두에 나선 것도 아니며 거기에서 자기의 이해관계를 찾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김만중은 숙종이 장희빈에게 미혹되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내쫓은 사실에 대하여 서인의 당파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이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격렬히 반대하여 나섰으니 그것은 그의 작품 『싸씨남정기(謝氏南征記)』가 바로 이 사실을 모델로 하여 씌여진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김만중은 그가 쓴 『윤씨부인 행장기』에서 자기의 유배살이에 대해 '영화로이 벼슬함이 미치고 미혹하야 화기를 밟아 대부인의 종신 근심을 끼치니' 라고 하여 그가 '미치고 미혹하야 화기를 밟았다'고 말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겸손하여 의례적으로 한 말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는 가장 맑고 참된 정심으로 숙종왕의 미혹을 깨우쳐 주려고 하였으나 나라일을 그르치며 자사자리(自私自利)만을 꾀하여 당파 싸움을 일삼는 자들과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김만중은 비록 그의 가문이 서인 계열에 관련되어 당파싸움에 희생되기는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불의 와 타협 할 줄 모르는 그의 공민적 입장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유배살이 에서도 자기의 입장과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국의 장래와 민중의 복리를 염원하면서 국가와 대중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사자리를 일삼는 간악한 무리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사상을 자기의 창작을 통해 더욱 명확히 하였다. 그래서 본시 학자이며 작가인 김만중에게 있어서 정치적 권력에 대한 야망은 처음부터 찾아 볼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의 공명정대한 공민적 입장으로 하여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유배생활을 당했던 것이다.
또한 <서포행장>에 의하면 김만중은 소설 뿐만 아니라 악부 가곡에도 능하여 무산고, 오서곡 등의 가곡을 편곡하고, 채상행, 비파행, 왕소군, 두견제 기타의 가사들을 지었다고 한다.
'공은 비록 조그마한 말예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여 흉중에서 노출되는 감정이 유창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서포집>에 서문을 쓴 삼연 김창집(金昌集)의 말인데 서포는 다방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유학자들이 소위 『말예』라고 하여 천시하던 것을 가장 가치있고 고귀한 것으로 생각했다.
즉 고루한 유학자들은 유교 경전이나 한시문 이외의 것은 모두 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가곡, 소설과 같은 예술 활동을 손끝 재주라고 하여 천시하였으며 특히 우리말로 된 노래와 소설들에 대하여는 이를 안중에조차 두지 않았다. 다만, 김만중에 앞서 정송강, 박로계, 윤고산과 같은 선진적이며 애국적인 시인들이 국어 시가의 가치를 인정하고 시조, 가사 등 우리나라의 시 문학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 이전에 국어로 소설 작품을 쓴 작가는 있었다고 하여도 그 이름을 전한 사람이 없다. 우리는 물론 <임진록>이나 <박씨부인전>, <임꺽정>같은 작품들이 김만중의 작품에 선행하여 출현한 것을 인정하며 따라서 이 작품들은 17세기에 들어 와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된 이시기 소설 작품들과 함께 김 만중의 소설 창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만중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우리 중세 국문소설작품들은 대개 그 작자가 밝혀져 있지 못하며 따라서 그 저작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제점까지 수반하고 있다. 중세 소설의 이러한 처지는 무엇보다도 양반소설에 대한 이단시와 함께 소설 창작에 관계하는 것을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부득이 익명 또는 무기명으로 작품을 쓰게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특히 구전문학에 모티브를 둔 소설 작품들에 있어서는 그것이 어느 개인 창작이기보다도 오랜 역사과정을 두고 왼성된 집체적 창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김만중이 살던 시기에 김만중과 같이 공개적으로 내놓고 국어로 소설 작품을 쓴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가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며 비상은 용기와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 실로 서포 김만중은 우리 나라 중세 소설 문학 전반을 통하여 국어 소설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 위에서 창작에 나선 작가로 특출하다.
『무릇 성정에 느낌이 있으면 매양 시가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가는 예날의 시가와는 달라서 읊을 수 있어도 노래부를 수는 없다. 그리하여 만일 노래부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 모국어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국어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도산 십이곡 서문)
즉 이 퇴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한문자의 도래가 오래되고 따라서 한문자의 발음들이 우리말로 바꿔져서 한시를 지어도 그것을 읊을 수는 있지만, 노래부를 수는 없는 딱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어 시가에 손을 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지 이 퇴계를 비롯하여 16세기 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들의 여기로서나마 국어 시가에 진출하게 된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특히 이 퇴계는 그의 시조 작품인 <도산십이곡>을 두고 스스로 노래부르며, 스스로 춤출 수 있는 것으로 자처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 퇴계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들의 한시가 가지고 있는 부족점들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과 또 국어 시가만이 노래부를 수 있는 시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모국어 시가에의 진출이 부득이하다는 것을 명확히 한 점에서 일정한 평가를 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퇴계에게서는 주체적 입장을 찾아 볼 수 없으니 그에게는 역시 한시문이 문학의 기본으로 되어 국어 문학의 가치와 그거 차지해야 할 위치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 퇴계는 유가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그릇된 평가로부터 『우리나라 가곡은 대개 음란한 것이 많아서 족히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라고 하여 우리 국어 시가에 대한 모독적인 언사까지 쓰고 있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가에서 유교의 도학적인 목적만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로운 정서면을 억압하고 연애시라면 소위 『남녀상열지사』이니 『비사리어(鄙詞俚語)라 하여 무조건 배척한 이오 양반 유학자들의 고루한 입장을 대변한 것인 바 김만중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만중은 이 퇴계가 그처럼 음란하여 족히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고 한 우리나라의 나무하는 촉각이나 물긷는 부녀자들의 노래를 이 퇴계까지 포함한 소위 학사 대부들의 시가보다도 훨씬 높이 평가하여 오히려 학사대부의 도학적이며 풍월식의 시가를 거짓의 것이라고 단정하였는데 바로 여기에 김만중의 입장과 사대주의에 물든 양반 유학자들의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김만중은 이조 봉건 통치하의 우리 문학 예술 발전에 있어서 주체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그것을 창작 실천에 옮긴 최초의 작가이다. 동시에 어느 나라 문학을 막론하고 그 나라의 모국어에 기초하여 문학을 발전시킴으로써만 진정한 문학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그의 선진적 견해는 역사학적으로 확증되었으며 오늘에 있어서도 올바른 과학적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