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살아오면서 심심찮게 김삿갓을 떠올렸던 것 같다. 하지만 방랑시인으로 민중의 한과 설움을 해학적으로 읊으며 일생을 풍미한 그에게 몰입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마땅히 대답할 말은 없다. 동란이 휴전으로 막을 내리던 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전통혼례를 치룬 집안 자형이 시골 처가에서 지내던 첫날밤이었다. 새신랑은 당시로선 드물게 대도시에서 최고학부를 나왔고 모교인 대학에서 총장의 비서를 맡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잔치에 참석했던 우리 청소년들에겐 그가 우상으로 비쳤던 것이다. 신랑을 만나기 위해 사랑방에 둘러앉은 친인척 자녀들 중에선 내가 가장 어렸다.
10여 명 중엔 총각에 가까운 청년들도 몇 있었다. 신랑은 뜬금없이 좌중을 둘러보면서 “김삿갓의 실제 이름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두들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을 때 가장 어린 꼬마가 ‘김병연’이란 이름 석 자를 답했다. 신랑은 그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뒤로도 만날 때면 신동이라며 격려해주곤 했다. 그땐 소도시의 초등학교를 그만 두고 시골 야학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김삿갓에 대한 얘길 들었기에 그렇게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4년 전 가을, 맡고 있는 은퇴자 단체의 단합대회 행사가 열린 날이다. 국민의례가 끝난 후 2부 행사는 유스호스텔 잔디마당에 마련된 무대에서 밴드와 초청가수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첫 번째 무대에 오를 가수가 잠시 자리를 떠나서 마이크로 찾고 있을 때 “야아, 지회장부터 먼저 한 곡 뽑아봐라”는 참석자들의 요청이 있었다. 그때 땜질식으로 엉겁결에 부른 노래가 ‘방랑시인 김삿갓’이었다. “와아, 지회장 맡고 싶어도 김삿갓 노래를 할 줄 몰라서 안 되겠네”라는 말이 왁자한 박수소리에 섞여서 들렸다.
참가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2절까지 부를 수 있었던 김삿갓 노래는 무엇보다 1955년에 세상에 나온 노랫말을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 리 / 흰구름 뜬 고개 너머 가는 객이 누구냐 /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4반세기 전, 작가 이문열은 김삿갓의 생을 그린 <시인>이란 장편소설을 묶었다. 소설을 써느라 자료를 뒤지다보니 김삿갓의 일생에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 있고 인상적인 부분이 많더라고 그는 밝혔다. 특히 설화 속에 감춰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들은 때로 작가에게 전율과도 같은 감동을 안겨주더라고 했다. 김삿갓은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평안도 선천 부사였던 조부를 탄핵한 글을 써 장원이 되었으나 조상을 욕되게 하였으니 어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겠느냐며 삿갓을 쓰고 평생을 방랑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스물대여섯에 집을 나선 뒤로부터 서른 중반까지 줄곧 함경도와 평안도를 떠돌며 주로 홍경래가 활동의 근거지로 삼던 곳을 밟았다. 그것은 김삿갓의 고뇌와 절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겠다. 거기다가 마침내 다복동多福洞을 찾은 김삿갓은 자신이 김익순의 손자임을 밝히며 목 놓아 울었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을 때 절로 콧날이 시큰하더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김삿갓을 소설화해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젊은 날의 그가 출세를 위해 권문세가에서 문객노릇을 한 적이 있다는 기록을 본 때문이라고 이문열은 밝힌다.
여기서 김삿갓의 시를 한 편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꽃을 피하기 어려워'란 칠언이다. 젊은 몸에 기생 안으니 천금이 지푸라기 같고 / 대낮에 술독을 끼니 만사가 구름 같구나 / 먼 하늘 날으는 기러기 물 따라 날기 쉽고 / 푸른 산 지나는 나비 꽃 피하기 어렵네 / 단천의 기생과 주고받은 이 시에서 아직은 과객으로 찌든 티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호탕한 풍류객의 기개를 느낄 수가 있다. 처음 몇 년 그의 시가 거둔 성공은 스스로에게도 뜻밖일 만큼 놀라웠다. 드물게는 이렇게 문화적 허영에 들뜬 기생방에서 시와 술 속에 그의 젊은 날이 마지막 불꽃으로 타올랐던 것이다.
난고蘭皐 김삿갓의 유적지가 조성되고 나서 온라인 세상 덕분에 몇 차례나 그 생생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만 직접 현장을 찾는 일은 미루고 있었다. 고향이 영월인 여든 줄의 선배는 애향심이 남다른 편이다. 여든에도 공사현장의 감리업무까지 직접 맡고 있는 바쁜 처지이면서도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 깊었던지 기꺼이 차량과 시간을 내어 유적지로 날 인도했다. 유적지는 지명까지도 김삿갓 일색이다. 김삿갓면 김삿갓로 216. 김삿갓 묘역이 있는 노루목마을에서 만난 기인은 우리 일행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소설小雪을 지난 지 닷새인 하늘은 가끔씩 눈발을 흩뿌리면서 집 떠나온 나그네에게 겨울 정취를 안겨주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기인은 살아있는 김삿갓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예순 중반은 넘겼을 터인데도 소복에 상투까지 틀고 앉아 내뿜는 그의 에너지는 우리 일행을 압도했다. 특히 하 하 하 하 호방하게 끊어서 내는 웃음소리는 남자가 들어도 백만 불짜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내방객을 맞는 서너 평짜리 독립건물 내실 한 면은 문학서적을 빼곡하게 꽂은 서가로 꾸몄고 나머지 벽면엔 한지에 붓글씨로 쓴 한시들이 여러 점 나붙었다.
붓통엔 크고 작은 붓이 가득했고 하얀 바탕의 원형 벽시계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세상을 향한 무언의 항변이 정지된 시계에 담겼을 것 같기도 하다. 사내는 친절하면서도 겸손했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웃음을 달고 있었다. 시인의 묘지까지 따라 나와 직접 시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 우리 일행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서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환심을 사는 걸로 봐서 그는 사업을 했더라도 대성했을 것 같았다.
김삿갓문학관은 묘역과 상당 거리 떨어져 있었다. 묘역에 붙여 문학관을 조성하려면 건물과 주차장 시비공원에 드는 너른 터가 필요한데 그러한 형편이 못되어 따로 만든 것 같았다. 위치는 위의 도로명주소 뒤에 22가 추가되어 216-22. 문학관은 김삿갓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정암 박영국의 김삿갓 연구 자료와 김삿갓 친필작품 및 장원급제시가 전시되어 있다. 내가 바깥마당 시비공원 작품까지 욕심을 부리며 카메라에 담는 것을 본 일행은 저 많은 자료를 정리하려면 몇날며칠은 고생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영월 출신 선배는 히말라야를 자주 찾아 설산 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귀국하는 등산 마니아다. 그가 유적지 뒤에 위치한 1052미터 높이의 마대산을 오르고 싶어 했고 나도 동행키로 약속했다. 김삿갓 유적지에선 1.8킬로미터로 가까웠다. 일행의 절반만 산을 오르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는 판단에선지 산행은 전격적으로 취소되었고 산행에 걸릴 시간만큼 문학관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에 여유가 생겨 편하고 꼼꼼하게 탐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문학관을 나서자 세월은 영원을 여행하는 나그네요 흘러가는 인생 또한 그러하다는 말이 떠올랐다.